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41)화 (41/172)

41화

내 표정을 힐끗 훔쳐본 이환이 잠시 멈칫했다.

“안 내킵니까?”

“아니, 것보다…… 저도 뭔가 그런 자격증 하나 정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었는데요. 제가 생각했던 거랑은 좀 달라서…….”

“다릅니까?”

“제가 앉아서 사무 보는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요?”

“당연히…….”

“고등학교도 나오지 못해서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 문턱도 밟지 못한 자격증 소지자와 자격증 없는 대학교 졸업자, 둘 중에 고르라면 어느 회사라도 후자를 고르지 않을까요? 게다가 기본이라고 하셨으니 대학교 졸업한 사람들은 다들 그런 자격증을 가지고 있을 테고요.”

애초에 기본도 안 되는 나에게 가산점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에 이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취업? 요즘 대학교 나온 사람들도 취업하기가 어려워 고학력 백수가 널리고 널린 세상이다. 사무실에 앉아서 서류 업무를 보는 사무직 자리가 대학교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한 내게 올 리 없지 않은가.

나는 공부를 잘하는 축에 끼지도 못했고 고등학교도 검정고시로 대체했지만, 그렇다고 물정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컴퓨터 자격증 하나 따 놓고 가산점으로 회사 입사를 꿈꾸는 멍청이도 아니었다.

“실장님도 그런 자격증이 있으세요?”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으나 문득 든 의문에 묻자, 이환이 저 멀리 창밖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내게 그런 자격증이 필요 없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

“나는 서류를 작성하여 보고하는 사람이 아니라 작성된 서류를 보고 받는 사람입니다.”

“네에.”

“그리고 나는 그보다 더 좋은 자격증이 있습니다.”

엄청 좋은 자격증이 있나 보다. 무작정 그런 거 필요 없어, 가 아니라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는 듯 보였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는 자격증이죠.”

“…….”

할 말을 잃은 나 대신 앞에서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있었으나 좁은 공간이라 이쪽의 대화가 다 들린 모양인지 백윤경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진짜 따기 어려운 자격증이긴 합니다. 한국에서 그 자격증 가진 사람 몇 없을걸요.”

정자 때부터 피, 땀, 눈물 흘려 가며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자격증이라고 덧붙이는 백윤경의 말에 이환이 화풀이를 하듯 조수석 의자를 발로 찼다.

“해민 씨가 준비하려던 건 뭡니까?”

말을 돌리듯 이환이 내게 물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나중에 여유가 좀 생기면 따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어떤 겁니까.”

“전기나 배관 같은 거요. 건설 기계 운전 기능사도 생각해 보고 있어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 자격시험을 볼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틈틈이 기공 아저씨들 어깨너머로 훔쳐보기도 했었다. 어느 쪽을 고를지 아직 정하진 못했으나, 어느 쪽이든 쉽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도 조공에서 기공으로 넘어가면 받는 돈이 두 배 이상이니까, 이 바닥을 뜰 수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기술을 익히고 자격증을 따야 했다. 나이 먹어서까지 하루 십만 원 남짓 받아 가며 자재만 옮기면 골병 나기 십상이니까.

“전기나 배관이라니, 위험하지 않습니까.”

“조금이라도 덜 위험하기 위해서 자격증을 따는 거죠.”

조금 놀라고 또 조금 걱정하는 얼굴로 나를 보며 묻는 말에 너무나 당연한 답을 돌려주었다.

공사장에서 일하는데 위험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을까. 돈 십만 원 받고 자재를 날라도 위험한 곳이 공사판이다. 이왕 위험한 일이라면 돈이라도 많이 받고 싶고, 돈을 많이 받으려면 기술이 있어야 하니까 결국 전기든 배관이든 타일이든 자격을 따야겠지.

“하필이면 왜 그런 위험한 것들을 배우려고 해요.”

“공사장에서 컴퓨터 자격증은 필요가 없으니까요.”

내 손등을 덮고 있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붙잡힌 손은 살짝 아팠고, 땀이 스며 축축했으나 이환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꼭 공사장에서 일해야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제가 일할 수 있는 곳은 그런 곳들이에요. 위험하거나 힘들거나. 공사장, 식당, 공장, 그런 곳들이요.”

젊은 놈이 벌써부터 공사판이나 기웃거린다고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하곤 했다. 당장 버는 돈 말고 미래를 생각하라는 말도 들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지껄이는 헛소리이지.

당장 돈이 필요했다. 내가 먹고 자는 것을 제외하고서도 엄마 병원비가 필요했다. 돈이 없으면 엄마를 퇴원시켜야 하는데, 퇴원한 엄마가 지내야 할 방을 구하려면 역시나 돈이 필요했다.

이러나저러나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그런데 무슨 미래를 생각해. 당장 내일이 걱정되는 사람에게 미래는 너무나 아득한 단어였다.

미래를 위해 지금을 포기하고 공부해라, 준비해라, 자신의 스펙을 높여라?

개소리.

그들이 포기하라는 ‘지금’은 단순히 ‘지금의 시간’, ‘지금의 윤택한 생활’이다. 나에게 ‘지금’은 ‘지금의 삶’이었고, ‘지금의 생존’이었다.

‘지금’이 없다면 미래도 없다.

“자격증도 그냥 생각만 해 본 거였어요. 지금은 그런 거 배울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저는 미래보다 지금을 살아야 하니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생각한 정도였고…….”

포개어 있는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리다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 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이환이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커다란 손에 뒤덮인 내 손은 손가락 끝만 겨우 움찔거렸다.

“해민 씨에게 도움이 되는 걸 배우게 하고 싶었는데, 전기니 배관이니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해서 허락을 못 하겠네요.”

“괜찮습니다. 실장님이 숙제라고 하셨으니 워드? 그 자격증 준비할게요.”

어차피 지금은 개인 시간도 아니고 업무 시간이다. 업무 시간에 월급 주는 고용주가 시키는 일이라면, 내 인생에 절대 쓸모가 없을 일이라도 하는 게 맞다.

“해민 씨는 아무래도 기술적으로 쓸모 있는 걸 원하는 듯한데…….”

이환은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그가 무언가 생각에 빠질 때마다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거나 겹쳐진 손가락이 손바닥을 누르거나 엄지가 피부 위를 문지르곤 했다. 그렇게 전해지는 자극에 손끝을 움찔거리며 왜인지 땀이 나는 기분에 목덜미를 쓸었다.

“그럼 이번 기회에 운전면허를 따 보는 건 어떻습니까.”

“운전면허라면 좋긴 한데…….”

기회가 된다면 따고 싶지만,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하려면 역시나 돈이 필요했다. 당장 운전할 일도 없는데 학원을 등록하기엔 돈도 아깝고 시간도 아까웠다.

지금이야 하는 일 없이 이환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으니, 그 시간에 운전면허를 준비하라고 한다면서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겠지만. 실기 시험을 위해 학원 등록할 생각을 하면 역시나 돈이 걸렸다.

“필기는 혼자 준비할 수 있을 테니, 사무실에서 공부해요. 필기시험에 합격하면 실기 준비할 스케줄은 윤경이 알아서 잡아 줄 겁니다.”

“네, 그렇죠. 여기 만능 비서가 대기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해민 씨.”

여전히 앞을 바라보는 자세로 백윤경이 손만을 들어 올리며 어필했다.

“면허를 취득하면 연수는 내가 시켜 주겠습니다.”

“아……, 그건 좀…….”

“……싫습니까?”

“아뇨, 그보다 위험하실까 봐서요.”

운전면허를 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뭘 믿고 초보 운전사에게 핸들을 맡길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운전 연습시켜 주다가 이혼할 뻔했다던 아저씨들의 몇몇 경험담도 떠올랐다.

“한적한 곳에서 천천히 연습하다 보면, 김 기사님처럼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난데없는 칭찬이 싫지는 않았는지 조용히 운전을 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숨 막힐 정도로 고요하던 차 안에 퍼지는 이환의 목소리와 다른 이들의 웃음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 ∞ ∞

운전면허 필기시험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백윤경이 사다 준 필기시험 문제집은 앞에 요점 정리가 되어 있고 뒤에 모의시험 문제지가 있었는데, 대충 한 번만 훑어보아도 예상 시험에서 손쉽게 합격점을 받을 수 있었다.

시험 때문이 아니라도 도로 표지판은 능숙하게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이환의 충고에 요점 정리를 외우다시피 했다. 생각해 보면 검정고시를 볼 때도 이렇게까지 열심히 공부하진 않았던 듯하다. 중학교 때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를 한 게 가장 치열하게 공부했던 순간인데. 은근히 그리우면서도 딱히 다시 경험하고 싶지는 않은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문제집 한 권을 익숙해질 때까지 보고 필기시험을 치러 가자, 긴장감보다 기분 좋은 든든함이 느껴졌다. 조금 아리송한 문제도 있긴 했지만 거의 막힘없이 풀고 나와 바로 합격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해민 씨는 머리가 좋은가 보네요. 한 번에 합격을 하고.”

떨어지는 게 더 어렵지 싶은데. 상대 평가가 아니라 절대 평가인 만큼, 실제로도 필기시험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드문 것을 보고 오기도 했다.

스스로가 똑똑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환의 칭찬은…… 기분이 좀 좋았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고자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때마침 오늘 저녁에는 파티도 있네요. 해민 씨가 필기시험에 붙을 걸 알기라도 했나. 세상이 축하해 주려나 봅니다.”

“……네?”

“지구가 해민 씨를 중심으로 돌고 있어요.”

“지구는 자전축을 중심으로 도는데요.”

“내 세상은 해민 씨를 중심으로 도니 괜찮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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