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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57)화 (57/172)

57화

“더 이상 회사는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신 집에서 여사님 일을 도와주었으면 해요. 여사님도 이제 나이가 있으셔서 집을 관리하기엔 힘에 부치시는 듯하니. 새로운 고용 조건으로, 업무 연장할 생각 있습니까?”

까만 눈동자가 긴장을 품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숨죽인 상태로 내 호흡, 표정,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완벽한 갑의 입장에서 그는 왜 을을 자처하는 걸까. 그가 내게 표하는 호감이, 내게 말하는 좋아한다는 감정이 마치 그를 약하게 만드는 것처럼. 그는 한없이 약자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 그답지 않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다. 가슴이 쓰렸다.

“오늘 퇴근 시간까지는 회사에 있겠습니다. 내일부터는 집에서 여사님 도와 드리고, 제가 월급 받는 만큼 할 일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돈 받고 일하면서도 배짱이다. 내가 남의 돈 받고 일하면서 언제 이렇게 배짱을 부려 본 적이 있었나를 떠올려 봤지만, 부당한 대우에 못 해 먹겠다고 울분이 치솟아도 한 달은 기어코 채워 월급을 받아 내고 그만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더니.

사장 성격이 더러워서, 욕을 해서, 성추행을 해서, 폭력을 휘둘러서, 월급을 떼먹어서 등등의 이유도 아니고 받는 돈보다 하는 일이 적어서 일을 못 하겠다는 배부른 소리가 내 입에서 나왔다.

아마도 그건, 지금처럼 나를 올곧게 쳐다보는 이환의 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죄송합니다.”

어쩌면 이환이 나를 잡아 줄 거란 기대심이 기저에 깔려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배짱을 부렸을 수도 있다. 나는 이환의 마음을 받아 줄 여유가 없지만, 굳이 이환이 나를 붙잡는다면 어쩔 수 없이 월급 받으며 일을 하겠다고. 그저 나 좋을 대로의 핑계겠지.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뻔뻔한지를 깨닫자 수치심이 밀려왔다. 그래서 사과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 사과에 이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는 어떤 말 대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나를 품에 안았다.

“괜찮아요. 해민 씨만 마음 편하게 내 옆에 있으면 됩니다. 몸이 편한 것은 싫다니 마음이라도 편해야죠.”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이환은 가벼운 어조로 장난스레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뭘 어쩌겠다는 건지, 너무 복잡해요.”

“내 요정님이 아직 어려서 그래요. 조금 더 크면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이 생길 겁니다.”

지금은 이대로도 괜찮다고, 반드시 확신하고 행동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명확해질 때가 올 거라고.

이환은 모처럼 성숙한 어른의 얼굴로 나를 다독였다.

∞ ∞ ∞

주말의 아침은 여유롭다.

아침 식사 시간은 똑같지만, 출근을 하지 않기에 조마조마하며 이환을 깨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았다.

식사 준비가 어느 정도 진행된 것을 보고 이환을 깨우고자 이 층으로 올라갔다.

여사님은 아침마다 깨우는 게 곤혹스럽다고 하셨지만, 한 달 동안 이환을 깨우면서 곤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비록 깨운다고 한 번에 일어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침대에 누워 버티는 일도 없었다.

그냥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서 조금 미적거리는 수준이었지. 그 정도면 깨우기 수월한 편에 속하지 않나.

여사님의 말처럼, 그동안 지켜본 결과 이환은 잠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냥 늦게 자는 것뿐이다.

가끔 새벽에 깨서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을 가려고 방을 나오면, 이환의 침실 혹은 서재에서 항상 불빛이 새어 나왔다. 새벽 두세 시에도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았으니, 수면 시간은 네다섯 시간을 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새벽까지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일찍 자도 일어나는 게 편할 텐데.

오늘도 곤히 잠들어 있는 이환을 내려다보며, 그가 새벽까지 대체 뭘 하느라 잠을 안 자는가에 대해 잠깐 고민했다.

“실장님.”

“…….”

“실장님, 일어나셔서 식사하세요.”

한 번에 번쩍 눈을 뜨지는 않지만, 그래도 두어 번 부르면 일어나는 시늉은 한다. 꾸물거리며 뒤척이던 이환이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였다.

“아침, 먹기 싫은데요.”

왜 갑자기 안 하던 투정이지.

“그래도 아침은 드셔야죠.”

“주말이니까 안 먹어도 됩니다.”

“어디 아프세요?”

“아뇨.”

“내려가기 귀찮으셔서 그러면 여기로 가져올까요?”

왜 안 하던 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먹기 싫으면 계속 자든지.’ 하고 내버려 두기엔 소중한 고용주님이시다. 칼칼하게 잠긴 목소리로 식사를 거부하는 서른네 살의 남자를 살살 달랬다.

“해민 씨와 함께 출근하지 못하니 힘이 나지 않네요.”

깔끔하게 합의해 놓고 며칠이나 지났는데, 왜 뒤늦게 투정일까.

“주말이라 원래도 출근 안 하잖아요.”

주말이라서 이렇게 여유를 부리며 시위를 하는 모양이다. 평일에는 출근 때문에 시간이 부족해서 뻗대기 어려우니까.

다만 주말이라 여유롭기도 하지만, 주말이기에 그 투정에 설득력도 없고 영향력도 없음을 이환은 알아야 했다.

“저 배고파요. 실장님이 드셔야 저도 아침을 먹죠.”

“해민 씨만 내려가서 먹어요.”

“……실장님이랑 같이 먹고 싶어서요.”

내가 진짜, 이런 말까지 해 가며 고용주의 아침을 챙겨야 하나. 잠시 망설임은 있었으나 내뱉은 말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침대에 늘어져 있던 이환이 단번에 일어나 앉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 봤는데 해민 씨 무서운 사람이었네요.”

“제가요?”

“네.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식사를 건너뛰겠습니까.”

하암, 하고 하품을 하며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촘촘한 근육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남자의 상체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아침 먹고 드라이브 갈까요.”

“드라이브요?”

“운전면허도 땄는데, 슬슬 연습해 봐야죠.”

어제 먹은 죽이 얹힐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몰아 본 차라고는 운전면허 시험용 수동 트럭이 전부인데, 대담한 드라이브 발언에 이 남자는 목숨이 여러 개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건 좀, 마음의 준비가 된 뒤에요.”

“자주 몰아 봐야 익숙해집니다.”

“지금은 익숙해질 단계가 아니에요. 면허 따려고 수동 트럭 몰아 본 게 전부라서, 승용차는 못 몰아요.”

“액셀이랑 브레이크만 알면 되죠.”

“어느 게 액셀이었는지도 가물거려요.”

놀랍게도 도로 주행 시험에 합격하고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머릿속이 리셋되었다. 운전 앞에서만큼은 나 자신을 믿지 말자고 그날 그 시간 다짐했다.

내 말에 낄낄거리며 웃은 이환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먼저 가 있어요. 씻고 내려가겠습니다.”

“아……, 네.”

이제는 도와줄 필요가 없지. 깁스도 멋대로 풀어 버렸고, 병원에 가서 더 이상 깁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인도 받았다. 더는 아침마다 알몸의 이환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럼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그래요.”

잠옷 바지만 걸친 채 욕실로 들어가는 이환을 확인하고 침실을 나왔다.

“도련님은 일어나셨어?”

“네. 씻으러 들어가시는 거 보고 내려왔어요.”

“그럼 금방 내려오시겠네.”

냉장고에 있던 반찬과 갓 만든 나물 반찬을 접시에 담아 식당 테이블로 옮기는 사이 식기를 꺼내 두었다. 죽을 담을 그릇과 수저, 물컵. 그것을 본 여사님이 아휴, 하고 나를 만류했다.

“식사 차리는 건 내 몫이야. 해민 씨는 밥 먹은 뒤에 그릇만 식기세척기에 넣어 두기로 했잖아.”

“이 정도는 옆에서 할 수 있잖아요.”

어제 퇴근하고 집에 와서 여사님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별히 할 일이 없다며 곤란해하시더니 몇 가지 집안일을 내게 나눠 주시기로 했다. 그래 봤자 하루 일과로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지만, 진짜로 하는 일 없이 이환을 따라다니던 때보다는 나아 보였다.

“도련님 내려오시네. 식당 가 있어요. 죽 퍼서 내갈 테니까.”

그릇에 죽을 퍼 담으며 여사님이 나를 쫓아냈다.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힐끗거리자, 계단을 내려오는 이환이 보였다. 만날 늙었다 나이만 먹었다 말씀하시면서 어째 귀는 나보다 더 밝으신 듯하다.

“전복죽이네요?”

“도련님도 그렇고 해민 씨도 그렇고 요즘 통 힘이 없는 것 같아서요. 먹고 힘내자고.”

“잘 먹겠습니다.”

아침 안 먹겠다고 투정 부렸다는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겠지.

죽을 내려놓고 식당을 나가는 여사님을 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어제, 부회장님 만났어요.”

뜨거운 죽을 후후 불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그래도 이야기는 해 두어야겠다 싶어 말을 꺼냈다. 죽 그릇에 숟가락을 넣던 이환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보았다.

“누구를…… 만났다고요?”

“이정 부회장님이요. 실장님 형님.”

“언제, 아니, 어디서 만났습니까?”

숟가락을 뜨는 것도 잊은 채 왜인지 사뭇 당황한 얼굴로 이환이 물었다.

“면허 시험장 근처에서요. 운전면허증 발급받고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 태워 주셨어요.”

우연이 진짜 우연은 아닌 듯 느껴졌지만, 이정의 말에 따르면 우연이라고 하니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이정과 나눈 이야기를 전한 것도 아니고 그저 만났다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데, 이환의 표정은 왜인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실장님?”

“아, 아닙니다. 신기한 우연 같아서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멍한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숟가락을 입에 문 이환이 다급히 물을 찾았다. 죽 그릇 안에서 뜨겁게 달구어진 숟가락을 입에 넣으면 보통 저렇지. 속으로 혀를 차며 이환의 손에 물컵을 쥐여 주었다.

“앞으로 형이나 혹은 나와 관련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말해 줄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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