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49)화 (49/172)
  • 49화

    “룸서비스 시킨 거 아니에요?”

    “백윤경한테 시켰습니다.”

    자잘한 것까지 알아서 잘 챙기니 귀찮은 일은 백윤경에게 시키는 게 편하다고. 백윤경이 들었으면 눈 뒤집고 달려들 이야기를 이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어쩐지, 휴대폰 너머 백윤경이 큰소리를 내더라니.

    “룸서비스로 시켜도 될 일을. 백 비서님도 바쁘신 모양이던데요. 그래서 백 비서님이 뭐라고 하신 거 아녜요?”

    “음식 종류가 많으니 테이블로 나와 먹으라고 잔소리를 해서요.”

    굳이 침실에서 먹을 이유가 있을까 싶었으나, 휴대폰을 대충 던져 놓고 내 등에 쪽쪽 입을 맞추는 이환 때문에 의문이 사그라들었다.

    “화는 좀 풀렸습니까?”

    “화난 거 아닙니다. 그냥…… 좀 짜증 난 거예요.”

    화가 난 것과 짜증이 난 것은 엄연히 다르다. 단호한 내 주장에 이환이 웃음을 삼키며 짐짓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렇죠. 그래서 짜증은 풀렸어요? 해민 씨 짜증 내는 모습은 처음이라 놀랐습니다. 하마터면 무릎 꿇을 뻔했어요.”

    이환의 허풍에 픽 웃음이 나왔다.

    “고용주님이 왜 무릎을 꿇어요.”

    “침대에서 옷 벗고 뒹구는 건 해민 씨 업무가 아니니, 지금은 나도 고용주가 아닙니다. 업무라고 생각하고 구멍 대 준 겁니까?”

    왜인지 살짝 날카롭게 느껴지는 질문에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환은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상태로 잠시 말이 없었다. 나 역시 덩달아 침묵했으나 이상하게도 잔잔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어색하기보다 안온하게 느껴졌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처음에는 위험했는데, 지금은 어중간한 상태입니다.”

    “어중간이요?”

    “정신은 선명해졌는데 자지가 안 죽어서 일상생활이 상반신만 가능한 상태라고 할까요.”

    저 단어를 아직도 입에 올리는 걸로 보아 정신도 아직 덜 멀쩡해진 듯했다.

    “빨리 괜찮아지셔야 내일 출근하실 텐데요.”

    “약 기운이 다 빠져야 하니 못해도 내일 저녁까지는 여기 있어야 할 듯싶습니다.”

    “…….”

    왠지 멀쩡한 것 같은데?

    의심의 눈초리로 뒤를 돌아보려던 시도는 허리를 움직이는 이환의 행동에 저지되었다.

    “흐읏, 실장님?”

    “식사는 곧 준비될 겁니다.”

    그 전에 쑤셔 넣은 건 싸야 하지 않겠냐고 뻔뻔하게 말하며 이환은 내가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허리를 움직였다. 조금씩 식어 가던 몸에 다시 불이 붙었다.

    진짜 멀쩡한 것 같은데?

    쾌감으로 차오르는 머릿속에 의심이 확신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 ∞ ∞

    이환의 계획대로 시원하게 한 발씩 싸고, 침실 앞에 놓인 트롤리를 끌고 와서 식사를 했다. 음식은 줄줄이 대기 중인데 허벅지 위에 올려 둔 트레이의 공간 부족으로 이환의 허벅지까지 빌려야 했다.

    빵빵하게 배를 채우고 나니 만사가 귀찮아졌다. 앞으로는 내보내느라 바빴고 뒤로는 받아먹느라 바빴던 아랫도리 사정으로 진이 빠져 한숨 자고 싶은데, 몸은 찝찝하고 침대는 축축했다. 덤으로 이환의 눈치도 보였다.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던 이환이 작게 하품하는 나를 보고 웃었다.

    “피곤해요?”

    “…….”

    침묵 속에 담긴 긍정을 알아차린 그가 땀으로 절은 내 머리를 손으로 쓱쓱 쓰다듬었다.

    “씻고 잠깐 눈 좀 붙일까요?”

    “침대가 젖었어요.”

    “괜찮습니다.”

    아까 보니까 반대쪽에도 문이 있던데, 혹시 거기에도 방이 있나.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였다.

    “턴다운 요청하면 됩니다. 욕조에 몸 담그고 나오면 적당하겠네요.”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바쁘게 적은 이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턴다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환의 손을 잡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옷부터 입고…….”

    방을 나가려면 옷을 입어야 하는데, 그 옷이 아까 단추가 죄다 날아가서 정액 닦는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뒤늦게 떠올렸다.

    “바로 옆이 욕실이니 괜찮습니다.”

    내 와이셔츠는 안 괜찮은데. 하루 입고 사망해 버린 와이셔츠 생각에 시무룩해졌다.

    이환을 따라 터덜터덜 욕실로 들어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유리창 밖 풍경에 감탄과 동시에 놀라며 손으로 가랑이를 가렸다. 호텔의 최상층인데다 마주하는 건물 하나 없이 뻥 뚫려 있어 누군가 들여다볼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탁 트인 풍경을 마주하고 알몸을 드러내는 데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뷰가 나쁘지 않네요.”

    시원하고 당당한 알몸으로 전면 유리창에 바짝 다가간 이환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야경이지만, 밝을 때 보면 또 다른 느낌일 겁니다.”

    이리 와서 구경하라며 이환이 손을 뻗었다.

    나체로 나란히 서서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리 아름답지 않으리라 생각되었지만,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 슬금슬금 이환에게로 다가갔다.

    “저거, 한강인가요?”

    “네.”

    “다리가 엄청 반짝거려요.”

    어두운 밤하늘, 별이 쏟아진 듯 땅에서 빛나는 불빛, 조명으로 형태를 유지한 한강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밤거리는 이제껏 보지 못한 색다른 모습이었다.

    “고소 공포증은 없나 봅니다?”

    유리창에 기대듯이 달라붙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자, 욕조에 물을 채우며 이환이 물었다.

    “네. 덕분에 공사장에서 일할 때도 무섭지는 않았어요.”

    공사장은 난간 없는 고층에서 작업할 때가 왕왕 있기 때문에 몸을 제어하지 못하면 위험도가 높아진다.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지언정 고소 공포증으로 몸을 떠는 일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했던 적도 있었다.

    “해민 씨.”

    “네?”

    “그만 구경하고 들어와요.”

    어딜 들어오라는 건가 싶어 돌아보자, 무엇을 집어넣었는지 몽글몽글한 거품이 한가득 올라온 욕조에 들어가 서 있는 이환이 보였다.

    “이리 와요.”

    “음, 거길…… 실장님하고 같이요?”

    “네.”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양 돌아온 대답에 순간 ‘너무 당연한 것을 물었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 그래도 같이, 어떻게…….”

    “같이 씹질도 해 놓고 왜 목욕은 안 됩니까.”

    저급한 표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 사람은 아직 정상이 아니야, 약 기운이 빠지지 않은 거야.

    속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다가, 저속한 표현을 쓴 건 이환인데 어째서 내가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빨리 와요.”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다가가면서도 정말 저 욕조에 이환과 함께 들어가야 할까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내민 손을 붙잡고 살며시 발끝을 거품 안으로 집어넣었을 때, 발가락 끝을 휘감는 뜨듯한 물에 나도 모르게 욕조 안으로 냉큼 들어섰다.

    “미끄러지지 않게 천천히 앉아요.”

    욕조의 가운데에 나를 앉힌 이환이 벽 쪽으로 등을 기대고 앉아 나를 끌어당겼다. 가슴 부근에서 찰랑거리는 뜨듯한 물 온도에 절로 기분 좋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여름이지만, 그래도 따뜻한 물이 좋죠?”

    “네.”

    뜨거운 방바닥에 허리를 지질 때처럼, 온탕은 몸을 녹아내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뼈와 살이 녹아내리는 기분에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자 등 뒤에서 이환이 웃음을 흘렸다.

    탄탄한 가슴에 기대어 노곤함을 즐기고 있노라니, 그가 거품을 떠 내 어깨와 팔에 끼얹어 부드럽게 문질렀다.

    “이렇게 욕조에서 목욕하고 있으니, 선녀와 나무꾼이 된 기분도 드네요.”

    “…….”

    “생각해 보면 내가 날개옷을 찢었군요.”

    나무꾼이라고 하기엔 과하게 금수저가 아닐까. 이환이 도끼를 들고 나무하는 모습을 떠올렸다가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웃음만 나왔다.

    “선녀님이라고 불러 줄까요?”

    “괜찮습니다.”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다. 처음 요정님이라고 불렀을 때 딱 잘라 부정했다면 지금까지 요정님으로 불릴 일도 없었을 텐데. 그땐 처음이라 당황한 마음이 커서 어물쩍 넘어갔더니, 어느새 요정님이 되어 있었다. 여기에 선녀님이라는 직함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역시나 요정님의 정체성을 침범하는 건 안 좋겠죠.”

    정체성까지 나올 일인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져서 그냥 뜨듯한 물속에서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이환 역시도 축 늘어진 나를 보듬어 안고 손가락을 조물조물 가지고 노는 데에 심취했다.

    “해민 씨.”

    “네.”

    “집으로 돌아가면 또 나와 거리를 둘 겁니까? 오늘 일도 없었던 일이 되는 건가요?”

    “……모르겠어요.”

    조금 더 명확하고 성의 있는 답변을 주고 싶었으나, 나 역시도 집으로 돌아간 뒤의 내 행동이 어떠할지 짐작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나란 사람이 충동적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어느 순간 사고 치는 나와 수습하는 내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있었던 일로 남겨 둬요.”

    “그럼…… 어색해질 텐데요.”

    “그동안도 충분히 어색했습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하긴 많이 어색했지.

    “일을 그만둘 각오까지 한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겁니까. ……내가 싫어요?”

    일을 그만둘 생각은 하면서 왜 저와 가까워질 생각은 없는 거냐고, 혹시나 제가 싫은 거냐고, 언젠가 물었던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침묵으로 넘어간 그때와 달리, 몸을 돌려 이환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실장님.”

    “네, 해민 씨.”

    언제나와 같았다. 언제나처럼 나를 향한 시선과 표정과 목소리에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내게 전해지는 그 다정함을 느낄 때마다, 잘못 배달된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불편하고 거북스러웠다.

    명확하게 이야기하자고, 내 기분을 말로 표현하고, 내가 느끼는 의문을 솔직하게 물어보자고. 그랬는데 정작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탓에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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