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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38)화 (38/172)
  • 38화

    당황하여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 이환이 웃으며 손으로 내 뺨을 쓸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요. 식사도 거르고, 병원 다녀온 뒤로 계속 잤다고 하던데. 아직도 많이 힘듭니까.”

    “많이 괜찮아졌어요. 신경 쓰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식사하시기 전에 먼저 씻으실래요?”

    날벼락 같았던 히트 사이클도 끝났고, 병원에 다녀와 상황 파악도 끝났다.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다시 업무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환은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조금 더 쉬어요. 오늘은 강제 휴가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제가 할 일은 해야…….”

    “지금 해민 씨가 할 일은 쉬는 겁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까 봐 걱정되거든요.”

    침대를 짚고 있는 손을 부드럽게 매만지던 이환이 그 손을 붙잡아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운 행동에 고부라드는 손가락 하나하나마다 입을 맞추는 이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빼냈다.

    “아…….”

    그는 아쉬운 얼굴을 했고, 내 표정을 힐끗 살피더니 이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처럼 “어, 어.” 하고 말을 더듬었다.

    “해민 씨?”

    수많은 생각을 했다. 이환을 마주하고, 그가 보일 반응을 수십 가지 정도 예상해 보기도 했다.

    모든 게 나 때문이라며 화를 내는 이환, 주제도 모른다며 나를 질책하는 이환, 급에 맞지 않는다는 듯 나를 무시하는 이환,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며 나를 쫓아내는 이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른 척하는 이환. 손쉬운 상대를 대하듯 나를 추행하는 이환.

    여러 이환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여전히 상냥하고 다정한 이환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 번 잤다고 연인인 척 착각하지 마, 라고 냉정하게 잘라 내는 재벌의 모습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봤는데. 한 번 잤다고 연인인 척 착각하는 재벌은 본 적이 없어서 낯설고 이상했다.

    “실장님.”

    “네, 해민 씨.”

    “일을 그만두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실장님은 아니라고 하셔도 명백히 제 잘못이 크니까요. 미리 받은 월급은 빠른 시일 내로 갚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왜 그런…….”

    “일을 계속하라고 하신다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실장님께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한 마음이에요. 업무에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해민 씨.”

    그러니까 이 일은 그냥 이렇게 덮어 달라고. 자를 거면 그냥 자르고, 옆에 둘 거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모른 척해 달라고.

    돌려 말하기는 했으나 그 속뜻을 이환이 파악하지 못하리라 생각되진 않았다. 그리고 이환은 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부담스럽습니까?”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환을 어떻게 봐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첫 경험이라고 유난을 떨기에는 남들도 한 번씩 거쳤을 일이고, 없었던 일처럼 모른 척하기엔 나 스스로에게조차 뻔뻔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원망스러워요?”

    “아뇨. ……제가 원망스러워요.”

    그동안 편하게 지내 왔던 여파가 이렇게 돌아오는 거다. 돈 받은 만큼 일을 해야 했는데 남의 돈 받으며 편히 먹고 지냈다고, 그 와중에 고용주의 마음을 두고 받아들이네 마네 하는 속 편한 고민이나 하고 있었다고. 결코 편한 길로 가는 꼴을 지켜보지 못하는 이 구질구질한 팔자가 어깃장을 놓는 거다.

    이환은 무슨 죄가 있다고 내게 휩쓸리게 만들었을까. 그냥 내 팔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일자리에서 쫓겨나게 만들 것이지.

    상황을 이렇게 만든 나 자신이 원망스럽고, 이환에게는 그저 미안하기만 했다.

    “해민 씨가 나를 밀어내고 외면한대도…… 나는 괜찮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을 확인받은 것만으로도 기뻐요.”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듯,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하고 다정했다. 선을 긋고 밀어내려 하는 나를 앞에 두고서도 이환은 변함없이 다정하기만 했다.

    “해민 씨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해민 씨를 안게 된 게 미안할 뿐입니다. 내 욕심을 채운 것 같아서. 그러니 혹시라도 해민 씨가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지 말아요. 내겐 아주 기쁘고, 소중한 경험이었으니까.”

    손끝을 살짝 건드린 이환의 손가락이 머뭇거리며 멀어졌다.

    “해민 씨가 원한다면, 이번 일은 내 기억 속에만 묻어 두겠습니다. 입으로 꺼내지도 않을 거고, 표를 내지도 않을 거예요. 해민 씨가 어머님을 찾아뵈었던 그 날 아침으로, 아니,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식사했던 저녁부터 다시 이어 가요.”

    그러니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죄책감을 가지지도 말고 부담 갖지도 말라고.

    이환은 나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피곤한 사람을 붙잡고 있었네요. 조금 쉬다가 내려와서 같이 저녁 먹읍시다.”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산뜻하게 등을 돌려 방을 나갔으나, 그의 뒷모습에는 감추지 못한 감정의 부산물들이 넘실거리는 듯했다.

    여전히 그가 다정해서 미안했다.

    여전히 그가 상냥해서 죄스러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히트 사이클, 러트 사이클 한 번 같이 보낸 것으로 이환에게 책임을 지울 수도 없고, 내가 이환을 책임질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이미 벌어진 일을 모른 척할 수도 없다. 이미 새겨져 버린 흔적을 덮어 둔다고 그게 진짜 사라질 리는 없으니까.

    좋아한다고 망설임 없이 말해 오던 이환을 떠올렸다.

    그때의 나처럼, 이번에도 나는 이환에게 명확한 답을 내어 주지 못했다.

    ∞ ∞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건, 결국 이환 때문이다.

    그래. 다 이환 때문이다.

    할 말이 많은 얼굴로 꾹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 시선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내게 요구하는 것도, 강요하는 것도 없는 그 남자는 제 속내를 꾹꾹 삼킨 채로 그저 나를 바라보고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이번 일이 있기 전에도 그러했다.

    단순히 어쩌다 한번 몸을 섞게 된 상대에게 보이는 가벼운 친절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내가 계약서에 지장을 찍고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아니, 일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그는 친절했고 다정했다.

    나는 그의 선의가, 호의가, 배려가, 염려가, 보살핌이 과분하다 여기면서도 좋았고, 껄끄러우면서도 기꺼웠다.

    나를 향한 그의 감정을 명백한 언어로 확인받았을 때에도, 타인의 낯선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색했고 어떻게 돌려주어야 할지 초조했다.

    내 마음을 확실히 하기도 전에 사고로 첫 경험을 겪은 이후에도, 변함없이 다정한 그를 마주하고 밀어내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모든 게 다 이환 때문이다.

    내가 오메가인 것도 이환 때문이다.

    아니, 원래 오메가이긴 했지만, ……이환이 아니었으면 오메가인 것도 몰랐다고.

    오메가는 뭐고, 히트 사이클은 또 뭐야. 심지어 평범한 오메가도 아니고, 평소에는 베타 같은 오메가였다가 페로몬 강한 알파가 옆에 있으면 일반적인 오메가가 된다니. 이게 무슨 선택적 지랄 같은 소리야.

    비어 버린 맥주 캔을 화풀이하듯 우그러뜨렸다.

    나 공돈 안 받았는데. 주겠다는 공돈도 마다하고 꾸역꾸역 미련하게 열심히 살았는데. 그런데 내 인생은 왜 이따위지?

    편한 일자리에 친절한 고용주. 공돈을 마다했다고 모처럼 좋은 일이 생긴 줄 알았다. 한 달 시한부 일자리이긴 했으나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랬는데…… 결국 이렇지, 뭐. 내 인생이 잘 풀릴 리가 있나.

    “해민 씨?”

    어두웠던 주방에 달칵, 불이 켜졌다.

    “아…….”

    의자에서 일어나며 여사님을 돌아보았다.

    “맥주 마시고 있었어요?”

    여사님은 내 손에 들린, 그리고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는 맥주 캔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냉장고에 있기에 꺼내 마시긴 했는데…….”

    “괜찮아. 내가 잠 안 올 때 한 캔씩 마시려고 사다 둔 거였거든요. 요즘 이 시려서 잘 안 마셨는데, 해민 씨라도 마셔 줘서 잘됐지.”

    이환이 사다 둔 게 아니라 여사님이 마시려고 사다 두신 거였구나. 나중에라도 다시 채워 둬야겠다.

    “그런데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술 마시는 건 좀 혼나야겠다.”

    “죄송합니다.”

    “잠이 안 왔어요?”

    “……네.”

    “그런 날이 있지.”

    괜찮다며 나를 도로 자리에 앉힌 여사님은 냉장고를 열어 마지막 양심으로 남겨 둔 맥주 두 캔을 마저 꺼내 오셨다.

    “한 캔씩 마시고 자면 되겠다.”

    그만 마시고 올라가라는 말 대신, 여사님은 빈 캔을 치우고 새 맥주 캔을 내게 건넸다.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

    “네.”

    “도련님이랑도 대화 잘했고요?”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했다.

    미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여사님이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우리 도련님이 해민 씨를 속상하게 했나요?”

    “아뇨. 실장님은…… 친절하시잖아요.”

    항상, 언제나 그렇듯 그 남자는 친절했다.

    차라리 이환이 사무적이었다면, 냉정했다면, 다정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고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내 마음이 이렇게 복잡할 일도 없었을 거고, 무엇을 고민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끙끙거리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제 고용이 보은성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이 높아서 좋게만 생각했는데, 실장님 처음 보고 알았어요.”

    많은 돈을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받았다. 물정 모르는 부자가 평균 시급을 알 리 없으니 이렇게 돈을 막 쓰는구나 생각도 했었는데, 정작 물정을 모르는 건 나였다. 상황도 모르고 그저 나 좋은 쪽으로만 생각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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