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52)화 (52/172)
  • 52화

    가만히 이환의 눈치를 살폈으나, 다행히 타박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난 감정적이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나이에 비해 이성적인 해민 씨를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네요.”

    이환이 감정적이라는 말에는 동감한다.

    그는 과하게 감수성이 풍부했고, 그걸 거리낌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가끔은 나조차도 휩쓸려 버릴 만큼 솔직하고 열정적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호감을 드러내 보이길 주저하지 않았고, 돌려받으려는 기대조차 없이 그 마음을 오롯이 쏟아붓기도 했다.

    “실장님은…… 지금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감탄스러워요.”

    여러모로, 여러 의미로.

    “해민 씨는 넘칠 정도로 감탄스럽고요.”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던 이환은 잠시 주저했다. 침대 위에서 수작이라도 부리려나 싶었는데, 한참 동안 머뭇거리던 그는 붙잡고 있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업무를 어느 정도 처리했는지에 대한 답은 결국 듣지 못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10

    안전벨트를 매고 있는데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긴장감도 들긴 했으나, 지금의 진동은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에서 발생되고 있었다.

    “잠시만요.”

    힐끔 확인을 하자 ‘이환 실장님’이라고 저장해 둔 이름이 떠 있었다. 평소였다면 무슨 일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바로 전화를 받았겠지만, 지금은 운전 연습 중이었다. 심지어 지금 막 운전석에 올라타서 안전벨트를 맸지. 강사에게 사과하며 휴대폰을 무음으로 전환하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환의 전화가 아니다. 난생처음으로 운전석에 앉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발판을 밟으면 차가 움직이고 멈추고 하는 건 알지만, 어떤 것을 밟아야 하는지는 학과 시험을 준비할 때에도 나오지 않았었다. 차의 기능부터 하나하나 설명을 해 주고 난 뒤에 운전을 배울 거라 예상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를 바로 운전석에 앉힐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옆에 앉아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자, 자. 긴장 풀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강사가 믿고 맡기라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강사님을 믿고 맡기기엔 운전대를 제가 잡고 있습니다만.

    핸들을 잡은 손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교육 시간을 보냈다. 강사님은 오랜 경력과 노하우로, 차에 대한 기초 지식이 전무한 무지렁이조차 운전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과연 베테랑 강사님!

    돈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셨다. 자신을 믿으라는 호언장담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니었는지, 중간에 두어 번 시동을 꺼트리고 급브레이크를 네다섯 번 정도 밟은 것을 제외하면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그 유능한 강사님과 헤어지면 운전 능력도 사라진다는 게 문제였다. 운전석에서 내린 즉시 액셀이 왼쪽이었는지 브레이크가 왼쪽이었는지조차 기억이 희미했다.

    내가 뭘 한 거지.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다. 혹은 짧은 꿈을 꾼 기분이다.

    멍한 정신으로 차에서 내린 나는 난생처음으로 차를, 심지어 트럭을 운전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탄했다.

    이렇게 교육받아서 일주일 뒤에 면허를 딸 수 있다고?

    정해진 코스를 서너 시간 연습해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겨도 좋은가. 이런 실력의 운전자를 과연 도로에 풀어놓아도 되는가.

    대한민국의 교통안전이 진지하게 걱정이 되었다. 이런 내가 운전면허를 따서 운전을 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내가 아니라도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운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끔찍했다.

    식은땀으로 흥건해진 손을 바지춤에 문지르다 손끝에 걸리는 휴대폰을 꺼냈다. 수업을 받느라 이환의 전화를 받지 못한 것이 떠올라 액정을 켜자, 한 시간 사이에 온 메시지 삼십여 개와 부재중 전화 56통이 나를 반겼다.

    뭐지? 왜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급하게 이환에게 전화를 걸자, 신호가 가기 무섭게 통화가 연결되었다.

    ―해민 씨?

    “네, 실장님. 부재중 전화가 많이 와 있어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해민 씨는 무슨 일 없습니까? 연락이 되지 않아서 걱정했어요.

    긴장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묻자 생뚱맞은 답변이 돌아왔다.

    “……저 운전면허 학원 왔잖아요.”

    몰래 온 것도 아니고, 같이 있다가 사무실 나올 때 인사까지 하고 왔잖아.

    ―네, 그렇게 알고 있는데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정신이 잠시 방황했다.

    운전을 배우러 학원에 왔으니 전화 통화가 안 된 거라는 내 말과 운전을 배우러 학원에 갔는데 전화 통화가 안 된다는 이환의 발언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걸까.

    몇 글자 차이로 생긴 간극이 생각 이상으로 커서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럼…… 별다른 일은 없으시고요?”

    ―해민 씨와 연락이 닿지 않는 게 제일 별일이었습니다.

    “……부재중 전화 56통은 그럼…….”

    ―전화를 안 받아서 걱정되다 보니.

    “…….”

    그러셨구나. 걱정이 되셨구나. 그래서 안 받는데도 불구하고 56통이나 계속 거셨구나.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이환의 집요한 면을 보게 된 기분이다. 이 정도면 정상은 아니지 않나 싶은 불경한 생각도 들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운전 연습은 언제 합니까? 지금은 쉬는 시간인가요?

    “아뇨. 지금 수업 다 끝났어요. 운전 연습 중이라서 전화 못 받은 거예요.”

    ―그렇군요. 하필 시간이 맞물렸던 모양입니다. 제가 조금 더 일찍 전화를 걸어 볼 걸 그랬네요.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사무실 나오기 전에 외출 용건을 말하고 나왔다니까요. 못 들으신 거 아니잖아요. 잘 다녀오라고 대답도 했고, 운전기사까지 붙여서 학원에 태워 보내셨잖아요.

    ―학원에 잘 도착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가다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잖아요. 옆에 없으니 걱정만 늘어나네요.

    아니, 운전기사님까지 붙여서 보냈으면서 무슨 사고를 걱정하고 있어.

    별걸 다 걱정한다 싶은 마음과 함께 앞으로 일주일은 운전 학원에 와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일주일 동안은 학원에 도착하자마자 보고 전화를 드려야겠다. 부재중 전화 56통의 기록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 ∞ ∞

    “도와 드릴까요?”

    “아니. 탕만 끓으면 될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요.”

    냄비 뚜껑을 열어 제대로 끓고 있는지를 확인한 여사님이 바쁘게 밑반찬을 옮겨 담았다.

    “반찬은 제가 옮길게요.”

    “그냥 둬요. 힘들게 일하고 온 사람이 뭘 또 한다고.”

    힘들게 일하고 오지 않아서 민망하다. 이런 거라도 해야지 밥 얻어먹기가 민망하지 않을 듯해 반찬 그릇을 쟁반에 담아 식당 테이블로 옮겼다.

    “운전 배우는 건 어때요. 재미있어?”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응? 왜? 선생님이 잘 못 가르치나?”

    “아뇨. 잘 가르쳐 주시긴 하는데, 배울 때뿐이라서요. 수업 시간 끝나면 그냥 멍해요. 내가 뭘 어떻게 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고. 강사님 옆자리에 태우고 운전석 앉으면 기계적으로 코스 따라서 운전하고, 그 시간 끝나면 다시 멍. 이런 식이면 운전면허를 따도 운전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어요.”

    “기술이라는 게 다 그렇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거잖아요. 일단 면허부터 따고 나중에 연수받으면 돼요. 어차피 지금은 수동 트럭으로 시험 준비해서 승용차는 몰지도 못해.”

    “그러게요. 웬만하면 1종 보통 따라고 해서 신청하긴 했는데, 괜히 그랬나 싶어요. 제가 승합차나 화물차를 몰 일이 있을까 싶고, 그렇게 따지면 승용차 몰 일도 없을 텐데 싶기도 하고. 나중에 대리 운전이라도 하려면 어떤 차가 호출할지 모르니 안전하게 1종 보통을 따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여사님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포인트에서 당황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표정은 빠르게 갈무리되어 잘못 보았던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팍팍 끓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다.”

    젖은 손을 닦으며 의자에 앉던 여사님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벌레 물렸어요? 아까부터 자꾸 긁네.”

    “아, 벌레는 아니고요. 그냥 좀 간지러워서요.”

    “봐 봐요. 계속 긁는 거 보니 알러지 같은데?”

    심하게 긁지는 않았는데. 티셔츠의 목을 잡아 살짝 내려서 손으로 긁던 부위를 보여 주었다.

    “아이고, 빨갛네. 언제부터 이랬어요? 낮에 뭐 잘못 먹은 거 아냐?”

    “잘 모르겠어요.”

    다가온 여사님이 빨간 피부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건 빨리 병원에 가 봐야지.”

    “이게 병원 갈 정도나 되나요. 냅 두면 나을 텐데.”

    “원인을 모르고 방치하면 계속 번진다니까.”

    어디까지 벌겋게 올라왔는지 좀 보겠다고 내게 양해를 구한 여사님이 티셔츠의 목을 쭉 잡아 늘였다.

    “이거…… 녹슬었잖아. 이렇게 녹슨 걸 하고 다니니 피부에 탈이 나지.”

    목을 빙 둘러 살펴보던 여사님이 손가락에 걸리는 줄을 당겨 올렸다. 잘 때도, 샤워할 때도 걸고 있었던 목걸이는 어느새 도금이 벗겨져 녹이 슬어 있었다. 은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쇠줄에 도색을 했던 모양이다.

    “쇳독이네, 쇳독.”

    “쇳독……이요?”

    “언제부터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얼른 빼.”

    돌아가신 사모님의 유품을 이환이 건네준 것이라고 말하기가 껄끄러워 망설이자, 여사님이 직접 손을 움직여 목걸이를 풀었다.

    “이걸 걸고 다닐 생각을 한 게 용하네.”

    이 정도로 녹이 슬 때까지 착용하고 있었냐고 여사님이 타박을 했다.

    “그거…… 돌아가신 사모님 유품이라고…….”

    “응?”

    “돌아가신 실장님 어머니께서 실장님한테 주신 소중한 물건이라고…….”

    그걸 왜 내가 가지고 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정체가 그러하다고 작게 고백했다.

    “이게…… 우리 아가씨, 아니, 사모님 유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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