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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39)화 (39/172)
  • 39화

    그 뒤에 할 일도 없는 회사를 따라다니며 설렁설렁 시간을 보내고, 그와 같이 밥을 먹고, 그의 본가를 따라가고, 팔자 좋게 외출을 허락받고, 히트 사이클이라고 며칠이나 농땡이를 피웠다.

    정상적인 고용이었으면 쫓겨났을, 아니, 애초에 고용될 일도 없었을 터인데 나는 이환의 호의에 기대어 이 자리에 있었다.

    내가 답답한 건, 도의적으로 그를 밀어내야 함에도 욕심 때문에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어영부영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조차 다정한 이환이었다.

    “우리 도련님 참 착하죠?”

    마치 내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냥하세요.”

    너무 착하고 상냥해서, 내가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화내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상냥하세요. 아, 아까 조금 화내시는 것 같긴 했어요.”

    “응? 화를 내셨다고? 설마 해민 씨한테?”

    “아뇨.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설명해 주면서 우성 열성 비유를 들었거든요. 병원 다녀온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열성 오메가 이야기를 꺼내니까 화난 표정을 지으시더라고요.”

    “그건 화낼 일이 맞네. 우성, 열성이라니. 소고기 등급 매기는 것도 아니고, 사람한테 우성 열성이 뭐야. 그딴 놈은 콱 면허 정지를, 아니다, 아예 면허를 없애 버려야 해.”

    어쩜 이렇게 이환과 여사님이 죽이 착착 맞는지 모르겠다. 마치 짠 것처럼 비슷한 반응에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그냥 제가 감을 못 잡으니까 쉽게 설명해 주신다고 비유를 든 거예요. 의사 선생님도 비하할 목적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요.”

    멀뚱멀뚱하게 앉은 나를 보며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던 의사가 떠올랐다. 왜인지 의사에게 미안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저번에 회사에서도 한 번.”

    황만철 부장님이 그 뒤로 회사에 잘 다니고 계신지 모르겠다. 감사과에 넘기라는 말을 들었는데 잘 빠져나오셨을지, 아니면 퇴직금 없이 그동안의 비리를 탈탈 털리고 결국 쫓겨나셨을지.

    “우리 도련님이요. 지금은 저렇게 착하고 순하지만, 어릴 때는 아주 그냥 날아다니셨거든. 상상이 돼요?”

    “날아다녀요?”

    “얼마나 쌈박질을 하고 다녔는지 몰라요. 일단 인사로 주먹부터 날렸을 정도니까.”

    네? 뭘 날려요?

    이환이 주먹부터 날리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아서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주변 애들을 죄다 패고 다녔는데, 네가 아니면 내가 죽는다는 식으로 정도가 심했어요. 네댓 살 먹은 꼬맹이가 주먹이 피 칠갑이 될 정도로 싸우는데,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믿기 어려울걸.”

    아, 네다섯 살. 난 또 중, 고등학교 때 패싸움 좀 하고 다니셨나 했다. 그러다 문득 네다섯 살과 피 칠갑이 어울리는 단어였던가 의문이 들었다.

    “네다섯 살에요?”

    “응. 아주 그냥 날아다녔어. 대여섯 살 많은 애들도 맥을 못 췄다니까.”

    “……그러셨구나.”

    지금은 주먹질 한번 못 하실 것 같은 성격으로 보이는데, 어릴 때는 꽤 과격하셨구나.

    “성격이 어지간했어야지. 본인 마음에 안 들거나 심사가 뒤틀리면 일단 손부터 나갔거든. 지켜보는 사람도 말리는 사람도 하나같이 치를 떨었어요. 그래서 아픈 사모님이 침대에 누워 동화책을 주야장천 읽어 줬어. 애가 애답지 않게 과격하니 동심이라도 좀 키워 주겠다고. 그게 조금 효과가 있나 싶었는데 사모님은 돌아가시고, 남은 가족들은 죄다 본인 일만 중한 줄 아는 사람들이라 어린 도련님을 신경 쓰지 않으니 성격이 미묘해져 버렸지.”

    미묘해졌다는 성격이 자세히 어떠한 상태를 말하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게 만약 서른네 살이 되도록 요정과 산타클로스를 믿는 이환의 상태를 말하는 거라면, 돌아가신 사모님의 ‘동심을 키워 주기 위한 노력’은 역효과를 낳았다고 봐야 옳지 않을까.

    “우리 도련님이 어릴 때 사모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 어린 나이에, 한창 부모 사랑받고 커야 할 나이에…… 아버지는 회사 일로 바쁘다고 얼굴 보기가 힘들고, 어머니는 내내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외로웠겠어.”

    외롭게 자란 아이와 동심이 남아 있는 서른네 살의 남자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싶었지만, 무엇이 그리 서럽고 슬픈지 눈물을 보이는 여사님 앞에서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어머니라고 생판 모르는 여자가 들어와 쌍둥이까지 낳았으니, 어린 마음에 또 얼마나 상처였을까.”

    “…….”

    확실히,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데없이 새엄마가 생긴다면 상처가 될 만도 했다.

    “사모님이랑 내가 이환 도련님 사람 좀 만들어 보겠다고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결국 망해 버렸지.”

    “……네?”

    여사님, 뭔가 이상한데요.

    “아니, 커서는 손부터 나가지 않으니 괜찮은 건가. 그래도 동심은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련님이 나이를 먹고 보니 이게 또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영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여사님, 노선을 정하셔야 합니다. 점점 입장이 모호해지고 있어요.

    “실장님은…… 어릴 때에도 지금도 참…… 남다르시네요.”

    “응, 그렇지. 그나마 어릴 때나 지금이나 생긴 것 하나는 멀끔해서 다행이고. 가만히 있으면 멀쩡해 보이니까.”

    그 말인즉 멀쩡해 보이지만 멀쩡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신다는 뜻이군요.

    미묘하게 두둔 아닌 두둔을 하는 여사님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는 과하게 과격했고, 커서는 과하게 동심을 지녀 순수해진 이환이라니. 왜인지 현실성 없는 농담을 듣는 기분이지만, 실제로 요정을 믿는 이환의 모습을 보았기에 마냥 농담으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그런 양반이라 아직도 순수함을 가지고 있어요. 큰 도련님이 러트 사이클 올 때마다 오메가 끌어들이는 걸 코앞에서 보면서도, 자기는 운명의 상대를 만날 때까지 기다릴 거라면서 억제제 먹고 미련하게 아픈 거 꾹꾹 참았어. 독종도 그런 독종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운명의…… 상대요?”

    “응. 운명의 상대.”

    운명의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거라며 지금까지 러트 때마다 억제제로 버틴 이환.

    나와 함께 히트 사이클을, 러트 사이클을 보낸 이환.

    한없이 다정하고 또 다정한 이환.

    「귓가에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 게 운명이라죠.」

    “운명의 종소리.”

    작은 중얼거림을 듣지 못했는지 여사님은 가만히 맥주를 홀짝거렸다.

    “우리 도련님이 해민 씨를 참 많이 좋아하고, 또 많이 아껴요.”

    이환에게 들은 말이 있기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여사님이 알고 하는 말씀인지 모르고 하시는 말씀인지는 짐작되지 않았으나, 눈앞으로 다정히 웃던 이환의 얼굴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나는 우리 도련님이 사람을 좋아하게 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도련님 결혼을 일찌감치 포기한 이유기도 하고.”

    “……왜요?”

    “요정님을 너무 좋아해서.”

    그리고는 자기가 한 말에 호호 하고 웃은 여사님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정함을 담아 응시하는 눈동자가 이환과 너무 닮아 있어서,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졌다.

    “우리 도련님 좀 예쁘게 봐 주면 안 될까? 해민 씨에게 너무 미안한 부탁인가?”

    “실장님은 좋은 분이세요.”

    이환은 내가 어떻게 판단 내리기 이전에 이미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다정한 사람이었고, 좋은 사람이었다. 딱히 내가 예쁘게 봐 주고 어쩌고 할 필요도 없이 이미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가 실장님 옆에 있기에 마땅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어요.”

    “왜 몰라.”

    “실장님이 말씀하시는 그 운명이라는 거요. 그게 진짜 나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어서요. 그 시간, 그 장소. 우연과 타이밍이 맞물려서 내가 있었을 뿐이지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상황이니까. ……내 것이 아닌 걸 욕심내는 게 두려워요.”

    누구도 나를 좋아해 준 적이 없어서, 누구도 나를 다정하게 대해 줬던 적이 없어서. 그래서 이환의 다정함에 기대고 싶은데, 그 다정함의 주인이 내가 아닐까 봐 겁이 났다.

    그래, 나는 무서웠다.

    망설임의 이유를 명확하게 인지하자 정체를 드러낸 두려움이 나를 가득 채웠다. 이환의 손을 붙잡는 순간, 끝이 없는 낭떠러지로 나를 떠밀 것 같았다.

    “그게 운명 아닌가.”

    두려움에 잠식되어 가는 나에게 여사님이 물었다.

    “하필이면 그 장소, 그 시간. 우연과 타이밍이 겹친 게 운명이 아니면 뭐가 운명이야. 누구라도 될 수 있다면, 해민 씨일 수도 있지. 왜 해민 씨 것이 아니라고만 생각해요.”

    “…….”

    “도련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운명은 별 게 아닐지도 몰라. 이렇게 해민 씨와 내가 마주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것도 운명이지. 우리가 삼계탕을 먹으려다 못 먹은 것도 운명이고. 결국 몸보신도 못 하고 복날을 그냥 보낸 것도 운명이네.”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켜 기어코 한 캔을 다 비우신 여사님이 크,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해민 씨 마음을 따라 움직여요.”

    마음을 따라.

    “네 것이네 내 것이네 계산하지 말고. 사람 마음에 이름표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누구 것이 어디 있어. 그냥 손잡고 싶으면 잡고, 뽀뽀하고 싶으면 뽀뽀하고, 연애하고 싶으면 연애하고 그러는 거지. 당장 손 붙잡고 식장 들어갈 날짜 잡자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대화가 갑자기 식장으로 튀는 거죠?

    “우리 도련님 좀 예쁘게 봐 줘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훅 들어온 청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어 버렸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처럼 무게 없이 시원하기만 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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