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55)화 (55/172)
  • 55화

    엄마에 대한 원망은 크지만, 그렇다고 치매 환자를 모르는 곳에 버리고 오거나 빈집에 가둬 둘 수는 없었다.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식을 버리고 떠나는 아빠, 자식을 때리는 엄마. 정상적이지 못한 부모를 보며 내가 비록 훌륭한 사람은 되지 못할지언정 사람의 기본은 지켜야 한다는, 조금은 강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같이 있고 싶지 않다. 엄마를 보고 싶지 않다. 엄마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적어도 나는 엄마를 버리지 않았고 그녀를 방치하지도 않았다. 몸을 혹사해 번 돈으로 차마 그녀를 기꺼워하지 못하는 마음을 대신하고 있었다.

    남들은 나를 보며 효자라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힘들지 않냐고. 도움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고 나를 멍청하다고 손가락질하며 동정했다.

    그들은 모른다.

    나는 효자도 아니고, 정에 이끌려 내 삶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나는 사람다운 삶을 위해 아득바득 살아가고 있었다. 병원에 있는 엄마는 그 증거였다. ……하루하루 그녀가 죽기를 기다리는 내게 아직 사람으로서의 기본이 남아 있노라고 확인시켜 주는 증거.

    빵-.

    생각에 빠져 하염없이 걷다가 옆에서 들리는 클랙슨 소리에 파드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어딘지도 모르는 거리에 덩그러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표로 한 버스 정거장을 한참 지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해민 씨?”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와중에 이름이 불리었다. 고개를 틀어 옆을 보자, 새까만 세단의 뒷좌석 창문이 내려가며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날카로운 눈매가 둥글게 휘어지며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안녕하세요.”

    차에 대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 가는 길이에요?”

    “회사요.”

    “음, 그렇겠지. 질문을 잘못했네. 어디 다녀오는 길이에요?”

    “저기…… 운전면허증 발급받으러 갔다 오는 길입니다.”

    저어기, 손으로 가리키려는 건물이 보이지 않아서 허공을 짚은 손가락이 민망해졌다. 하하, 웃음소리와 함께 달칵 뒷문이 열렸다.

    “태워다 줄 테니까 타요.”

    “아, 괜찮습니다.”

    “걸어서 갈 생각이었나? 버스 정거장도 지나치고, 너무 열심히 걷던데. 그러지 말고 타요.”

    웃으며 건네는 권유 속에는 보이지 않는 강요가 깔려 있었다. 힐끔 눈치를 보다가 어쩔 수 없이 뒷좌석에 올라탔다.

    “전화는 왜 안 받아요?”

    “네?”

    이정이 언제 전화를 했던가를 떠올리는데 그가 내 바지 주머니를 툭 건드렸다.

    “전화, 계속 오는데.”

    “아…….”

    “전화부터 받아요. 누군지 알 것 같지만.”

    잠시 얼을 빼놓고 있던 탓에 알아차리지 못한 미세한 진동음을 잘도 알아차렸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액정 위에 이환의 이름이 보였다.

    “여보세요.”

    ―해민 씨? 무슨 일 있습니까? 아까 해민 씨 순서라고 전화 끊은 뒤로 소식이 없어서요.

    “아, 이제 발급받고 나오는 길입니다.”

    ―다른 일이 생긴 건 아니고요?

    반사적으로 이정을 돌아보았다. 옆에서 흘러나오는 통화 소리를 듣고 있던 그가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며 생글생글 웃었다.

    “……네.”

    ―그럼 이제 오는 겁니까?

    “네.”

    ―그래요. 차 조심하고,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요.

    “네.”

    여전히 용건도 없이 전화를 걸고 내가 멀쩡함을 확인한 뒤에 끊는 이환이다. 떨어져 있으면 오 분에 한 번씩 전화를 하고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하는 터라, 부재중 전화 56통의 지옥을 겪지 않으려면 한 번에 전화를 받아 무탈함을 확인시켜 주는 편이 신상에 좋다.

    “우리 환이가 해민 씨를 엄청 걱정하네요.”

    “……감사한…… 일이죠.”

    “운전면허는 언제 땄어요?”

    “어제 합격했습니다.”

    “얼마나 준비했는데?”

    “필기 합격하고 일주일 학원 다녔습니다.”

    “오, 능력자였네.”

    질문을 하고 대답에 호응해 주긴 하지만 딱히 관심이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다분히 예의상 주고받는 인사말 같은 대화는 조금 갑갑하고 껄끄러웠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응? 해민 씨가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굳이 제가 혼자 있을 때 찾아오셔서요.”

    “우연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우연은 무슨.

    GS그룹의 부회장님 정도 되면 공사다망하실 텐데, 그런 분이 하필이면 이 시간 이 타이밍에 면허 시험장 근처에 왔다가 길에서 방황하는 나를 발견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마도 0퍼센트가 확실하지 않을까.

    “버스 정거장 지나 계속 걷고 있었던 걸 지켜보고 계셨으니까요.”

    “우연히 발견해서 아는 척하려고 기다렸을 가능성은?”

    “그럴 가능성을 생각 못 했네요. 죄송합니다.”

    부회장님이 콩을 팥이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팥이겠지. 더러운 계급 사회와 빈부 격차를 욕하면서도 겉으로는 순순히 순응하자 이정이 하하, 하고 꾸며 낸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해민 씨는 참 재미있네. 말하고 표정이 너무 달라. 입으로는 ‘네, 네’ 하는데, 얼굴은 ‘아, 저 새끼 뭐지, 한 대 칠까’ 이런 표정이거든.”

    사람 표정에 대해 많이 공부하셨나 보다. 너무나도 정확하게 속내를 파악해서 놀라웠기에 대단하시다며 대충 감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만히 보면 ‘네, 네’ 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죄송합니다.”

    “사과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고. 일하는 건 어때요. 거의 한 달 되어 가지 않나.”

    문에 팔을 기대고 턱을 걸친 이정이 나를 보며 물었다.

    “실장님께서 많이 배려해 주신 덕분에 편히 일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주말 지나면 곧 한 달이 됩니다.”

    언제 한 달이 지날까 싶었는데, 어느새 한 달이 다가와 있었다. 일하기 시작한 게 팔월 초. 어느덧 구월. 조금만 더 지나면 여름이 끝나고, 또 조금 더 지나면 금방 겨울이 되겠지.

    “계속 일할 생각이에요?”

    한 달간 꿀 빨았으니까 들러붙지 말고 알아서 나가라는 말을 하려고 온 거였나. 혹시라도 내가 이환에게 들러붙을 기미가 보인다면 적절한 경고를 하기 위해서?

    그런 이유로 SG 그룹 부회장님이 직접 행차하셨다면 너무 과한 걸음이었다.

    “조언을 해 주실 생각이신가요.”

    “나는 해민 씨 그런 점이 참 좋아.”

    “…….”

    “어렸을 때부터 사회생활을 해서 그런가. 그 나이대의 애들이랑은 다르게 차분하고 눈치 볼 줄을 알거든. 우리 집을 봐요. 해민 씨랑 나이도 비슷한 애새끼들이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 하고 일단 싸지르고 본다니까. 환경의 차이인가.”

    깔끔하게 손질된 손톱을 괜스레 만지작거리다 후 입김을 분 이정이 생긋 웃었다.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 하고 싸지르는 저 집 애새끼들은 아마도 이복동생들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정의 말처럼 환경의 차이일 거다. SG 그룹 회장님의 자식들로 태어나 자라 온 환경에서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해민 씨 생각이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조언은 무슨.”

    “차후 고용 연장에 대해서는 실장님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돈 주는 사람 의견도 중요하지만, 받는 사람 의견도 중요하지. 아무리 돈을 퍼 준다고 해도 일하기 싫다고 하면 뭐 어쩌겠어. 안 그래?”

    기어코 일을 더 할 건지 말 건지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뜻일까. 돈 주는 사람은 이환인데 대체 왜 이정이 쫓아와서 난리인지.

    불쑥 짜증이 났다.

    “실장님께서 이후로도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상호 협의하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업무 범위를 조율할 생각은 있습니다.”

    “놀면서 돈 받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나 봐? 우리 직원들이 딱 해민 씨 같으면 참 좋겠는데. 요즘은 놀면서 남의 돈 받아 가려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이정은 표정만 보고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쏟아지는 말속에서 아주 작은 단서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는 눈치가 빠른 게 분명했다.

    하는 일 없이 놀면서 월급을 받는 내 생활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이정에게 신기가 있는 게 아니라면, 사람을 붙였든 수소문을 했든 간에 이쪽의 상황에 대해 전해 들었다는 뜻인데. 이정이 주시하고 있는 건 이환일까, 나일까.

    「형이 내게 관심이 많아요.」

    처음 이정을 마주한 날. 이환이 양해를 구하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릴 때 형에게 많이 의지했거든요. 그래서인지 아직도 어린애처럼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곁에 사람을 두었다니 해민 씨가 궁금해서 와 봤을 겁니다.」

    이정은 이환에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그의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들까지도 하나하나 조사해 볼 정도로. 이환이 나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말을 전하지는 않았을 터, 이정이 알고 있는 내 과거 행적과 현재의 상황은 분명 뒷조사의 결과일 터이다.

    “생각이 많은가 봐. 표정이 복잡하네.”

    “부회장님의 생각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시면, 제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 내가 무슨 생각이 있겠어. 돈 주는 사람은 우리 환이고, 돈 받는 사람은 해민 씨인데.”

    분명 생각하는 것이 있을 텐데도, 속내를 감추고 웃기만 하는 남자의 표정은 의뭉스러웠다. 거기에 더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말투로 비비 꼬아 말을 하니 더 기분이 나빴다.

    개새끼.

    세상이 제 발아래에 있다는 듯 사람 반응을 보며 가지고 노는 나쁜 새끼.

    “해민 씨, 혹시 속으로 나 욕하고 있나.”

    “그럴 리가요.”

    “또 입이랑 표정이 따로 노는데.”

    속마음을 감추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얼굴에 자유를 주었다. 이정의 말마따나 돈 주는 사람은 이환인데 자기가 뭐 어쩔 거야. 겨우 이런 거로 사람을 산에 묻기라도 할 거야, 바다에 던지기라도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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