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51)화 (51/172)
  • 51화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개를 끄덕여 확인시켜 주었다. 생각처럼 바뀌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이환의 허리는 바쁘게 움직였고, 그의 성기는 조이지도 못하는 구멍을 좋다고 쑤셔 댔다.

    “확실히, 해민 씨 향이 옅어졌습니다.”

    목덜미에 코를 묻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단내도 나쁘지는 않네요.”

    그 연한 향만으로도 충분히 흥분이 된다고, 목덜미와 귓불에 잔뜩 침칠을 하고 잘근거리며 이환이 속도를 높였다. 거의 한 시간을 혼자 바쁘게 운동하던 그는 이윽고 구멍 안이 질척거릴 정도의 정액을 쏟아 내고 나서야 떨어져 나갔다.

    “앗.”

    마지막까지 사수하던 가운을 벗겨 흐르는 정액을 닦아 주는 행동에 고마움보다 안타까움이 커졌다.

    “이렇게 체력이 약해서 어떻게 합니까.”

    몸을 모로 세워 창밖을 바라보는 자세로 나란히 누운 이환이 흐물거리는 내 몸뚱이를 만지작대며 핀잔하듯 말했다. 고장 난 인형처럼 축 늘어진 몸 위를 누비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실장님은…… 너무 과하신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네.”

    “이게 평균은 아니고요?”

    “…….”

    비교할 대상이 없어서 진짜 과한지 아니면 평균인지, 확실히 답하기가 어려웠다.

    “제 기준으로는 과하신 것 같은데…….”

    “그럼 해민 씨 기준으로 평균은 어느 정도인데요?”

    “……하루에 한 번?”

    자신감 없는 대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등 뒤에서 들썩이는 가슴이 느껴졌다.

    “하루에 한 번이라. 하루에 한 번씩 못 했던 거 저축해 뒀다가 한 번에 쓴 거라고 치면, 얼추 맞긴 하네요.”

    어, 그러니까 어제오늘 한 회수를 생각해 보면 저번 히트 사이클 이후로의 날짜와…… 전혀 안 비슷한데요? 배는 많은데요. 아니, 거의 세 배는 많은 것 같은데.

    그보다 그런 식으로의 계산이 합당한가에 대해서 판단이 내려지지 않았다.

    “해민 씨가 정 힘들다고 하면, 하루에 한 번씩 할까요?”

    히트 사이클이나 러트 사이클이 아닐 때에도, 이런 약물 사고가 일어나지 않아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에서, 매일 이렇……게?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보며 이환이 어깨에 입술을 눌러 문질렀다.

    “선 긋지 않기로 한 거, 잊지 않았죠?”

    “네.”

    “그걸로 충분합니다.”

    목과 어깨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입술을 이동시킨 이환은 귀밑의 움푹 팬 곳에 따뜻한 숨을 불어 넣었다.

    “앞으로 나는 열심히 해민 씨를 유혹하고 낚을 겁니다.”

    “낚아요?”

    “네. 해민 씨가 낚여 주면 좋고, 아니라면 농담으로 넘어갈 겁니다.”

    “……왜요?”

    “해민 씨와의 관계가 더 발전되기를 원하지만, 겁먹고 뒤로 물러나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왜 발전되기를 원하냐고, 어떻게 발전되기를 원하냐고. 많은 질문이 생겨났으나, 그것을 묻는 대신 가슴에 묻어 두었다. 몸을 감싸고 있는 이환의 체온이, 나직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평온하고 기분 좋은 탓이었다.

    “어리고 겁 많은 내 요정님.”

    이환의 가슴에 몸을 기대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해민 씨의 일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 ∞ ∞

    여사님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와 완전히 퍼져 버렸다. 호텔에서도 그렇고, 호텔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을 겪은 탓이다.

    일단 룸에서 완전히 나오기 전에 중문 반대편의 공간을 구경했다. 그곳에는 마치 집의 거실처럼 소파와 테이블이 자리한 응접실이 있었고, 길쭉한 식탁이 놓인 식사 공간과 개인 집무실까지 존재했다.

    룸의 입구를 기준으로 왼쪽은 잠을 자는 공간, 오른쪽은 업무 공간으로 나뉜 듯했다. 그리고 입구의 정면 통로로 이어진 공간에는 작은 침실이 하나 달려 있었는데, 백윤경이 그곳에서 비척비척 걸어 나와 깜짝 놀랐다.

    근처에 있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아무리 중문으로 막혀 있었다고는 해도 밤새, 그리고 지금까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더 조심했을 텐데.

    백윤경을 속였다는 죄책감과 얄팍한 거짓말이 들통났으리라는 생각에 시무룩해져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는 식사가 맛있는지 맛없는지도 느끼지 못하고 나오는 음식을 그저 꾸역꾸역 삼켰다.

    그렇게 체크아웃을 한 뒤에는 병원에 가서 이환이 새로 깁스를 했고, 의사에게 아무리 알파라지만 자꾸 깁스를 벗어 던지면 나중에 뼈가 시큰거려 고생한다는 경고도 들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모두 침대에서 뒹굴다가 깁스를 빼 버렸기에 내게도 절반의 책임이 있음을 느끼고 남몰래 반성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사님이 너무 해맑게 반겨 주셔서 또 죄책감이 들었지. 괜히 행사에 끌려가 고생하고 왔다며 토닥이는 손길을 받노라니, 행사에 참여한 시간은 한 시간도 되지 않고 이제껏 이환과 침대에서 뒹굴다 왔다는 말을 꺼낼 수 없어서 양심이 아팠다.

    저녁 먹을 때까지는 휴식이라는 말에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널브러졌다. 진이 빠진 몸은 축 늘어지는데,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뜨고 조금이라도 더 편한 자세를 찾아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는데, 밖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네.”

    “해민 씨. 잠깐 들어가겠습니다.”

    “실장님?”

    백윤경이 돌아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업무를 전산으로 보내 두었다는 말을 남겼다. 옛날처럼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일 처리가 간편화되었을 뿐이지 일이 줄어들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서재에서 어제오늘 처리하지 못한 업무를 보고 있어야 할 사람이 내 방에는 무슨 일일까. 심부름이라도 시키려고 그러나.

    의아함을 품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혹시 내가 잠을 깨웠습니까?”

    “아뇨. 잠이 안 와서 그냥 누워 있었어요.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피곤한 해민 씨에게 일을 시키면 내가 나쁜 놈이죠.”

    그리 말하며 다가온 이환이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해민 씨에게 이걸 주고 싶었습니다. 한동안 잊고 있어서 어디에 뒀는지 한참 고민했어요.”

    이환이 주먹 쥔 손을 펼쳤다. 내내 쥐고 있던 무언가가 아래로 쑥 떨어지다가 줄에 걸려 대롱대롱 흔들렸다.

    뭔가 싶어 바라보니 하나의 펜던트에 두 개의 줄이 달린 목걸이였다. 봉긋한 꼭대기에 줄이 연결된 하트 모양의 목걸이는 이환이 가지고 있었다기엔 뭐랄까, 조금 싼 티가 났다.

    “절…… 주신다고요?”

    귀금속을 가지고 있다면 금밖에 없을 것 같은 이미지의 이환이었기에 은 목걸이는 조금 의외였다.

    싸구려라서 주는 건가.

    무심코 든 생각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도 전부 입어 보지 못했을 정도의 일상복을 사 주고, 언제 입을 일이 있을까 싶은 정장도 몇 벌이나 사 준 사람이다. 외식을 할 때는 눈 돌아가게 비싸고 맛있는 곳으로 데려가 밥을 사 먹였고,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백만 원이 넘어가는 노트북을 선뜻 사 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굳이 싸구려 목걸이를 줄 이유가 없지 않나.

    “양쪽을 잡고 돌리면 이렇게.”

    하트가 반쪽으로 나뉘어 돌아가자 양쪽 끝이 둥근 기둥 모양이 되었다. 그걸 힘주어 당기니 반쪽 하트 모양의 목걸이 두 개로 나뉘었다.

    저게 진짜 싸구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유행이 한물간, 요즘에는 보기 어려운 스타일의 목걸이임은 틀림없었다.

    “어머니의 목걸이입니다.”

    “아, 돌아가신 사모님이요?”

    “네. 어머니가 아끼시던 아주 소중한 목걸이라고, 잘 간직하고 있다가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주라고…….”

    ‘사랑하는’부터 점차 목소리가 작아져 거의 웅얼거리다시피 말을 한 이환이 붉어진 뺨을 감추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이걸 줄 사람이 평생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의 유품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걸 저한테…….”

    “내게 많은 의미가 담긴 물건인 만큼, 해민 씨가 받아 줬으면 좋겠네요.”

    “돌아가신 사모님께서 남기신 건데, 진짜 저한테…… 주시겠다고요?”

    “내 요정님보다 소중한 누군가가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되지가 않아서요.”

    제가 말하고서 감격한 사람처럼 손등으로 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말을 잇지 못하는 이환을 보며 가만히 침묵했다.

    “하나씩 걸고 다녀요.”

    “아, 네.”

    취향과 삼천 광년 정도 떨어진 스타일의 목걸이였지만, 걸고 다니라고 하니 걸고 다녀야지.

    감동에 젖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환의 손에서 목걸이 하나를 가져와 목에 걸었다.

    차가운 금속 체인이 목에 닿으며 드는 선뜩한 느낌을 모른 척하며, 착용한 모습을 확인받듯 이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며 성은을 입은 사람처럼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는 분명 멀쩡한, 아니, 누구보다도 듬직하고 진중하며 어른스러운 남자인데. 가끔 이렇게 동심과 감수성이 과한 모습을 마주하면 조금 떨떠름하고 또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나도, 하겠습니다.”

    무언가 성스러운 의식을 행하듯, 그는 진지한 얼굴로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게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반쪽 하트 목걸이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항상 하고 있어요. 잘 때도, 씻을 때도.”

    그렇게 의미가 깊은 목걸이라면 조금 더 소중히 대해 줘도 좋을 텐데. 씻을 때까지 걸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사소한 걱정은 마음속에 묻어 두었다. 이환이 좋아하고 만족해하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게 느껴졌다.

    “백 비서님이 말씀하셨던 일을 다 끝내셨어요?”

    겸사겸사 업무는 다 끝내 두었냐고 묻자, 이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해민 씨는 참 이성적이네요.”

    “네?”

    “나는 해민 씨 얼굴만 봐도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데.”

    넌 이 상황에서 일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돌려 멕이는 건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