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43)화 (43/172)
  • 43화

    “두 사람.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언제 다가왔는지 이정이 이환의 어깨에 손을 걸치며 아는 척을 했다.

    “입장하는 거 봤는데 움직일 생각을 안 해서 와 봤어. 이렇게 문 막고 있으면 사람들이 못 들어온다고.”

    아버지가 기다리신다며 이정이 이환을 이끌었다. 덩달아 끌려가며 과연 내가 동행해야 할 자리가 맞는가 다시금 의문이 들었다.

    연회장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주축이 되는 무리가 있기 마련이다. 개최자로 볼 수 있는 SG 그룹 회장님과 사모님을 중심으로 그들과 한마디라도 섞어 보려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저기를 뚫고 들어가는 건 좀…….

    머뭇거림을 알아차렸는지 이환이 내 어깨를 감싸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늦었구나.”

    회장님이 이환과 그 옆에 자리한 나를 보곤 조용히 말했다. 무덤덤한 목소리였으나 약간의 질책이 담긴 듯 느껴지기도 했다.

    “자네도 왔군.”

    “안녕하세요.”

    격의 없는 인사라기보다는 그냥 이름을 못 외운 듯 보였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꾸벅 인사를 했다.

    “좋은 시간 보내다 가게.”

    여기서 어떻게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얼굴 봤으니 이만 꺼지라는 축객임은 알 수 있었다. 네에, 하고 답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는데 어깨를 감싼 손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어코 강남에 호텔을 올리셔서 기쁘시겠습니다. 아니다, 정작 기쁜 사람은 따로 있나.”

    누가 봐도 축하하는 표정이 아닌 얼굴로 이환이 회장님과 사모님을 바라보았다.

    아, 이런 분위기는 좀…….

    주변의 시선도 불편하고 가족 불화의 자리에 끼어 있는 상황도 불편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천장의 샹들리에를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이정이 어깨에 올라와 있는 이환의 손을 떼어 냈다.

    “환아, 해민 씨 불편하게.”

    “아……, 미안합니다. 불편했어요?”

    그렇게 대놓고 불편했냐고 물으시면.

    “네.”

    정직하게 불편함을 고할 수밖에 없다.

    당당한 대답에 아주 잠깐 멍한 얼굴을 했던 이환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불편한 자리에 끌어들여 미안합니다. 회장님, 얼굴 비추었으니 저흰 배 좀 채우러 가겠습니다.”

    “휭하니 가지 말고, 조금 이따 다시 오거라.”

    시선 때문인지 말로 타박을 하지는 않으나 은근슬쩍 눈치를 준 회장님이 이환을 물렸다. 가 보라는 손짓에 이환이 나를 데리고 냉큼 자리를 떴다.

    “진짜 인사만 하고 오셔도 되는 거예요?”

    연회장 한쪽에 마련된 음식 테이블로 향하며 물었으나 이환은 무엇이 문제냐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다른 분들도 엄청 많은데. 교류? 그런 거 하셔야 되는 거 아닌가.”

    “내가 뭐라고 교류를 합니까. 회사를 물려받을 것도 아닌데. 그런 건 필요한 사람들끼리 알아서 하겠죠. 그리고 용건 있으면 이 자리가 아니더라도 알아서 찾아올 겁니다. 해민 씨는 걱정 말고 그냥 편안하게 먹고 구경하다가 가면 돼요.”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다며 뷔페식으로 음식이 놓여 있는 테이블로 인도한다. 진짜 식사를 하라는 건 아니고 요기만 하라는 뜻인지, 죄다 가벼운 핑거푸드 종류였다.

    파티라고 해서 코스 요리나 못해도 스테이크는 썰 줄 알았는데.

    치킨이며 피자며 먹을 게 그득하던 친구들 생일 파티를 떠올리며, 부자들의 파티가 오히려 먹을 것에 더 박하구나 생각했다.

    “왜 그렇게 시무룩한 얼굴이에요.”

    “……음식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요.”

    말뜻을 이해했는지 이환이 입가에 미소를 물었다.

    “살짝 요기만 해요. 끝나면 이곳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갑시다.”

    최고의 5성급 호텔이라는 광고에 걸맞을지 구경해 봐야겠다며 이환이 솔깃한 제안을 했다. 그 제안이 내심 마음에 들어서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새것처럼 번쩍번쩍 윤기가 나는 새하얀 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안에 생과일이 들어가 있는 탱글탱글한 젤리, 크림과 체리가 올라간 크래커, 장식인지 먹으라는 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꽃이 올려진 손바닥보다 작은 케이크, 토마토와 하얀 치즈와 풀이 있는 요상한 샐러드, 난생처음 보는 다양한 종류의 치즈와 생과일까지.

    독특하고 신기한 음식들이었지만 하나같이 배를 채우기엔 부족해 보였다.

    두어 사람이 차와 함께 담소를 나누도록 마련된 테이블 빈자리에 앉자, 이환이 샴페인을 가져다주었다.

    “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네?”

    “회장님 옆에 계셔야 하는데 저 때문에 빠져나오신 거잖아요.”

    이환은 아니라고 했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하하 호호 웃으며 어울리고 있는 건 아닐 터이다. 이런 자리에서 서로를 소개받고 인맥을 넓히고 겸사겸사 일 얘기도 하고 그러는 거겠지. 그 증거로 우리처럼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해민 씨 때문에 여기 있는 거 맞습니다.”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은 이환이 다리를 꼬며 샴페인을 홀짝였다.

    “해민 씨가 없었다면 얼굴만 비추고 갔을 거예요.”

    “어딜요?”

    “집에요.”

    “…….”

    설마 싶었지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묘하게 진심처럼 느껴졌다.

    “따분하고 영양가 없는 자리에 시간을 버리면서까지 있을 이유가 없죠.”

    “인맥도 재산이라던데.”

    “그거야 회사 물려받을 형에게나 필요한 거고요.”

    “실장님도…… 물려받지 않을까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누가 그룹을 물려받느냐 하는 걸로 자식들끼리 피 터지게 싸우기도 하지만, 이환처럼 욕심이 없으면 계열사만 몇 개 물려받아도 되지 않을까. 싸우는 건 전체를 다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이니까. 회장님 아들인데 그냥 빈손으로 쫓아내지도 않을 테고.

    “전 회사 경영에 욕심이 없거든요.”

    “일 열심……, 잘하시잖아요.”

    열심히 하나? 할 때는 열심히 하는 듯 보이지만 종종 일정을 뒤로 미루기도 하고 이른 퇴근을 하는 모습도 봐 와서 명확하게 ‘열심히 한다’고 단정 짓기는 조금 애매했다. 그래도 잘하는 건 맞는 듯싶은데.

    “어느 정도 상황이 안정되면…… 서울 외곽이나 섬으로 나가 살까 생각합니다.”

    “섬이요?”

    그보다 상황이 안정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지금 상황이 무언가 복잡하다는 뜻인가. 새어머니와 이복동생들의 문제 때문인가.

    짐작하기가 어려워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이환이 웃으며 카나페 하나를 집어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산도 있고, 들판도 있고, 바다도 보이는 그런 곳에서 평온하게 살고 싶어서요.”

    “평온한…… 백수요?”

    “네. 평온한 백수.”

    내 꿈입니다, 하고 말한 이환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소년처럼 해맑게 웃는 삼십 대 남자의 꿈이 평온한 백수라니.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았다.

    “마트라거나 병원이라거나, 주변에 그런 시설이 없으면 불편하잖아요.”

    “헬기 띄우면 됩니다.”

    “아…….”

    이환이 SG 그룹 회장님 아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네. 교통이 불편하면 헬기를 타면 되지. 길이 없는 산골에 살아도 날아서 다니면 뭐가 문제일까.

    내 생각이 짧았다며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언제 다가왔는지 등 뒤에서 나타난 이정이 물었다.

    “아, 부회장님.”

    반사적으로 일어나려 하는 내 어깨를 눌러 앉히며 이정이 이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우리 환이, 재미있어?”

    “재미없어. 따분하고 시간 아깝지. 뭐 축하할 일이라고 여기까지 찾아왔나 싶기도 하고. 슬슬 돌아갈까 생각 중이었어.”

    불퉁한 대꾸에 그럴 줄 알았다며 이정이 낮게 웃었다.

    “너 온 지 삼십 분도 안 지났어. 지금 가 버리면 나쁜 아들이지.”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네. 한 시간 채우기 전에 갈 거야.”

    “네가 그럴 줄 아셨나 보다. 아버지가 보자시네. 잠깐 와 봐.”

    “해민 씨 다 먹으면 가 볼게.”

    “해민 씨 병풍처럼 세워 두려고? 먹은 거 얹히겠다. 이야기만 끝나면 보내 주실 것 같은데, 해민 씨 먹고 있는 동안 아버지 뵙고 와.”

    이정의 제안에 이환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약간의 망설임과 불만이 그의 손끝에서 느껴졌다.

    “그렇게 하세요, 실장님.”

    “해민 씨.”

    “제가 옆에서 들을 말도 아닌 듯하니까. 여기서 이거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가 자리 비워도 괜찮겠어요?”

    “그냥 앉아만 있을 건데요. 다녀오세요.”

    제발 나를 달고 다니지 말고 여기에 보관해 두라고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자, 미세하게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이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네.”

    “해민 씨, 환이 금방 돌려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많이 먹으라며 인사한 이정이 내켜 하지 않는 이환을 끌고 회장님이 계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두 남자의 등을 바라보다가 몇 개 남지 않은 핑거푸드를 집어 입에 넣었다.

    음, 맛이 있는 듯 없는 듯 미묘해.

    뭔가 맹숭맹숭하니 자극적이지 않은 건강식 먹는 기분을 느끼며, 기계적으로 입에 넣은 것을 씹었다.

    자리를 더 구석으로 옮길까.

    혼자 덜렁 앉아 있으려니 괜스레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벽과 하나가 되어 은신해 있고 싶었다. 소시민은 등 뒤에 벽이 있어야 안심이 되는 법인데. 위축되는 어깨를 펴려 했지만 점점 고개가 수그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접시에 시선을 박고 음식만 꾸역꾸역 먹고 있을 무렵, 누군가 곁을 지나며 작게 접힌 쪽지를 툭 무릎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힐끗 고개를 돌려보니 샴페인 한 잔을 가지고 가는 낯선 남자가 보였다.

    뭐지?

    흘린 건가, 아니면 일부러 던지고 간 건가. 이걸 펴 봐야 할지 돌려주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슬며시 쪽지를 펴 보았다.

    [5분 뒤에 계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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