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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31)화 (31/172)
  • 31화

    일말의 의심이나 의문도 없이 자신의 감정에 확신하는 사람처럼, 그 확신을 나에게 전달하려는 듯, 이환은 그렇게 ‘좋아해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내게 보내 오는 시선, 목소리, 몸짓, 나를 향한 배려. 그의 모든 것들이 명확하게 그의 속마음을 내보이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입으로 정의 내리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사람답게 간사하게 살아.」

    문득 박 씨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해민 씨를 아주 좋아해요.”

    이환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내가 간사해져야 할까요. 그래야 하는 순간이 지금일까요.

    이환의 고백에 한마디만 하면, ‘네’ 혹은 ‘좋아요’ 한마디만 내뱉으면 편안함과 안락함과 부귀로움이 따라붙을 것을 알고 있다. 이환은 제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넉넉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못 하겠어요.

    나는 박 씨 아저씨에게, 눈앞의 남자에게, 그리고 나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환이 내보이는 감정을 쉽사리 받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환이 운명이라 생각했던 그 상황은 그저 타이밍의 문제였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고, 누구라도 이환을 구해 줄 수 있었다. 누구라도 이환의 운명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갖는 순간, 더 큰 것을 빼앗긴다.

    이환이 보내오는 호의보다 더 큰 무언가가 내게 남아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내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는 결말이 눈앞에 그려졌기에.

    그래도…… 이환이 보내오는 작은 호의 정도는 받아도 되지 않을까. 그 정도 이기심은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난생처음 받아 보는 타인의 대가 없는 호의는 내게 그런 욕심을 가지게 했다.

    「간사하게 살아.」

    박 씨 아저씨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그 말이 마치 나의 간사한 마음을 질책하는 듯했다.

    결국 나는 이환에게 어떠한 답도 돌려주지 못했다.

    7.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점심을 먹고, 서재로 들어가는 이환을 보며 나 역시 방으로 돌아왔다.

    물어보지 말 걸 그랬어. 대답이라도 확실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러다 문득 어떤 대답을 했어야 옳았던 것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애초에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만 남았다.

    축 늘어지는 몸을 침대에 뉘었다.

    유난히 더운 날씨도 아니었는데, 태양 아래에서 조금 걸어 다녔다고 지친 모양이다. 요 며칠 차에 타서 이동하고 내내 시원한 실내에 있었다고 몸이 엄살을 부리기라도 하나. 어쩌면 복에 겨워 냉방병에 걸린지도 모르겠다.

    살짝 열이 오르는 듯 피부에 열감이 느껴졌다. 이마도 뜨끈뜨끈하고, 두통처럼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도 하다.

    손발은 무겁고, 무기력함이 몸을 통제했다. 시체처럼 침대에 가만히 엎드려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니, 밝았던 하늘에 서서히 노을이 내렸다.

    돈을 받고 일하면서 이렇게 여유로워도 될까.

    일주일 동안 일하면서 알게 된 건 그의 아낌없는 호의와 하는 일 없는 내 모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환이 정말 잔심부름을 시킬 사람을 구한 것 같지는 않았다. 감사 인사를 하겠다고 해도 만나지 않으려 하니, 아무래도 보은성 고용을 시킨 게 아닐까. 혹은…… 내가 좋아서…….

    왠지 생각만으로도 간지러워지는 기분에 뺨을 긁고 싶은데 손은 움직이고 싶지 않고.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문질러 보지만 그럼에도 가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민 씨.”

    “네, 여사님.”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침실 한구석을 응시하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여사님이 나를 불렀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주자 여사님이 나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저녁 거의 다 됐어요.”

    “저녁이요?”

    조금 전에 점심 먹고 들어왔는데 왜 저녁을…….

    그러다 어두워진 창밖을 보며 내가 가만히 누워 반나절을 그냥 흘려보냈음을 깨달았다.

    “잠깐 눈 붙였어요? 피곤한 얼굴이네.”

    “아……, 그런가 봐요.”

    눈 뜨고 자기라도 했나 봐요.

    분명 치열하게, 아니, 치열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심도 있게 현 상황에 대해 고민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리된 것 하나 없는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고, 소화도 되지 않았건만 밥 먹을 시간이 되어 있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얼굴색이 안 좋은데.”

    “그냥 조금…… 몸살기가 있나 싶어요.”

    “저런, 어쩌다. 저녁 먹으면 약 챙겨 줄 테니까, 그거 먹고 푹 자요. 마침 닭도 잘 익었으니까, 땀 쭉 빼면 되겠네.”

    “저녁은 닭이에요?”

    “삼계탕. 복날이 세 번인데, 그중 한 번은 먹어 줘야지. 보양식이야 많지만, 왠지 삼계탕을 안 먹고 넘어가면 영 아쉽더라고요.”

    그렇지. 복날엔 뭐니 뭐니 해도 삼계탕이지. 푹 익은 닭고기에 한약 냄새 잔뜩 밴 진한 육수, 쫀득쫀득한 찹쌀밥까지. 그거 한 그릇 먹으면 왜인지 힘이 나는 기분이 들곤 했다. 비싸서 내 돈 내고 사 먹지는 못하지만, 가끔 운이 좋으면 고용주들이 복날이라고 한 번씩 제공해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해민 씨, 지난 복날에 닭 먹었어요?”

    “아뇨.”

    “말복까지 안 지나서 다행이야. 우리 이거 먹고 몸보신해요. 해민 씨는 너무 말라서 좀 많이 먹어야 해.”

    고용이 며칠 늦어졌으면 말복도 그냥 보낼 뻔하긴 했다. 너무 마른 건 아니지만, 삼계탕은 탁월한 선택이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 데리고 얼른 내려가요.”

    “실장님 서재에 계세요.”

    아까 들여보내서 알고 있다며 서재로 향했는데, 그곳에 있어야 할 서재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어……, 안 계시는데요?”

    “침실에 계시나? 도련님이 낮잠 주무시는 분은 아닌데.”

    여사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환의 침실 문을 열었다.

    순간 짙은 풀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독성이 있는 풀을 만졌을 때처럼 피부가 따끔거렸다. 열감이 느껴지는 팔뚝을 손으로 쓸자, 내 피부가 아닌 것처럼 이질적인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침대에 누워 있는 이환을 보고 여사님이 뛰듯이 다가갔다.

    “실장님 아프신 거예요?”

    낮잠을 자나 싶었는데, 엎드려 누운 이환의 옆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이 양반 몸뚱이가 아플 몸뚱이는 아니지. 왜 갑자기 이 난리람.”

    낑낑거리며 이환의 몸을 뒤집어 바로 누인 여사님이 땀으로 젖은 그의 이마를 손으로 훑었다.

    “구급차 부를까요.”

    여사님에게는 죄송하지만 혹시 점심 먹은 게 잘못되기라도 했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뭔가 좀 이상한 것 같다.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피부가 풀독이 오른 것처럼 따끔거리더니 이제는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강도가 세졌다. 몸살 기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순간 열 기운이 솟구치며 전신이 뜨겁고,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건…… 식중독인가. 아니면 피부병? 전염병?

    그러기엔 여사님은 너무 멀쩡해 보이는데.

    “아냐, 아냐. 일단 나 좀 따라와요.”

    여사님이 내 손목을 붙잡고 이환의 침실을 나섰다.

    “약이 어디 있을 텐데.”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데요?”

    “알아요. 병이 아니라 러트가 왔나 봐.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러트 사이클이라니, 이상하네.”

    “러트요?”

    “응, 알파들만 겪는 거 있잖아요. 그거. 오메가들은 그나마 히트 사이클이 규칙적으로 오니 조심해야 할 시기를 대충 짐작하는데, 알파는 대중없어서 이게 뭔 지랄인가 싶다니까. 언제 올지 모르니 영향 있다 싶은 건 미리 조심하는 게 전부지.”

    “미리 준비하면 안 생겨요?”

    “그냥 경우의 수를 줄이자는 뜻이에요. 히트 온 오메가가 특히나 위험하거든. 옆에서 살짝 흘린 페로몬만 맡아도 재수 없으면 러트가 올 수 있으니까. 그런 거 생각하면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사람들도 참 고생스러워.”

    그렇게 한탄하며 거실 서랍장 여기저기를 뒤지던 여사님이 찾던 약을 발견했는지 조금 안도한 얼굴을 했다.

    “다행이야.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혹시나 늙은이 정신에 착각했나 했지.”

    아니면 급하게 약국으로 뛰어갔을 뻔했다며 여사님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억제제예요. 해민 씨가 약이랑 물이랑 가져가서 도련님 좀 먹일래요? 난 아무래도 도련님 죽을 끓여야 할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인 게 뼈만 발라내고 살 찢어서 살짝 끓이면 삼계죽이잖아.”

    “네, 그럴게요.”

    “미안하지만 도련님부터 먹이고, 우리는 좀 천천히 먹어요. 갑자기 이게 웬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약 가지고 올라가 볼게요.”

    “그래요.”

    주방에서 물을 챙겨 위층으로 올라갔다.

    알파니 오메가니, 말은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부딪힐 일이 없어서 별생각이 없었다. 고용되면서 이환이 알파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지금껏 같이 있으면서도 역시나 실감하지 못했었다.

    그랬는데 이 난리로 확 와닿네.

    그 러트인지 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쓰러져 있는데 정작 아픈 건 아니라니. 정말 병원에 데려가지 않아도 되나. 억제제라는 이 알약 하나로 충분할까. 혹시라도 다른 병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까부터 따끔거리는 피부와 몸에 퍼지는 열기, 발작하듯 두근거리는 심장과 멍해지는 머릿속이 아무래도 신경 쓰였다.

    이환이 러트라면, 그럼 나는 왜 이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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