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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36)화 (36/172)
  • 36화

    아직 낮이구나.

    커튼을 활짝 젖히고 갑갑한 마음에 창문까지 열었다. 순간 밀려들어 온 더운 바람에 헉 하고 숨이 막혀 와 다급히 창문을 닫아야 했지만.

    비실비실 걸어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아직까지 엉덩이에서 흘러나오는 무언가를 느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엉망이 된 침대 시트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아……, 진짜 사고 쳤네.”

    그동안은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 뒤로는 몸이 정상이 아니어서 체감하지 못했는데. 정신도 몸도 조금 살 만해지니 현실이 훅 밀려오는 기분이다.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내일쯤이면 괜찮아질 거예요, 라고 이환이 말하기는 했으나 믿지 않았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진짜 괜찮아졌다. 그게 고용주와 붙어 뒹군 지 사흘이 지나고 나흘째 되는 아침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눈 뒤집혀 붙어먹은 대상이 고용주라는 점도 문제이다. 일요일 저녁 이후로 어제까지 고용주를 결근시켰다는 점도 문제이다. 지금 내가 정액으로 난장판이 된 고용주의 침대를 알몸으로 차지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모든 것이 문제투성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 첫 경험이 어이없게 이루어졌다거나 내가 오메가일지도 모른다거나 하는 사실은 충격적이긴 했지만 얼마든지 뒤로 미뤄 둘 수 있었다.

    욕 나오게 당혹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여사님을 어떻게 봐야 할지 혹은 오후에 퇴근하고 올 이환을 어떤 얼굴로 맞이해야 할지보다는 고민스럽지 못했다.

    삼 일 동안 한 거라고는 오직 그 짓밖에 없었다. 눈이 마주치면 들러붙어 뒹굴었고, 그나마 잠깐 정신이 돌아올 때에는 기력을 보충해야 한다며 이환이 떠 주는 죽을 받아먹었다. 먹고 그 짓을 하고 먹고 그 짓을 하고. 사람이 아니라 발정기를 맞은 짐승에 가까웠다.

    그 와중에 꼬박꼬박 챙겨 먹은 식사를 떠올리면, 여사님도 언제고 상황을 알아차렸다는 뜻인데. 식사를 챙겨 주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상상만으로도 암담해졌다.

    일단…… 병원에 가 봐야겠다. 이환은 내일 함께 가 보자고 했지만, 내일로 미룰 일이 아니었다.

    병원비가 아깝지만 내가 오메가인지 확실히 해 둘 필요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 상황에서 잠시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겨우겨우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

    ∞ ∞ ∞

    형질 검사는 동네 병원에서도 해 주기에 근처 병원을 검색해 찾아왔다. 간단한 문진과 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오는 데 한두 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병원 건물 일 층에서 밥까지 든든하게 먹고 온 참이었다.

    그래도 배를 채우고 밖을 돌아다니니 조금 살 만한 기분이 들었다.

    “서해민 씨. 들어오세요.”

    “네.”

    느릿느릿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진료실로 들어가자, 모니터를 보던 의사가 나를 보며 인사했다.

    “서해민 씨?”

    “네.”

    “검사 결과가 오메가로 나왔어요.”

    “……오메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구나.

    왜인지 힘이 쭉 빠지며 헛웃음이 나왔다.

    “검사는 처음이라고 하셨죠?”

    “네.”

    “고등학교 때 의무 검사 안 받으셨나요?”

    “고등학교를…… 안 나와서…….”

    기어들어 가는 내 대답에 의사가 저런, 하고 혀를 찼다.

    “개인적으로라도 받으셨어야죠. 의무 검사가 왜 의무 검사인데요. 근래 갑자기 발현한 건 아니고, 아마 2차 성징이 나타날 때 발현하셨을 거예요.”

    “지금까지는 멀쩡했는데요. 발현 증상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내가 오메가일 수 있느냐고, 진짜 오메가였다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몰랐던 게 말이 되냐는 물음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못했다.

    그저 답답하고 또 답답했다.

    “페로몬 같은 것도 맡아 본 적 없고, 히트 사이클? 그것도 온 적 없어요. 지금까지 진짜 멀쩡했는데…….”

    “서해민 씨의 페로몬 수치는 오메가들의 평균 페로몬 수치보다 훨씬 낮아요. 이 정도 수치라면 서해민 씨의 말처럼 평소 생활하면서 페로몬을 느끼기도 어렵고, 히트 사이클이 와도 모르고 지나갔을 가능성이 커요. 그냥 몸살 정도로, 혹은 오늘은 컨디션이 좀 안 좋네 하고 넘어가는 수준이죠.”

    “아…….”

    이환이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도 한두 달에 한 번씩은 몸이 축축 늘어지는 때가 있었다. 그때는 막연히 일이 너무 고되어 몸이 버티질 못하는 모양이다 싶었는데, 어쩌면 그게 히트 사이클의 증상이었던 모양이다.

    “검사 결과를 보니 이제 막 히트 사이클이 왔다 간 것 같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혹시나 하고 와서 검사를 받으신 거죠?”

    “네.”

    “평소에는 왔다 간 줄도 몰랐는데, 이번에만 히트 사이클이 왔다는 걸 느꼈나요?”

    “네, 갑자기 몸이 이상해져서.”

    내 대답에 의사가 흐응, 하고 미심쩍은 소리를 냈다.

    “이번 히트 사이클 기간에 무언가 변화가 있지 않았나요? 환경이 바뀌었다거나 주변에 새로운 누군가가 생겼다거나.”

    간단한 검사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나오는 건가. 아니면 의사라서 결과지만 봐도 답이 딱딱 나오는 건가.

    “새로 일하게 된 곳의 고용주가 알파라고 했어요. 그런데 페로몬이 남들보다 강하다는 말을 언뜻 들었는데, 혹시 그게 이유가 될까요?”

    “음, 우성, 열성 들어 본 적 있어요?”

    “…….”

    “요즘 페로몬의 수치에 따라 알파와 오메가를 우성과 열성으로 구분 짓자는 이야기가 학회에서 거론되고 있거든요. 신종 계층 구조를 만들 셈이냐, 비인도적이다 해서 아직까지 말이 많긴 하지만.”

    그걸 왜 지금 뜬금없이.

    “그 고용주라는 분을 우성 알파라고 하고 서해민 씨를, 아, 지금 이건 비하하는 게 아니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개념을 가져오려는 거니 오해하지는 말고요. 서해민 씨를 열성 오메가라고 한다면요. 아니, 그보다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의 페로몬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건 알고 있죠?”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듯 잠시 관자놀이를 짚었던 의사가 뒤늦은 질문을 했다.

    “대충만요.”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페로몬 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수치의 총합을 10으로 잡고. 평균적인 알파나 오메가의 페로몬 수치를 5, 열성을 1, 우성을 9라고 생각해 봐요. 열성에 포함되는 서해민 씨가 가지고 있는 페로몬 수치는 1. 일반 알파가 주변에 있다 하더라도 총합이 6이에요. 서로에게 어떤 작용도 나타나질 않죠. 그런데 여기서 우성 알파가 나타난다면? 아무리 열성이라 하더라도 총합 10이 되는 거예요.”

    1이 어떻고, 10이 어떻고. 나름대로 풀어서 설명해 주는 모양이지만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10이 뭐 어쨌다고요?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의사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설명 다 때려치우고 결론만 말하면, 옆에 우성 알파가 있으니 평소와 다르게 서해민 씨가 히트 사이클 증상을 일반 오메가처럼 체감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우성 알파 옆에 있으면 이번과 같은 일이 계속 일어난다는 뜻이고요.”

    “아…….”

    멍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다 퍼뜩 놀라 얼굴을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일을…… 그만둬야 하나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에요, 서해민 씨. 페로몬 강한 알파가 이 세상에 고용주 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을 그만둔다고 다른 알파와 부딪칠 일이 없겠어요? 또 페로몬 강한 알파를 만나게 되면, 그러다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하게 되면 어쩌려고요.”

    이미 안 좋은 일은 당했습니다만. 아니, 저질러 버렸습니다만.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히트 사이클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면 바로 억제제를 먹어야겠죠. 평소 서해민 씨라면 체감하기가 어렵겠지만, 옆에 그 고용주가 있다는 전제하에 히트 사이클이 온다면 알아차릴 수 있을 거예요. 이번에 히트 사이클을 체감했으니 어떤 느낌인지는 알죠?”

    “네.”

    “억제제를 항시 구비하고 다니다가 이성이 사라지기 전에 먹도록 해요. 그것밖에 답이 없어요. 환자들에게 늘상 하는 말이지만, 본인 몸은 본인이 챙겨야 해요. 특히나 오메가들은 더더욱. 페로몬 관련 법안은 애매하기 때문에, 히트 사이클 기간에 알파에게 억지로 당해도 항의하기가 어려워요. 오히려 당하고 나서 고소까지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고요.”

    그렇죠. 법안뿐만 아니라 지금의 제 상황도 매우 애매합니다.

    “억제제는 약국에서 판매하고 있으니, 거기서 구입하시면 될 것 같고. 오메가 관련된 성교육 책자를 읽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네.”

    이걸로 진료는 끝이라며 홀가분하게 나가 보세요, 라는 축객하는 소리를 들었다. 진료실을 들어올 때보다 더 늘어진 어깨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 ∞ ∞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여길 다시 기어들어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까 도망치듯 몰래 나왔는데. 그사이에 여사님이 이환의 침대 시트를 봤을까. 보셨겠지. 정액으로 범벅이 된 그 시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거라도 수습을 하고 나왔어야 했다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도망칠까.

    휴대폰과 지갑은 가지고 있으니까. 통장이야 새로 발급받으면 되고, 여기 올 때 가지고 온 옷가지는 전부 낡은 것들이라 아까우면서도 아깝지 않았다.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선금으로 받은 월급인데. 일해서 나중에 갚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쪽 상황을 걱정해서 미리 월급을 준 사람들 뒤통수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책임감 없는 쓰레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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