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58)화 (58/172)
  • 58화

    이환과 관련된 사람이 나를 만나러 온다면 분명 이환과 관련된 일일 게 분명하고, 그렇다면 이환도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다만, 사이가 좋은 듯 보이던 형제인데도 이정이 나를 만난 일에 꽤나 신경을 쓰는 이환의 모습이 조금 의아할 뿐이다.

    “제가 부회장님과 만나면 곤란하세요?”

    “네?”

    “신경 쓰시는 것 같아서요.”

    “아,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이환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사람들이 요정님한테 반할까 봐 걱정이긴 하네요. 형하고 싸우고 싶지는 않은데.”

    순간 나도 모르게 차게 식은 눈으로 이환을 바라보았다.

    “결혼해서 자식까지 있으신 분인데요.”

    “그래도 끌리는 쪽으로 손을 뻗는 건 인간의 본능 같은 겁니다. 그런 점에서 조금 불안하긴 하네요.”

    농담인가. 농담이겠지. 농담일 거다. 농담이어야 한다.

    자식까지 있는 유부남인 형제를 대상으로 한 진담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그냥…….”

    “그냥?”

    자연스러운 질문에 어제의 대화를 떠올렸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할 뻔했다. 미주알고주알 이환에게 말을 전달하기에는 어제의 대화가 그리 올바르지 않았다. 속 긁는 이정의 태도도 그렇고, 나 또한 아슬아슬하게 선 넘는 발언을 많이 했다.

    “혼자 있을 때 누가 찾아오면 상대하지 말아요. 내가 없을 때 찾아오는 사람치고 좋은 의도로 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환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실장님.”

    “네, 해민 씨.”

    “호텔 개관식 파티에서요. 실장님이 드신 샴페인에 약이 들어갔다고 하셨잖아요. 누가 약을 탔는지는 알아내셨어요?”

    시일이 꽤 지났는데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었다. 꼭 내게 말해 주어야 하는 사항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서 이환과 이런저런 일을 겪었기에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아…….”

    “아?”

    “누가 그랬는지야 뻔하지 않습니까.”

    뻔하다고 생각했으나, 생각처럼 뻔하지만은 않은 기분이 자꾸 들었다.

    이환은 모르겠지만 그 파티에서 회장 사모님과 잠시 만났었다. 그때 마주했던 회장 사모님은 전처 자식을 미워하고 구박하기보다 그냥 상종을 하고 싶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엮이지 말라며 치를 떨었지. 아무 상관도 없는 나를 붙잡고 경고를 할 정도로, 그녀는 겁박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무언가에 겁먹은 사람처럼 보였다.

    “회장 사모님이요?”

    “그쪽 말고 누가 또 그럴 사람이 있겠습니까.”

    “증거는…….”

    “증거 찾아내서 신고할 것도 아니고. 괜한 일에 심력을 낭비할 필요 없습니다.”

    “조사, 안 하셨어요?”

    “해 봤자 뭐가 나오겠습니까.”

    물증도 없이 그저 심증만으로 범인을 확정했다는 말로 들렸다. 그 확신이 왜인지 꼭 그녀여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

    “지난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식사해요. 죽 식으면 먹기 거북하니까.”

    “네.”

    그런 일을 겪었으면서도 조사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이환의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비슷한 일들을 많이 겪어서 이제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충 넘어갈 일은 아닌데. 횡액을 겪은 당사자가 너무 심드렁했다.

    “해민 씨?”

    묘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이환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표정을 갈무리하며 죽을 꾸역꾸역 떠먹었다.

    ∞ ∞ ∞

    [정명숙 님의 병원비가 입금되지 않았습니다. 확인하신 뒤 입금 바랍니다.]

    아직 월급날은 오지도 않았는데 병원비 입금 독촉 문자가 날아왔다. 지난달에 병원비 내는 날짜를 일주일 넘기고 보냈었지. 그날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월급날보다 병원비 입금 날짜가 더 빠른 게 당연했다.

    이환이 월급을 적지 않게 준 덕분에 지난달 병원비를 보내고 돈이 남긴 했지만, 그래도 새로이 병원비를 내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아직 월급날이 되지도 않았건만 가불이 가능한지를 물어봐야 할 듯싶다.

    월급 주는 사람은 이환이지만, 왜인지 이환에게 직접적으로 돈 이야기를 꺼내기가 곤란했다. 여사님에게 슬쩍 여쭤볼까. 첫날에도 여사님이 입금해 주셨으니까, 여러모로 그편이 나을 듯하다.

    “여사님.”

    거실을 밀고 다니던 청소기를 한쪽에 세워 두고, 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는 여사님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응, 해민 씨. 벌써 다 했어요? 너무 부지런한 거 아니야? 당장 안 해도 된다니까. 과일 먹게 좀만 기다려요. 배랑 감이랑 깎고 있는데, 포도도 먹고 싶으면 냉장고에서 꺼내고.”

    무언가 말을 붙이기가 참 어렵다. 포도는 괜찮다며 주방 테이블에 앉아 여사님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부담 갖지 말고.”

    “네? 아, 포도요? 그럼 꺼낼까요?”

    잠시의 침묵 뒤에 툭 나온 여사님의 말에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할 말 있는 표정이잖아. 부담 갖지 말고 말하라고.”

    뒤돌아 있으면서 어떻게 알았을까. 뒤에도 눈이 있는 사람처럼.

    손을 뺨을 문지르며 제 표정이 정말 그랬나를 되새겨 보게 된다.

    “저기, 여사님.”

    “응.”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한데요. 월급을 좀 미리 받을 수 있을까요. 아직 한 달도 못 채우고 가불부터 말씀드리기가 면목 없다는 거 아는데, 제가 급하게 보내야 할 돈이 있어서요. 절반, 아니, 일주일 치만 먼저 받을 수 있을지…….”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굳이 미안해야 할 사람이라면, 해민 씨 사정을 들었으면서도 굳이 고용한 우리지. 처음 말했듯이 일급으로도 줄 수 있고, 선금으로 줄 수도 있으니까 눈치 보지 말아요. 돈 내야 하는 날짜가 조금 빠른가 봐?”

    매달 병원비를 내야 한다고 내가 말을 했던가. 사정이 있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해 두었지만, 시간을 내어 엄마 병원에 다녀온 적이 있기에 눈치로 알아차렸으리라 생각했다.

    “돈은 내가 지금 바로 해민 씨 통장으로 보낼게. 이런 일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요. 괜히 혼자 속으로 끙끙 앓지 말고.”

    칼을 내려놓고 손을 씻은 여사님이 휴대폰으로 은행 앱을 켰다. 아무리 봐도 나보다 더 현대화된 문명에 익숙하신 듯했다. 나 또한 은행 앱을 쓰긴 하지만, 종이 통장으로 한 번씩 정리를 해 두고 봐야 눈에 들어오던데.

    “실장님께 먼저 말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조금 이따 얘기해도 돼.”

    고용주에게 허락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월급이 고용주 주머니에서 나와야 하니 물어본 거였는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어느 주머니에서 나왔는지 모를 돈이 입금되었다는 은행 문자를 받았다. 확인을 해 보자 한 달 월급이 통째로 입금되어 있었다.

    “돈 들어왔어요?”

    “네, 확인했어요. 감사합니다.”

    “요즘은 그 자리에서 돈 보내는 게 가능하니 참 좋아. 도련님에게는 내가 말해 둘 테니까, 해민 씨는 볼일 봐요. 아까 이야기 들어 보니 점심은 나가서 먹는다며. 해민 씨도 나갈 준비 해야지.”

    “네?”

    그런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 나도 모르게 잡혀 있는 점심 일정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드라이브 간다던데.”

    아니, 이 양반이 기어코.

    “점심은 뭘 해 먹나 고민했는데 잘됐지. 나가서 맛있는 거 사 달라고 해서 먹어요.”

    “그럼 여사님 혼자 드셔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혼자 먹는 거랑 도련님 끼니 챙기는 거랑 같나. 입 짧은 양반 먹일 생각하면, 어휴. 음식 만드는 것보다 메뉴 고르는 게 더 골치가 아프다니까. 하루에 한 끼 정도는 나가서 먹어 줘야 내가 편해.”

    ‘도련님’을 끔찍이 여기는 여사님도 밥 차리는 데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으시는구나. 의도치 않게 굳이 몰라도 되는 정보를 얻게 된 기분이었다.

    ∞ ∞ ∞

    여사님의 말처럼 점심을 먹기 전에 이환이 나를 끌고 집을 나왔다. 운전기사도 없이 이환이 직접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을 팔자 좋게 차지했다.

    여유롭게 교외로 빠져서 부잣집 별장처럼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오가는 차가 드문 이 차선의 한적한 도로를 찾아 갓길에 차를 세웠다.

    “자리 바꿉시다.”

    “지, 진짜요?”

    “그럼요. 어서 내려요.”

    달려오는 차가 없음을 확인한 이환이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저 진짜 액셀이 어느 쪽인지도 기억 안 나요, 실장님.”

    “몸이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몰라도 내가 옆에 있으니 걱정 말아요.”

    실장님이 옆에 있어서 더 걱정인데요.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SG 그룹 회장님 아들을 병원에 보내 버린 주범이 된다. 게다가 지금 이 차도 막연하나마 웬만한 가격으론 사지 못함을 알기에 어디 스치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다.

    “빨리요.”

    계속되는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조수석에 탄 이환이 안전벨트를 매고 나를 보았다.

    “차에 타면 가장 먼저 뭘 해야 할까요.”

    “안전벨트요.”

    벨트를 매려고 하는 내 손을 붙잡으며 이환이 고개를 저었다.

    “보통 자기 차를 탈 때는 그렇지만, 지금처럼 남의 차를 운전할 때는 의자 위치부터 조절해야죠. 발판에 발이 닿지 않으면 위험하니까. 해민 씨 지금 의자 앞쪽에 걸터앉아 있잖아요. 엉덩이 뒤로 바짝 붙여 앉고, 거기 버튼 있으니까 눌러서 위치 조절해요.”

    이환과 내 다리 길이 차이를 원치 않게 실감하며 의자를 조절했다. 안전벨트를 매고,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도 확인하고.

    “천천히 달려 봐요.”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몇 번 덜컥거리다 적정 속도를 유지하며 쭉 도로를 달리고 있자, 옆에서 이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잘하고 있어요. 이렇게 잘하면서 왜 엄살을 부렸습니까.”

    저 지금 직진밖에 안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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