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56)화 (56/172)
  • 56화

    “거의 다 도착했네.”

    “그러게요. 부회장님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편한 얼굴이 아닌데?”

    내 표정을 살피며 이정이 낄낄 웃었다.

    “참, 환이는 깁스 풀었어요?”

    “아뇨, 아직 하고 계십니다.”

    “그래? 이상하네. 팔이 부러져도 한 달이면 낫는데, 금 간 것으로 뭐 이렇게 오래 깁스를 하고 있지? 난 보름이면 풀 줄 알았거든. 우린 알파라서 회복력도 엄청 좋은 거 알아요?”

    이상하지? 하고 묻는 이정은 의아한 표정이 아니라 이상함을 어서 깨달으라고 재촉하는 얼굴이었다.

    “…….”

    “진짜 도착.”

    회사 정문이 아니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온 차가 주차 구역의 한 자리를 차지하며 멈춰 섰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대충 감사하다고 칩시다. 그건 그렇고 팔찌가 예쁘네.”

    “아…….”

    반소매 티셔츠 위에 얇은 남방을 걸치고 있었지만 소매를 걷고 있었던 탓에 손목에 걸린 팔찌가 드러나 있었다. 소매를 내려 팔찌를 안 보이게 감추었지만, 이미 그것을 포착한 이정의 눈이 반질반질 빛났다.

    “길바닥에서 주운 건 아닐 테고, 환이가 줬나 봐?”

    “……네.”

    “왜?”

    “…….”

    그러게, 왜 줬을까.

    운전면허 합격 선물이라고 하기엔 이유가 너무 보잘것없었고 선물은 과하게 거창했다. 그때는 이환의 설득 어린 강요에 어쩔 수 없이 받았지만, 누군가 물어본다면 설명하기가 낯 뜨거운 이유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우리가 아무리 돈이 넘쳐나는 집구석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발에 차이는 사람들에게 돈을 막 뿌리지는 않거든.”

    “……가족 모임에 실장님이 절 데려가셨던 날 기억하세요?”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냐면서도 무슨 의도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이정이 장난스레 고개를 까닥였다.

    “그때 부회장님이 제게 선물을 주셨죠. 원래 다른 목적으로 준비하셨을, 엄청 비싸 보이던 시계요. 돌려드리긴 했지만, 그때 왜 저한테 그런 비싼 선물을 주셨어요?”

    사실 답을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선물이라고 던져 준 그 상자 안에 시계가 들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테고,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 시계의 가격보다는 나와 이복 남동생의 만남을 성사시키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을 테니까. 그것을 모른 척하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물었다.

    “와, 그렇게 물으면 내가 할 말이 없는데. 구구절절 필사적이긴 하지만, 뭐. 오케이. 기억력도 좋고, 순발력도 좋고, 빠져나가는 타이밍도 좋았어.”

    유쾌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은 이정이 손가락을 까닥이더니 다른 말을 꺼냈다.

    “해민 씨.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아무래도 오늘 만남의 진짜 목적이 나오려나. 이정이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용건을 말하려는 모양이라며, 내리려고 잡고 있던 문을 놓고 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네.”

    “호텔 개관식 다음 날, 환이가 엄청 개운한 얼굴로 느지막이 퇴실했다고 하던데. 해민 씨는 기력이 쪽 빨린 사람처럼 영 매가리가 없었다고 그러고.”

    “…….”

    “약 먹은 사람은 환이인데, 왜 해민 씨가 그렇게 피곤했을까.”

    진짜 몰라서 묻는 건지, 알고 있는 사실을 확답받으려는 건지, 그도 아니라면 나를 돌려 까려는 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해민 씨.”

    “네.”

    “해민 씨가 베타라고 했던가.”

    “…….”

    이 부분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이제껏 베타라고 알고 있었지만, 내 몸뚱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메가가 되어 있었다는 변명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치졸했다.

    “삼십사 년 묵은 동정을 따먹은 기분이 어때요? 알파는 몸으로 하는 건 대부분 잘하거든. 처음이었어도 구멍 못 찾을 일은 없었을 텐데.”

    비스듬히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무슨 생각인지 혹은 무슨 의도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이환의 형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어째서 이런 질문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열네 살이나 어린 사내새끼 따먹은 기분이 어떠냐고 동생한테는 물어보셨어요? 갓 스물 된 몸뚱이라 회춘하는 기분이셨을 텐데.”

    왜 삼십사 년 묵은 제 동생의 동정만 아까워해. 이쪽도 처음이었던 건 마찬가지인데.

    조금은 억울했고, 조금은 어이없고, 또 조금은 화가 났다. 그래서 그대로 돌려주자 예상과는 다른 대응이었는지 길쭉한 눈매가 동그래졌다.

    “실장님은 아세요? 부회장님이 동생 아랫도리에 관심 많으신 거. 삼십오 년 채울 수 있었는데 삼십사 년에 동정이 깨져서 안타까워하셨다고 말씀 전해 드릴까요.”

    잠시 말이 없던 이정이 이내 아하하하,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와, 마냥 말랑말랑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해민 씨 성격 있구나?”

    뭐가 그리 웃긴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쏟아 내는 이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요정님이라서 사람 무서운 줄을 모르나?”

    “요정 안 믿으시잖아요.”

    “고분고분한 건 때려치우기로 했어요? 점점 성격 나오는 것 같은데.”

    “고분고분한 거 안 좋아하시는 듯해서요. 이런 거 원하셨잖아요.”

    “역시 해민 씨는 눈치가 빨라.”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실컷 웃은 이정은 눈가에 살짝 고인 눈물을 닦아 내며 끅끅거렸다.

    “와, 이렇게 웃어 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그러고 보면 환이가 사람 보는 눈이 참 독특해. 잘도 이런 걸 옆에 두고 말이야.”

    “하실 말씀 끝나셨으면, 이런 건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가 봐. 환이가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문을 여는데, 등 뒤로 웃음기가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민 씨의 똑똑함을 칭찬해. 베타에도 오메가에도 속하지 못하는 반푼이는 줄이라도 잘 잡아야지.”

    병원 진료 기록지까지 뒤져 본 모양이다.

    들으라고 한 말이겠지만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이정이 원하는 반응이 짐작되었기에, 그 반응을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힘주어 차 문을 밀어 닫았다. 주차장에 꽝,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 ∞ ∞

    “해민 씨. 잘 다녀왔어요? 운전면허증 발급받았습니까?”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질문이 날아왔다. 한 시간 남짓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한 달 정도 못 본 사람처럼 반가워했다.

    대답 없이 빤히 얼굴을 쳐다보자, 환하게 피어올랐던 얼굴에 미소가 희미해졌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표정이 안 좋네요.”

    “실장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화를 내고 싶기도 했고, 따지고 싶기도 했고, 방금 주차장에서 겪은 일을 일러바치고 싶기도 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꾹꾹 눌러 참느라 내장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을 받으면 가장 큰 병명으로 화병을 꼽지 않을까. 하지만 이십 년 동안 참아 오기만 했던 성격은 이번에도 속으로 삭이는 쪽을 택했다.

    “실장님.”

    “네, 해민 씨. 무슨 일이에요.”

    “손…… 다 나으셨는데 왜 깁스하고 계세요?”

    손 언제 나아요? 금 간 거 아직 안 붙었어요? 깁스 언제 푸세요? 의사는 뭐래요?

    돌려 묻는 대신 진짜 궁금한 것을 물었다. 마주한 눈동자에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까만 어둠이 짙어졌다. 휘어 올라갔던 입매가 일자로 굳어 무표정한 마네킹을 보는 기분이다.

    “멀쩡한 손에 깁스하고 다니는 거, 안 불편하세요?”

    “병원에 갈 시간이 없었네요. 조만간 병원 가서 진료받고 괜찮다면 풀 생각이었습니다.”

    거짓말.

    점심시간에 다녀와도 될 병원이다. 마음만 먹으면 점심시간이 아니라 업무 시간에 자리를 비워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위치였다. 틈틈이 이른 퇴근을 시도하기도 했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침대에서 뒹구느라 몇 차례나 결근한 전적도 있었다.

    그런데 깁스를 풀기 위해 병원에 갈 시간이 없었다고?

    “저 다음 주에 한 달 끝나요. 주말 지나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냥 지금 말하겠습니다.”

    “…….”

    “저는 솔직히 제 필요성을 모르겠어요.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놀면서 돈 받으면 좋지 않으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공으로 받으면 탈 나는 팔자라 솔직히 불편합니다. 제가…… 실장님께 도움이 되긴 하나요?”

    내 질문에 이환은 답이 없었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듯 미간을 문지르던 이환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해민 씨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진짜 팔이 나았다는 말인가. 이제껏 아무 필요도 없이 깁스를 하고 있었다고, 사실 내 도움은 아무 쓸모도 없는 헛것이었다고.

    “해민 씨와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

    “해민 씨가 내 옆에 있기를 바랐어요.”

    “저는요.”

    “내 말 먼저 들어요.”

    조금은 강압적이지만, 그 강제적인 말속에 녹아 있는 부탁과 애원이 전해졌다. 조금 전 이정이 나를 차에 태울 때 권유를 가장하던 강요와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해민 씨를 곁에 두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전하고 싶어요. 좋은 걸 먹이고, 좋은 걸 입히고, 좋은 곳에서 재우고 싶고.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습니다. 해민 씨를 곁에 두고 계속 보고 싶고,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팔자 좋은 사랑 놀음에 장단을 맞춰 주기에는, 우린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이환은 달콤한 꿈속에, 나는 지독한 현실 밑바닥에 존재했다. 우리는 보고 있는 방향이 달랐고, 걷고 있는 길 또한 달랐다.

    “하지만 해민 씨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있고, 당장 돈이 필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내가 돈을 그냥 주거나 빌려준다고 한들 해민 씨가 받지 않을 것도 알고요.”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이환이 천천히 손에 두르고 있던 깁스를 풀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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