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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40)화 (40/172)

40화

이환을 어떻게 봐야 하지, 하루 종일 이환과 붙어 있어야 하는데 어떤 얼굴을 해야 하지.

날이 바뀌고 이환을 깨우고자 그의 침실 앞에 섰을 때까지만 해도 걱정이 산더미 같았는데, 막상 침실로 들어가 잠든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차분해졌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일까.

약간의 껄끄러움과 거북함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침실을 들어오기 전까지 느꼈던 암담함이나 막막함이 사라졌다.

“실장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실장님.”

몇 번을 부르고서야 잠든 남자의 눈꺼풀이 떠졌다. 가까스로 일어난 이환이 다시 잠들지 않도록 그 뒤로도 두어 차례 더 그를 불러야 했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꿈속과 현실의 경계를 부유한다. 잠기운이 사라지지 않아 몽롱한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까만 눈동자 안에 다정함, 반가움, 설렘, 놀라움, 미안함 등의 수많은 감정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이내 아득함을 담고서 질끈 감기는 눈을 보며, 세상 다 가진 듯하던 이 남자도 나 때문에 걱정이란 걸 하는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일어나세요, 실장님.”

내 말에 그는 비스듬히 시선을 비껴 뜨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옅은 망설임 끝에 아무렇지 않음을 표하듯 아침 인사를 내뱉었다. 나는 모른 척 같은 인사를 돌려주었고, 이환은 약간의 주저함을 담은 채 욕실로 향했다.

“내가…… 혼자 씻어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불편하시잖아요. 불편하지 않도록 도와 드리는 게 제 일이니까요.”

“해민 씨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는…….”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그게 불가능하다면 일을 관두는 게 맞고요.”

“……그렇군요.”

어쩌면 나는 배짱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일을 관둘 건데 괜찮겠어?

내게 고백한 이환의 마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몇 날 며칠을 한 침대에서 뒹굴어 놓고 그 일을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한 주제에.

깔끔하지 못하게 질척이는 쪽은 이환이 아니라 나인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무언가를 고민하던 이환은 이내 무거운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샤워기 아래에 선 이환은 무표정했다. 아니, 초조함을 무표정 아래에 감추고 애써 덤덤한 척을 하려 했다. 그가 뿜어내는 풀 향기가 미미하게 짙어진 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알파와 오메가들은 이런 삶을 사는 걸까.

표정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말로 내뱉지 않아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말하고자 하는 신호를 페로몬으로 느끼는 걸까.

이환의 옆에 있으면 마치 오래전부터 오메가였던 듯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의 향을 맡고 그의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십 년 동안 베타로 생활해 온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페로몬에 반응하는 오메가가 되어 버린다.

지금 이 풀 향기가 내가 오메가로서 현재 유일하게 맡을 수 있는 알파의 페로몬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졌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베타이면서 이환의 곁에서만 오메가가 되는 기분이다.

이런 기분을 이환도 내 페로몬으로 알게 될까. 어쩌면 내 페로몬이 약해서 평소에는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열성 오메가란 점에서 안심이 되면서도 또 조금은 슬펐다.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페로몬의 영역에 발을 들인 기분은 절망스러우면서도 특별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 내가 발을 들이지 못했던 세상. 그 낯선 영역에 준비도 없이 내던져진 기분은 두려웠지만, 내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다정함에 조금은 두근거리기도 했다.

“해민 씨?”

“……아,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했어요. 죄송합니다.”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과를 했다. 황급히 샤워볼에 거품을 내고 이환의 등을 닦아 주었다.

긴장을 한 듯, 근육으로 단단한 등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의식하는 만큼 이환 역시도 지금의 상황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침묵이 아무렇지 않음을 부정하고 있었다.

목뒤에서부터 척추를 따라 손을 움직였다. 샤워볼을 움켜쥔 손끝이 단단한 등 근육을 스치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거품이 이환의 등을 타고 흘렀다.

왠지 더운 기분이다.

자꾸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숨결이 닿은 이환의 등이 물결치듯 움직였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좀 덥네요.”

낮게 잠긴 대꾸가 돌아왔다. 머쓱한 기분에 손등으로 뺨을 문지르고, 이환의 왼손을 붙잡아 팔을 닦아 주었다.

어깨부터 손목까지 살살 문지르자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흘러내린 거품이 맞잡은 손 틈으로 스민다. 손끝과 손끝을 걸치듯 붙잡고 있던 이환이 팔의 방향을 틀었다. 미끄러운 손가락 틈으로 굵고 긴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물기와 비누 거품, 깍지 낀 단단한 손가락.

잠시 멈칫한 손을 움직여 팔꿈치와 팔뚝을 문질렀다.

“……앞쪽이요.”

맞잡은 손에서 열기가 피어올랐지만 누구도 손을 빼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자 이환이 아쉬움을 털어 내듯 손을 놓아주었다.

이환과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지만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쇄골 근처에 시선을 고정하고 가슴에 비누칠을 한다. 손끝에 닿는 가슴 근육과 유두, 복근. 오르내리는 손의 움직임을 따라 격동하는 근육을 느끼며 더운 숨을 토해 내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아래는…… 내가 하겠습니다.”

내 손에서 샤워볼을 빼앗듯이 가져가며 이환이 말했다.

발기한 남자의 성기를 스치듯 보았지만, 이환도 나도 그것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 나는 이환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고, 그는 나를 부르지 못했다.

그렇게 이환을 남겨 두고 욕실에서 나온 뒤에야, 땀으로 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출근하려면 다시 씻어야겠네.”

열기가 가시지 않은 몸을 식히려 젖은 셔츠를 잡아 펄럭거렸다.

∞ ∞ ∞

출근길에 적막이 감돌았다.

운전기사야 원래 말없이 운전만 하시는 분이었고, 나도 먼저 말을 꺼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나마 백윤경이 이환에게 업무 보고를 하며 한두 마디 농담을 주고받는 정도였는데, 그것도 받아 줄 때의 이야기지. 받아 줘야 할 이환이 오늘따라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숨 막힐 듯한 침묵에 다들 질식 직전의 얼굴이 되었다.

“해민 씨.”

“네?”

침묵을 더는 견디지 못하겠는지 백윤경이 만만한 나를 불렀다.

“어제 아팠다면서요? 얼굴 못 봐서 아쉬웠습니다. 다음 주에나 볼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이번 주에 한 번은 얼굴을 보고 넘어가네요.”

“아……, 네.”

어제, 아팠구나. 그랬지. 며칠 동안 이환과 침대에서 뒹군 여파로 도저히 출근길을 따라나설 수가 없었다.

“병원 다녀왔어요?”

“음, 네.”

백윤경이 상상하는 병원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병원에도 다녀왔다.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며 대충 흘려넘기듯 대답을 하자, 이환이 크흠 하고 못마땅한 헛기침을 흘렸다.

“해민 씨 쉬어야 하니까 쓸데없는 것 묻지 마.”

“아, 넵.”

분위기 좀 풀어 보겠다고 말을 걸었다가 괜히 한 소리를 들은 백윤경이 입을 딱 다물었다.

숨 막힐 듯한 고요 속에서 그나마 들리던 사람 말소리가 사라지니 갑갑해 죽을 것 같았다. 백윤경이 화제만 잘 골랐으면 괜찮았을 텐데, 하필이면 대답하기 껄끄러운 나의 몸 상태에 관심을 가져서 안타까웠다.

내가 아프다고 이환이 대충 둘러댄 모양이라 백윤경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걱정해 준 것이겠지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입장으로서는 영 껄끄럽고 미안했다.

속으로 혀를 차며 창밖을 보고 있는데, 차 시트에 내려놓은 손이 잡혔다. 고개를 돌리자 손등을 덮은 커다란 손이 보였다. 손가락 틈을 밀고 들어온 손가락이 내 손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시선을 올리자 나처럼 반대쪽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이환이 보였다. 무표정한 옆얼굴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 혹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보이기도 했으나 힘이 들어간 턱 끝이 그의 긴장감을 말하고 있었다.

“손잡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이환은 약간 딱딱한 어조로 툭 내뱉었다.

화를 내듯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으나 역시나 그의 긴장을 감춰 주지는 못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각자 반대 방향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손만 붙잡고 있는 이상한 자세였다.

붙잡힌 손은 전해지는 열기로 뜨거웠고, 맞닿은 피부는 핏줄의 박동이 느껴질 정도로 예민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환의 엄지가 예민해진 피부 위를 느리게 쓸었다.

솜털이 솟구치고, 소름이 돋았다. 오금이 저렸고, 허벅지 안쪽이 죄어 왔다.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듯하여 괜히 눈치가 보였다.

“해민 씨에게 숙제를 하나 주겠습니다.”

“……네?”

가만히 눈을 감고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불쑥 들려온 이환의 말에 한 박자 늦은 물음을 던졌다.

“국가 기술 자격증을 하나 취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무 정보 쪽에서 하나를 골라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도록 해요.”

“……자격증이요?”

“보통 워드 자격증을 많이 땁니다. 가장 쉽고 기본이라서요.”

“아, 기본이요.”

갑자기 웬 자격증인가 의문이 들었으나 일단 이환의 말을 기다렸다.

“해민 씨가 회사에서의 시간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 압니다. 그동안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는데 차라리 할 일을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왕이면 해민 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면 더 좋겠고.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모로 가산점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회사에 취업하라는 말은 아니고요, 라고 이환이 덧붙였다. ‘참 좋은 특전이죠?’라고 말하는 표정이었으나 나는 ‘굳이?’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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