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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44)화 (44/172)
  • 44화

    역시 잘못 주고 간 모양이다. 이걸 돌려줘야 할 텐데 뒷모습만 본 탓에 누구인지도 모르겠어서 난감해졌다.

    참, 나. 이 문명화된 시기에 쪽지가 웬 말이야. 휴대폰 없어?

    괜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를 타박해 보았으나, 손에 들어온 쪽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누군가를 몰래 만나고 싶었던 모양인데……, 상대가 안 오면 다시 부르겠지.

    괜한 오해로 인연이 어긋나 갈라져 버리는 로맨스 영화의 전개가 아니길 바라며, 조용히 쪽지를 주머니에 넣어 증거를 인멸했다.

    내심 나가서 쪽지를 잘못 전달했다고 말해 줘야 하나 약간의 고민이 되기도 했다. 도의적으로 그리하는 게 옳지만 이런 낯선 장소에서 오지랖을 부렸다가는 괜한 오해나 공격을 받기도 쉬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꼭 그랬지. 과연 영상 매체의 힘이란.

    괜히 나대지 말자며 접시에 코를 박고 있는데 누군가 옆을 지나가며 톡톡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대상이 잘못되었다니까, 왜 자꾸 아까부터…….

    누구랑 헷갈리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말해 줘야겠다며 번쩍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옆을 지나친 SG 그룹의 사모님, 즉 이환의 계모가 따라오라는 듯 눈짓을 했다.

    아무래도 쪽지의 대상이 나였던 모양이다.

    무슨 목적으로? 어떤 이유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문을 열고 연회장을 나선 사모님의 모습도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그냥 무시하면…… 안 되겠지.

    돈 봉투가 날아올까, 싸대기가 날아올까. 협박일지, 회유일지, 그도 아니면 그냥 묻어 버리려고 그러나. 티브이에서 보았던 상황들이 머릿속에서 휙휙 지나갔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비밀스럽게 불러내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용건은 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단이라고 했지.

    연회장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장실, 엘리베이터, 로비, 흡연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비상계단 표시가 보이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없을 거란 예상과 달리 닫힌 철문 앞에는 정장을 입은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여기로 온 게 아닌가. 설마 다른 쪽 계단인가. 계단이 다른 곳에도 있으려나?

    다른 계단을 찾아봐야 하나 고민하는데, 눈이 마주친 남자가 옆으로 움직이며 막고 있던 문에서 비켜섰다.

    다른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혹은 내가 들어간 뒤에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세워 둔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내가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는데도 그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닫혀 있는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가녀린 손목이 불쑥 튀어나와 나를 끌어당겼다.

    “엇.”

    “쉿!”

    오늘 행사의 주인공이신 분이 어째서 이런 장소로 하필이면 나를 불러냈는지 도통 짐작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인사는 됐고.”

    잘 차려입은 정장, 한껏 꾸민 헤어, 열심히 분칠한 얼굴, 갖가지 액세서리. 눈앞의 여자를 훑어보다 뒤늦게 인사를 하자, 여자가 손을 내저었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만나게 될지 몰라서 급하게 불렀어요.”

    “네.”

    “내가 물어볼 말이 있어.”

    빙빙 돌리지 않고 돌직구로 용건을 꺼내니 답답하지는 않았다. 왜인지 조급해 보이는 사모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있는 거예요?”

    “이 행사요?”

    딱히 오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멱살 잡혀 끌려오지도 않았기에 억지로 온 것에 해당하는지 아닌지 조금 애매했다. 굳이 변명해 보자면 월급쟁이라서 거부할 수 없는 상사의 명령이랄까.

    “아니!”

    내 질문에 여자는 답답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이환! 그 자식 옆에 억지로 있는 거냐고.”

    이런 질문은 또 예상 밖인데.

    이환의 밑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는 나를 불러낸다면, 기껏해야 돈 얼마 던져 주며 나를 시켜 이환에게 장난질을 쳐 보려는 속셈이 아닐까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 이런 질문은 좀 의외였다.

    “그건 아니고……, 그냥 고용인인데요.”

    “그런데 왜 여길 와.”

    주제도 모르고 오늘 행사에 참석했다는 질책인가. 물론 내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걸 굳이 이런 비상계단으로 사람을 불러내 사모님이 친히 지적할 일인가 묻는다면 글쎄.

    “고용주님이 동행을 명령하셔서요?”

    반드시 이유를 말해야 한다면, 역시나 월급 주는 고용주님의 권유를 가장한 명령이겠지.

    내 애매한 대답에 사모님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 자식하고 그쪽하고는 그냥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다?”

    “네에.”

    이환과 거한 사고를 친 전적이 있기에, 양심이 조금 찔려 애매한 대답이 나왔다. 다행히 사모님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경고하는데.”

    이 뒤에 나오려나. 이 돈 먹고 내 아들한테서 떨어져.

    그런데 그 대사를 치기에는 이환과 사모님의 관계가 그리 끈끈하지 않다는 점이 걸렸다.

    모자 관계라고 하기엔 이환이 사모님에게 너무 날을 세우던데, 사모님은 그래도 재혼한 남편 자식이라고 아들 취급을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자기들과 급이 다른 사람이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게 싫은 걸까.

    “도망쳐요.”

    “……네?”

    이상하게 이 집안사람들은 하나같이 예상 밖의 말을 잘하는 듯 보였다. 도저히 예측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도망치라고. 이 집안 놈들과 엮여서 좋을 일이 없어. 단순히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일자리 찾아봐요. 이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마. 일 그만두라고.”

    ‘내 아들한테서 떨어져’와 결국 비슷한 맥락이기는 한데, 무언가 달랐다. 많이 달랐다.

    “그만두라고 하셔도…… 월급을 선금으로 받아서 써 버렸거든요. 당장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아.”

    사모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빌어먹을.” 하고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면전에서 듣는 회장 사모님의 욕설이 조금 신기했다.

    “그쪽 위해서 해 주는 충고야.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라면, 한 달 채우는 대로 도망가는 게 좋을 거예요.”

    “도망쳐야 하는 대상이 있나요? 혹시…… 회장님이 싫어하세요?”

    고학력 능력자가 발에 챌 정도로 굴러다니는 취업난 시대에 하필이면 막노동판에서 굴러먹던 근본 없는 놈이 아들 옆에 있으니 신경 쓰이시려나.

    내 질문에 사모님이 풋, 하고 실소했다. 그 쓴웃음 속에 약간의 허탈함과 나를 향한 비웃음이 옅게 깔려 있음을 느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가 아니야. 이 집안 놈들과 엮이면 인생이 피곤해져. 시간이 지나면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을 거야. 그쪽은 이 집안 놈들과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이잖아. 원래 자리로 돌아가요.”

    ‘급이 다르다.’, ‘주제 파악하고 네 자리로 돌아가라.’라고 밀어내는 것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믿기 어렵지만, 오늘 처음 대화하는 그녀는 묘하게 나를 걱정하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그 집안 놈들이 실장님과 부회장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정신병원에 처넣어야 할 새끼들. 이수한이 제 새끼라고 싸고도는 바람에, 그 미친놈들이 고삐 풀려 돌아다니고 있잖아.”

    이수한이 누구인가 가만히 고민하다가 이내 SG 그룹 회장님 성함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래도 미친놈들이라니. 이환이 비록 서른 살이 넘어서까지 요정님을 믿지만, 이정의 성격이 좋은 듯 나쁜 듯 애매하긴 하지만. 그래도 ‘정신병원에 처넣어야 할 미친놈’은 너무했다.

    “경고해 주려고 불렀어. 그쪽은 아무것도 몰라. 이 집안 놈들이 얼마나 미친놈들인지. 너무 가까워지지 말아요. 도망갈 수 있을 때 도망가. 눈에 들면 안 돼.”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사모님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이겠지. 또 이렇게 몰래 만날 수는 없을 거야. 아니, 지금 이렇게 만나는 것도 금방 알게 될 거야. 그놈들이면 그럴 거야.”

    SG 그룹 회장 사모님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매우 불경스럽지만, 아무래도 정신 상태가 불안정한 쪽은 사모님이 아니실지…….

    이환이 비록 서른넷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요정님을 믿긴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일상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던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결코 누군가에게 미친놈 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요정님을 믿는다는 점 하나만으로 충분한가.

    어째 혼란스러워져서 미간을 꾹꾹 누르는데, 전화가 오는지 여사님의 휴대폰이 지이이이이잉 하고 몸을 떨었다.

    “가 봐야겠어. 내가 해 준 경고를 잊지 말아요. 그쪽이 이 집안 놈들과 관계없는 사람이라니까 하는 말이야. 나중에는 내 말을 이해할 거야.”

    그리 말한 사모님은 다급히 비상계단의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스르르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끝?

    날아오는 돈 봉투라거나 손찌검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이환에게 위협적인 사건을 발생시켰다던 사모님은 나를 이용한 어떤 수작도 도모하지 않았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경고만을 남겼을 뿐.

    이거 뭐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회장 사모님이 굳이 나를 여기로 불러내 이런 황당한 헛소리를 남기고 간 연유는 무엇인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잠시간 멍하니 어두운 계단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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