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9.
연회장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머리도 복잡하고 내가 있을 곳이 아닌 듯 느껴지는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아 계단에 걸터앉았다. 생각 정리라도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복잡한 머릿속은 내 능력으로 말끔하게 정리될 수준을 넘어섰다.
“모르겠다.”
사모님이 이걸 노렸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걸?
어차피 나는 한 달 고용직일 뿐인데. 한 달이 지난 뒤에도 일을 계속할지 그만둘지 모르는 놈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뭐 하려고.
진짜 알 수가 없네.
사모님과의 대화로 남은 것도, 얻은 것도 없었다. 사모님 또한 내게서 얻어 낸 것이 없으리라. 이환의 정보를 얻어 내려는 목적이었을까 싶지만, 나는 프락치로도 쓰지 못할 만큼 아는 게 없는 놈이었다. 나도 모르게 어떤 정보를 흘리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을 만큼.
무릎에 턱을 기대고 어두운 계단 끝을 멍하니 응시했다.
어둠은 마치 지금의 상황과 같았고, 앞으로의 내 미래와도 같았다. 두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과거 또한 그러했으니까. 한 번도 빛 아래에 존재해 본 적이 없던 나는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노라니, 주머니에서 요란한 진동이 느껴졌다.
“여보세요.”
저장되어 있지 않은 휴대폰 번호라서 스팸 전화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도 아니면 보이스 피싱이겠지. 그냥 받지 말까 하다가 이 사람들도 나름대로 월급 받고 하는 일이겠거니 싶어 전화를 받았다.
―해민 씨?
“……누구시죠?”
―백윤경입니다.
스팸 전화도 보이스 피싱도 아니었다. 수신 거부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백 비서님.”
―해민 씨, 지금 어디예요?
“아, 저 잠깐 연회장에서 나왔어요. 지금 들어가겠습니다.”
이환이 찾는 모양이다. 이환이 아니라 백윤경이 전화를 한 상황이 의아했지만, 아무튼 자리를 비워서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계단에서 일어서며 엉덩이를 털었다.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비상계단이요. 금방 들어갈…….”
철문을 열어 밖으로 나오며 대답하는데 전화가 끊겼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복도를 쭉 걸어 나오자 연회장 쪽에서 이곳으로 걸어오는 백윤경이 보였다.
“백 비서님.”
“해민 씨.”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백윤경의 이마가 살짝 젖어 있었다.
“무슨 일 생겼어요?”
“일단 가시죠.”
내 팔을 붙잡은 그는 엘리베이터로 이동해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실장님은요?”
백윤경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먼저 내려가셨어요?”
집에 가려는데 내가 안 보여서 먼저 내려갔나. 하도 안 보이니까 백윤경이 전화를 걸었던 걸까.
눈을 끔뻑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백윤경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실장님은 룸에 계십니다.”
“……룸이요?”
“해민 씨를 집에 데려다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일단 타세요.”
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나를 밀어 넣은 백윤경이 일 층 버튼을 눌렀다.
“실장님은 오늘 호텔에서 주무시는 거예요?”
저녁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밥 먹기로 했는데. 물론 이 상황에서 호텔 식사는 어떻게 되는 거냐는 질문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냥 조금 아쉬웠다.
“실장님 몸 상태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룸으로 모셨어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백윤경이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답했다.
“아프신 거예요?”
“샴페인에 약을 탔던 모양입니다.”
“무슨 약이요? 누가요? 독이에요? 쓰러지셨어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회장 사모님이었다.
그녀의 목적이 이거였나. 그런데 샴페인에 약을 타는 것과 나와 따로 만난 건 무슨 상관이 있지? 내가 있다고 해서 샴페인에 약을 타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알리바이를 만들 목적이었다면 남들 눈을 피해 하필이면 비상계단에서 또 하필이면 나와 몰래 만날 이유도 없었다.
대체 왜…….
“독은 아니고, 페로몬 자극제로 보입니다.”
“페로몬…… 자극제요?”
“페로몬 불순으로 병원에 가면 중증 환자들에게만 처방되는 약품입니다. 정상적인 알파나 오메가들이 복용할 경우 러트나 히트 사이클 때와 유사한 페로몬 작용이 나타나죠. 그 시기의 성행위가 평소보다 쾌감의 자극이 높기 때문에 불법이지만 일부러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걸 왜 실장님한테…….”
“실장님의 페로몬이 유독 강하니까요. 연회장 내에서 난리가 나기를 바랐을 수도 있고.”
이환의 페로몬이 러트 사이클 때처럼 날뛴다면, 연회장 안에 있는 오메가들에게도 어떠한 영향이 미칠 게 분명했다. 진짜 누구 하나가 눈 뒤집혀서 달려드는 그런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망신을 주려는 목적이었나 봐요.”
목숨이 위험한 약은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SG 그룹 회장님의 아들을 독살한다면 그 수습이 어려울 만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환을 망신 주려는 목적이 틀림없었다.
“그럼 실장님은 러트 사이클 때처럼…….”
“네. 다행히 변화를 빨리 알아차리셔서 급하게 체크인하고 룸으로 모셨습니다.”
“병원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해독제 같은 거 맞아야 하지 않을까요?”
“일종의 흥분제 같은 거라서, 시간이 지나 약 기운이 빠지길 기다리는 게 최선입니다.”
페로몬에 관련된 약들은 하나같이 몸에 부담을 주기 마련이고 중화제 또한 마찬가지여서, 중독자들이 아닌 이상 자연 해독을 기다리는 편이 가장 좋다고 백윤경이 덧붙였다.
“차라리 다른 알파처럼 오메가를 불러 해소하면 편하실 텐데. 약 기운도 더 빨리 빠질 테고요. 하지만 실장님은 러트 사이클 때도 참으시는 분이니 방도가 없네요.”
“러트 사이클 때 먹는 약이 있다고 하던데요. 억제제요!”
“러트 사이클과 유사한 페로몬 작용이 나타나는 거지, 정확히 러트 사이클이 온 건 아닙니다. 매운 냄새 때문에 기침이 나온다고 기침약을 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네.”
명확한 비유에 상황을 확 이해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다 이환의 상황을 다시금 떠올리고 주저하며 물었다.
“그럼 실장님은 룸에 혼자 계시는 거예요?”
“알파나 오메가가 곁에 있으면 페로몬에 휩쓸릴 겁니다. 베타가 곁을 지킨다고 해 드릴 수 있는 것도 없고. 힘든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으실 테니, 혼자 계시게 자리를 비켜 드리는 수밖에요.”
백윤경이 그리 말함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리시죠. 김 기사님이 해민 씨를 댁까지 모셔다드릴 겁니다. 저는 뒷수습도 해야 하고 실장님 근처에 있어야 할 듯해서 댁까지 동행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그러니 나만이라도 먼저 집으로 돌아가라며 말하던 백윤경은 곁에서 함께 걷는 기척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걸음을 멈추었다.
“해민 씨? 왜 안 내리고…….”
러트 사이클 때와 비슷하게, 일어나는 흥분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을 게 분명한 이환이 떠올랐다.
그런 주제에, 그런 상황에서 내가 집에 돌아가는 것 따위 왜 걱정해.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아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부터 집에 보내겠다고 비서가 찾아다닐 정도로, 왜 나부터 챙겨. 당신 몸이나 걱정하지.
“백 비서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고 서 있는 나를 돌아보며 백윤경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제가…….”
“해민 씨?”
“제가 실장님 옆에 있을게요.”
“실장님이 걱정되는 마음은 알겠지만, 해민 씨가 옆에 있어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실장님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실 겁니다.”
백윤경은 모른다.
내가 베타와 흡사할 정도로 보잘것없는 수준의 페로몬을 지닌 열성 오메가라는 사실을. 또한 내가 이미 이환과 러트 사이클, 히트 사이클을 함께 보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내가 어떤 생각으로 이환의 옆으로 가겠다고 말하는지도. ……백윤경은 모르고 있었다.
“실장님 러트 사이클 겪는 거 이미 한 번 봤어요.”
“아아.”
“옆에서 물수건이라도 올려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목소리가 떨리지 않고 나오기를 바랐다. 긴장해서 바짝 마른 입술과 안정되지 못한 시선을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랐다. 내가 감춘 속내를 백윤경이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으음, 그럼 해민 씨에게 실장님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일 처리 때문에 회장님과 부회장님 쪽에 다녀와야 해서요.”
“네.”
막혔던 숨구멍이 확 트이는 기분이다. 나도 모르게 웅크리고 있던 어깨가 긴장이 풀리며 축 늘어졌다.
“그럼 다시 올라가시죠.”
엘리베이터에 다시 올라탄 백윤경이 최상층의 버튼을 눌렀다.
“룸에 들어가시면 실장님을 부탁드립니다. 식사는 룸서비스를 부르시고요. 필요한 게 생기면 제게 연락 주십시오.”
“네.”
휴대폰에 아까 걸려 온 백윤경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띵,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달했다.
“이쪽입니다.”
카드 키로 객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백윤경의 뒤를 따랐다.
“저는 한동안 바쁠 겁니다. 실장님의 상태에 변화가 생기면 연락 바랍니다.”
“네. 걱정 마시고 일 보세요.”
문 안으로 들어왔는데 침대가 없었다. 정면에 보이는 동그란 공간을 중심으로 사방에 길이 나 있고, 양쪽 길은 문으로 닫혀 있었다.
“침실은 이쪽입니다.”
그럼 저쪽은요? 문득 궁금증이 밀려들었으나 지금 중요한 건 이환이었기에 얌전히 백윤경을 쫓았다.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또 문이 보였다.
“화장실 겸 욕실, 반대편은 드레스 룸. 침실에 함께 계실 겁니까?”
“네.”
정면으로 보이는 문이라며 백윤경이 손짓했다.
“실장님을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당부한 백윤경이 나를 남겨 두고 왔던 길을 돌아 나갔다. 중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침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향기가 난다. 불과 얼마 전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쌌던 짙은 녹음의 향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