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순간 할 말을 잃은 나를 보고, 이환이 낭패로운 얼굴을 했다. 방금까지 함께 기뻐하며 다정하게 웃던 남자는 한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당황하여 흔들리는 시선을 붙잡지 못했다.
지금 발언이 선을 넘어 버렸음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로 이환은 내게 표 내지 않고 일상적인 대화만을 주고받았지만, 때때로 내가 그어 놓은 선 근처에서 아슬아슬하게 휘청거리기도 했다. 그는 마치 불이 뜨겁다는 사실을 직접 만져 보고 터득하는 아이처럼, 한 걸음 선을 넘었다가 파드득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 그러다 다시 참지 못하고 다가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반기지도 거부하지도 못한 채 곤란해했지만, 그렇다고 내 눈치를 살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이환 역시 불편했다. 그 불편함은 이환을 향한 죄책감과 미안함을 자꾸 상기시켰다.
“그런데…… 파티 가세요?”
“네. 호텔 개관식이라고 하더군요.”
어색하게 말을 돌리며 묻자 이환 역시 방금 무슨 이야기가 오갔냐는 양, 선선히 내 물음에 답을 주었다.
주제를 바꾸려는 의도였는데 조금 흥미가 생겼다.
파티라고 해 봤자 초등학교, 중학교 때 친구들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본 경험뿐이다. 이환이 말하는 파티는 그런 생일 파티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티브이에서 보았던 상류층들의 교류 모임일까.
머릿속에 클래식을 연주하는 악단을 배경으로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모습과 클럽 음악이 빵빵 터지는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술과 마약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호텔 개관식 파티라면 아무래도 전자에 해당하겠지. 클래식은 영원하니까. 어디서 들어 봄 직한 개소리를 떠올렸다.
“욕심 많은 계모가 기어코 강남에 호텔 건물을 올렸습니다.”
“아, 사모님 호텔이에요?”
“호텔은 그룹 계열사 중 하나입니다. 다만 계모가 관리하고 있죠. 중구와 서초에 하나씩 있어서 서울 내에는 더 이상의 확장이 필요 없다고 보는데도 굳이 강남에 오픈한 걸 보면, 성에 차지 않았나 봅니다.”
마땅찮은 기색이었는데 그래도 개관식에 참석은 하려는 모양이다. 이환 정도의 위치에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가지 않을 것 같은데도 의외의 부분에서 성실했다.
“그런 이유로,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호텔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귀찮은 일정이었는데 해민 씨 축하 파티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네요.”
이환은 아까처럼 과하게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축하 파티는 포기하지 못하겠는지 백 퍼센트 진심인 표정으로 말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붙었다고 축하 파티를 하는 것도 웃기지만, 남의 호텔 개관식 파티를 멋대로 내 축하 파티로 여기는 것도 웃겼다.
“저도 가나요?”
“그럼요. 해민 씨도 가야 내가 축하를 해 주죠.”
어렸을 적 친구들 생일 파티를 제외하면 파티라고는 가 본 적이 없어서 두려웠지만, 지금 이환의 말이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느껴져서 더 두려웠다.
파티에 가서 큰 소리로 운전면허 필기시험 합격을 축하한다고 쩌렁쩌렁 울리게 말하지는 않겠지.
그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으리라 믿지만, 대상이 이환이다 보니 마냥 믿기에도 어려웠다.
“그런 큰 파티라면 초대받은 사람들만 갈 수 있을 텐데요. 저는 그냥 집에서 여사님이랑 있는 게…….”
“개최자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은 파티일 겁니다. 나는 해민 씨가 많은 경험을 해 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거절은 거절하겠다는 단호한 표정에 마냥 뻗댈 수는 없었다. 돈 주는 사람이 시키면 따르는 게 이치이고 순리였다.
∞ ∞ ∞
“긴장하지 말아요. 어깨 펴고.”
굳이 개관식을 구경할 필요는 없으니, 파티에 참석해서 밥이나 먹고 오자고. 마치 결혼식장에 결혼식 참석은 안 하고 밥만 먹으러 가는 사람처럼 이환이 가볍게 말했다.
가뜩이나 난생처음 겪어 보는 상류층의 파티에 긴장이 되는데, 심지어 중요한 개관식에는 얼굴도 비추지 않고 느지막이 파티에 얼굴을 들이밀 생각을 하자 장이 꼬이는 기분이다.
아무렇지 않은 정도를 넘어 평온하기까지 한 이환의 얼굴이 오늘따라 조금 얄미웠다.
“진짜 제가 가도 될까요.”
“초대장은 대부분 동반 입장을 허용합니다.”
“초대장이요?”
이환이 초대장을 챙기는 모습은 보지 못했는데.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그는 초대장을 꺼내 보여 주는 대신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SG 그룹 행사인데, 내 얼굴이 초대장이죠.”
“아…….”
얄밉긴 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발언이다.
“내 손님이 초대장을 들고 온 떨거지들보다 더 중요한 것도 사실이고.”
그런……가?
느리게 긍정하던 고개가 다시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러니 긴장하지 말아요. 해민 씨가 파티장의 테이블을 뒤집어엎는다고 해도 쫓아낼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 짓은 하면 안 되죠.”
발끈하는 내가 귀엽다는 듯 웃는 이환의 시선이 너무나 부드러워서, 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뒤늦게 어색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이환이 겸연쩍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 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가자고 말했던 그 날 이후, 이환은 단 한 번도 그때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짙은 스킨십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그가 보내오는 시선이나 놓칠 수 없다는 듯 꽉 붙잡는 손길에서 그의 속마음이 전해지곤 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고, 불편하지 않도록 나를 살폈으며, 어떤 일에서도 나를 우선시했다. 가끔은 내가 일을 하고 있는지 이환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그는 여전히 내게 다정했다.
“내리죠.”
얕은 상념에 빠진 나를 가볍게 건드리며 이환이 말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파티 홀로 향하는 그의 뒤를 따랐다.
“허리 굽혀 인사할 필요 없습니다. 누가 다가오면 무시해 버려요. 뭘 물어보면 내 동행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곤란한 질문에 일일이 답해 줄 필요는 없어요. 아버지 얼굴만 보고 식사하러 갑시다.”
“일일이 답을 안 하면, 그럼 그냥 입 다물고 있어요?”
“네. 굳이 대답해 줄 필요 없습니다. 격이 맞지 않으니까.”
그렇지. 이런 파티에 초대되어 오는 사람들과 내가 같은 자리에 있다고 해도 같은 수준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니까. 격이 맞지 않는다는 말을 반박할 수도 없다.
“점잖은 체를 한다고 해도 진짜 점잖은 인간들은 몇 없습니다. 요정님이 너무 순수하고 고귀해서 똥파리 같은 놈들이 들러붙을까 봐 걱정이네요. 사탕 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아요.”
이환이 말하는 격과 내가 생각한 격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이환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반적인 시선이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요정님을 떠나서 순수하고 고귀하다는 점에는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사탕을 걱정하기엔 제 나이가 너무 많은데요.”
“아직은 아가죠.”
“아가는 아니죠!”
스무 살 먹은 아가도 있냐고, 발끈하는 나를 보며 이환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주둥이 하나로 해민 씨 정도는 찜 쪄 먹을 인간들이 많습니다. 내가 옆에 있을 테지만, 누가 접근한다 싶으면 피해 버려요. 무시하는 게 답입니다.”
말 섞어서 좋을 위인들이 없다고 신신당부한 이환은 문 앞에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득한 시선으로 훑어본 그는 만족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불만족스러운, 갈피를 잡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왔어요.”
여사님이 챙겨 주시는 정장을 걸치고 왔을 뿐, 딱히 치장을 한 것은 없었다. 심지어 머리도 평소 그대로인데, 칭찬인지 타박인지 모를 예쁘다는 발언에 무슨 대꾸를 해 주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옷이라도 좀 안 예쁜 걸 입고 오지.”
본인도 슈트 차림이면서. 애초에 이런 차림이 아니면 아무리 이환의 동행이라도 출입 금지를 당할 것 같은데, 그는 옷차림까지 타박을 했다. 타박을 할 거면 집 나올 때 하든가, 늦어도 너무 늦은 타박이었다.
“이제 와서 갈아입을 수는 없으니 들어가죠.”
“네.”
에스코트하듯 내 등에 가볍게 손을 댄 이환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으리으리하게 크고 높은 건물, 어디를 둘러봐도 신축임을 알 수 있는 번쩍번쩍한 인테리어,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복도. 호텔 안으로 들어와서 본 모든 것들이 나를 기죽게 했지만, 파티 홀 안으로 들어서서 보게 된 광경은 그냥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낯선 별세계처럼 느껴졌다.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홀, 조명을 받아 별빛처럼 반짝이는 샹들리에의 수정, 고풍스러운 인테리어, 경박스러움을 찾아볼 수 없는 잔잔한 연주, 값비싼 정장을 입은 사람들, 그들의 시선, 그들의 목소리.
시끄러운 소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귀가 먹먹했고, 부산스럽지 않은 광경이었으나 눈앞이 혼란스러웠다. 아득함을 느끼며 자리에 우뚝 서자, 닿아 있던 이환의 손이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렸다.
“괜찮아요. 해민 씨보다 빛나는 사람은 없으니까.”
괜찮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자신이 곁에 있으니 두려워할 것 없다고. 그렇게 이환은 부드러운 손길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이환을 올려다보았다.
예쁘게 하고 왔다며 타박을 한 주제에 평소와 달리 손질한 포마드의 헤어스타일 아래로 까만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접근을 거부하고 경계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의 다정함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