59화
“운전 감각이 있네요. 좀 더 넓은 도로로 나가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니까 직진만 하는 중이라니까요.
직진으로, 심지어 백 미터도 달리지 않았는데 칭찬이 쏟아졌다.
“핸들을 그렇게 꽉 잡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손으로 꽉 핸들을 움켜쥐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나를 보며 이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과하게 긴장하면 더 위험해요. 지금보다 살짝만 힘을 뺍시다.”
너무 긴장하여 딱딱하게 굳어 있다고,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조금만 힘을 빼자고.
“잘하네요. 초보 운전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없겠습니다. 이제 저 앞에서 유턴하죠.”
“유, 유턴이요?”
“이 도로 타고 어디까지 가려고요. 유턴해서 아까 그 자리로 돌아가야죠. 앞뒤 차 오는지 확인하고.”
이러다 육지 끝까지 달리려고 하냐고, 이환의 농담을 들으며 어찌어찌 유턴을 했다. 쏟아지는 칭찬은 덤이었다.
“이렇게 몇 번만 왔다 갔다 하면 점점 편하고 익숙해질 겁니다. 오늘하고 내일은 이 도로에서 연습하고, 다음 주에는 좀 더 넓은 도로로 나가야겠네요.”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선생님.
선생님들은 학생이 단 한 번에 습득 및 응용까지 가능하리라 과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운전면허 학원에서도 대뜸 운전대부터 쥐여 주더니, 이환도 운전면허 학원 강사와 다르지 않았다.
“많이 긴장했어요? 해민 씨가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는 건 처음 봅니다.”
그런 질문은 운전대를 넘겨주기 전에 물어보셨어야 합니다.
겨우 이환에게 운전대를 돌려주었을 때에는 땀으로 핸들이 흠뻑 젖어 있었다. 민망해서 손수건으로 핸들을 마구 닦았다.
힘없이 조수석 시트에 축 늘어지는 나를 보며 이환은 한 손으로 여유롭게 핸들을 잡았다.
“어디 가 보고 싶은 곳 있어요? 모처럼 나왔는데 바로 들어가긴 아쉽잖습니까.”
“그보다는…… 목이 말라요.”
“편의점부터 들러야겠네요.”
내비게이션을 살핀 이환이 근처 편의점을 찾아 음료수를 사 주었다. 진이 빠져 아무 생각 없이 목을 축인다. 목구멍으로 물이 들어가고, 자동차의 에어컨 바람이 축축하게 젖은 땀을 식혀 주니 겨우 살 것 같았다.
“실장님.”
“네, 해민 씨.”
“여사님께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월급을 오늘 미리 받았습니다.”
“아, 들었어요. 내게 말했어도 되는데, 왜 여사님을 거쳐 말을 합니까. 나 조금 서운한데.”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은 아니고, 그만큼 거리감이 느껴지나 싶어서 서운했다는 겁니다.”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내저은 이환이 생수를 반쯤 비우고 뚜껑을 닫았다.
“어머니 병원비 때문인가요?”
“……네.”
“괜찮다면 우리 병원으로 옮기는 건 어때요. 요양 병원은 아무래도 보호자 대신 환자를 지켜보는 데에 중점을 두지 않습니까. 우리 병원으로 옮긴다면 치료도 병행할 수 있을 겁니다. 나아지지는 않아도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
“괜찮습니다.”
“병원비가 걱정된다면, 직원 할인가도 있으니 생각해 봐요. 같은 서울에 있으면 병원을 찾아가기도 편하지 않습니까.”
“실장님.”
선의로 가득한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내 표정은 조금씩 조금씩 굳어 갔다.
“괜찮습니다. ……이대로 두세요.”
그냥 이대로, 엄마가 죽어 가게 그냥 두세요.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고, 육체를 갉아먹고, 더는 갉아먹을 것이 없을 때 스러져 버리도록. 그냥 이대로 두세요. 내 인생이 나아지지 않는 것처럼, 그녀의 인생 또한 나아지지 않도록.
까맣게 침전한 눈으로 가만히 나를 살피던 이환이 손을 뻗어 내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해민 씨는 참 착해요.”
내 속내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칭찬이었다.
“선하고.”
이환은 알까. 엄마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나란 존재를.
나는 그녀를 내 손으로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는 겁쟁이였고.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는 편협한 자였으며. 그녀의 죽음만을 기다리는 불효자였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인간으로 남고 싶어서, 몸을 혹사하여 번 돈으로 겨우 엄마의 목숨만을 남에게 맡겨 둔 비겁자이기도 했다.
“마음 여린 내 요정님.”
살살 뺨을 문지르던 손이 목뒤를 감싸고 약한 힘으로 끌어당긴다. 상체를 옆으로 틀어 가까이 다가온 이환이 칭찬하듯, 위로하듯 뺨 위에 입술을 붙였다. 차가운 차내 공기로 인해 식은 입술이 미지근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이환을 바라보았다. 살짝 입술이 스쳤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입술의 접촉이 기분 좋다. 어떤 뜨거움 없이 입술만을 마주하고 가볍게 문지르는 행동에 목뒤를 감싸고 있던 이환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키스……해도 됩니까.”
나는 허락의 말 대신 눈을 감았다.
격정적이지 않은 입맞춤은 부드러웠다. 윗입술을 핥고 아랫입술을 빤다. 입술 틈을 가르고 들어온 혀는 얌전히,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안쪽을 헤집었다. 얽힌 혀를 잡아당겨 빨고 깨물고. 뒤섞인 타액을 욕심껏 삼킨 뒤 마른 입안을 핥는다.
페로몬으로 정신을 놓고 뒹굴었을 때를 제외하면, 제정신으로는 처음인 입맞춤이었다.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점차 의심스러워지고 있지만.
중간에 몇 차례나 멈추어 숨 쉴 여유를 주면서도 붙은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퉁퉁 부은 입술에 열이 올라 뜨거워질 때까지, 이환은 내 입술을 잡아먹을 듯 빨아 댔다.
“실……장님, 그만요.”
차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지만, 편의점 앞에 오랫동안 정차해 있는 탓에 편의점 직원이 유리창 너머로 이쪽을 힐끔거렸다. 이러다 항의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환을 밀어냈다.
“미안해요.”
겨우 떨어진 이환이 젖은 입술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 주며 사과했다.
“편의점 직원이…… 엄청 의심스럽게 보고 있어요.”
내 중얼거림을 들은 그가 작게 웃었다.
“신경 쓰이게 했네요. 미안합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준 이환이 몸을 바로 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살짝 설렜습니다.”
어디로 갈지를 정하듯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찾아보며 이환이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처음이구나 싶어서.”
“…….”
“손잡을까요.”
왼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살짝 내민 오른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서 잡아 달라고 항의하듯 까닥이는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기분 좋은 체온이 느리게 뒤섞였다.
11
나를 집에 두고 출근을 한 이환은 그날부터 점심 식사를 집에 들어와 먹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기꺼이 식사를 차려 주시던 여사님이 일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기어이 역정을 내셨다.
“아니, 누가 삼시 세끼를 집에서 먹어. 출근했다가 점심시간마다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요. 이럴 거면 그냥 점심시간 때 해민 씨를 데리고 나가.”
드물게 진심으로 역정을 내시는 여사님의 모습에 나도 이환도 찔끔했다. 결국 여사님의 의견을 받아들여 점심시간마다 이환과 함께 나가 밥을 먹고 와야 했다.
“저는 여사님이랑 식사해도 괜찮은데요.”
“제가 안 괜찮습니다. 해민 씨 없으면 밥맛이 없어요.”
내가 조미료도 아니고 MSG도 아닌데, 내가 같이 있다고 없던 밥맛이 생길 리가.
“혼자 먹으면 외롭고요.”
조수석에서 명백한 비웃음이 흘러나왔으나 이환은 뻔뻔했다.
“백 비서님이 지금 웃으신…….”
“잘못 들은 겁니다.”
“아니, 지금도 웃고 계신데.”
이환은 당당했지만, 백윤경도 당당했다.
상사의 면전에 대고 비웃는 비서라니, 괜찮은 걸까.
“사람의 유형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까?”
“네?”
갑자기?
“해민 씨나 김 기사님처럼 세상에 감사하며 겸허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백윤경처럼 조금만 잘해 주면 기고만장해서 기어오르는 놈들도 있죠.”
“너무 극단적인 이분화인데요.”
내 대꾸에 앞에 앉은 백윤경이 웃다 못해 기침을 토해 냈다.
“앞으로 윤경이 식비를 좀 줄여야겠습니다. 이게 다 너무 잘 먹인 탓이 아닐까 싶네요.”
“실장님, 그건 아니죠. 비서가 어디 마음 편하게 밥 먹는 직종입니까. 비싼 거라도 먹어야 서러움이 덜하지, 시간에 쪼들리는 와중에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 사 먹으면 일의 능률이 안 오른다고요.”
백윤경이 기겁하며 항의했지만, 이환은 개가 짖나 싶은 표정으로 창밖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미 나는 마음의 상처를 받아서, 그 어떤 말로도 위안이 되질 않네.”
“오늘 퇴근을 한 시간 일찍 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조금 위안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이른 퇴근을 협상의 수단으로 사용해도 괜찮은 걸까. 회사의 앞날을 조금 걱정해 보았다.
이환이 나를 데려가는 곳은 항상 고급스럽고 값비싼 곳이었다. 음식은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고, 인테리어도 눈 돌아갈 정도로 번쩍번쩍하고, 서비스는 이보다 더 극진할 수 없었다.
한정식, 양식, 일식, 중식 등의 전문 레스토랑과 유명 호텔 레스토랑을 한 번씩 거치고, 오늘 온 곳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었다. 알 수 없는 메뉴판을 손에 쥐고서도 결국 추천을 받아 주문을 했다.
“음식을 많이 가리신다고 여사님이 걱정하시던데, 그래도 식사하러 다니시는 곳이 꽤 다양한 것 같아요.”
“나 말입니까?”
“네.”
아뮤즈 부쉬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이환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보통 가던 곳만 가긴 합니다.”
“엄청 여러 군데 다니셨는데요?”
“해민 씨가 여러 음식을 먹어 봤으면 해서요.”
와인으로 입을 헹구며 답하는 말에 조금 당황했고 또 조금 놀라기도 했다. 이제껏 부자들은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하는구나 감탄만 했지, 이환이 그러한 이유로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에서 식사를 했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