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29)화 (29/172)
  • 29화

    “넓긴 넓네요. 이 정원은 양쪽 사람들이 같이 쓰는 거예요?”

    위쪽 구역에 시큐리티 건물이 담벼락에 바짝 붙어 있고 회장님 내외가 거주하신다던 건물이 정원의 중앙에 널찍하게 자리했다면, 아래쪽 구역에 위치한 집 두 채는 정원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자리해 있었다.

    정원이 넓어진 건 좋지만, 사이가 좋지 않은 입장에서 정원을 같이 사용하기엔 불편하지 않을까.

    “정원 쓸 일이 뭐 얼마나 있다고요. 형네 아이들만 가끔 나와서 노는 정도이지, 나머지는 그냥 눈으로만 봅니다.”

    하긴, 정원이란 조경의 의미에 가깝지, 다 큰 나이에 정원에서 뒹굴며 노는 목적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넓은 정원을 한 바퀴 천천히 걸으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낮과 밤의 경계에 선 어스름한 시간에 넓은 정원을 걷고 있노라니 나와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움이라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이래서 사람들이 넓은 정원이 있는 집을 원하는구나.

    내 집이 아님에도 잠시간의 여유는 편안했다.

    “환아.”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이정과 그의 부인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정원을 둥글게 걷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 이정이 이환을 불렀다.

    “이리 잠깐 와 봐.”

    들어 올린 손을 크게 까닥이며 이환을 불렀으나 그는 본척만척했다.

    “실장님. 저기서 형님이 부르시는데요.”

    “나도 보이네요.”

    “안 가 보세요?”

    “용건 있으면 자기가 오겠죠.”

    “……그렇구나.”

    평생을 남의 말에 따라온 나는 당장 달려가야겠다는 생각부터 드는데, 당연히 용건 있는 사람이 와야 한다는 이환의 마인드가 새로웠다.

    이환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기준일까, 아니면 SG 그룹 회장님의 아들이라는 위치가 만들어 낸 기준일까.

    이환이 회장님의 아들이 아닌 평범한, 혹은 나처럼 평범 이하의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지금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문득 그런 쓸모없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 환이. 형이 부르는 소리 못 들었어?”

    아내를 먼저 들여보내고 이환에게로 다가온 이정이 장난스럽게 타박을 했다.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와야지, 왜 산책하는 사람을 불러.”

    “형이 좀 부를 수도 있지.”

    똑같이 웃는 얼굴에 똑같이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식사 자리에서 이수희에게 말하던 어조와는 확실히 달랐다.

    “형이 줄 거 있는데. 잠깐 같이 가자.”

    “가져와.”

    “해민 씨 선물이니 환이가 가져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왜 갑자기 내 선물이 나와?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잠시 고민하던 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민 씨, 같이 갈까요?”

    “해민 씨 힘들게. 얼른 가서 가져오면 되지.”

    생각해 주는 듯 말하지만 내 출입을 묘하게 거부하는 뉘앙스였다. 낯선 타인을 집에 들이는 데에서 느끼는 거부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이환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볼일 보고 오세요.”

    “그럼 금방 오겠습니다.”

    “정원 구경 좀 하고 있어요, 해민 씨.”

    미묘하게 웃던 이정이 이환을 데리고 그의 거처로 향했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남은 커피를 홀짝이며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야.”

    “…….”

    “야!”

    낯선 남자가 불쑥 나타나 내 앞을 가로막을 때까지는 자유롭고 편안한 산책이었다.

    설마…… 이 상황을 예상하고 그리 미묘하게 웃었던 건 아니겠지.

    이환과 이정이 사라진 방향을 멀거니 바라보자 “내 말 안 들리냐?” 하고 신경질적인 물음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안녕 못해. 너 환이 형이랑 같이 지낸다며?”

    정상이 아니기에 가까이 오면 피하라고 이환이 경고한 그의 이복 남동생의 등장이었다.

    무언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은 흉흉한 기색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둥이라서인지 이수희와 닮은 얼굴의 남자는 그녀보다 조금 선이 굵은 미남이었다.

    이 집 자식들은 하나같이 잘생겼네.

    회장님도 늙긴 했지만 잘생기셨었지. 재혼한 사모님도 미색이 뛰어나셨고, 이환이나 이정을 생각하면 돌아가신 사모님도 분명 아름다우셨으리라.

    자식들이 다들 예쁘고 잘생긴 건 우연이 아닌 모양이다.

    “형 구해 준 건 고맙다. 그런데 형한테 달라붙는 건 안 고맙네. 사례금도 거절했다며. 목적이 뭐야?”

    “이유가 중요한가요?”

    “당연히 중요하지.”

    떡하니 팔짱을 끼고 껄렁한 자세로 선 그는 나를 고압적으로 내려다보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형한테 목적이 뭔지도 모를 놈이 붙어 있다? 나는 그 꼴 절대 못 봐.”

    못 보면 어쩔 건데. 눈을 감고 있는 것밖에 방법이 있나.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언변이 뛰어나서, 세 살짜리 아이도 이보다는 논리적으로 우길 것이다.

    “……실장님을 좋아하시나 봐요.”

    “우리 형인데 당연하지!”

    이건 좀 의외네.

    이수희는 이환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듯 보였는데, 남동생 쪽은 이환을 꽤 따르는 모양이다.

    “왜요?”

    “왜라니.”

    하, 하고 헛웃음을 내뱉은 그는 “당연히!” 하고 소리를 높였다.

    당연히 가족이라서? 당연히 형이니까? 뭐 그런 대답을 예상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존나 멋있으니까.”

    “…….”

    “같은 남자가 봐도 존나 멋있잖아. 서른 넘어서도 요정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당당함. 누가 그렇게 세상의 시선에 반기를 들면서도 당당할 수가 있겠냐고.”

    “…….”

    “능력도 있고 회사 일도 잘하니까, 다른 놈들이 사적인 영역으로는 나불거리지를 못하잖아. 존나 카리스마 있어.”

    “…….”

    쌍둥이 남매의 나이가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많아 보였다. 이십 대 초중반은 될 법한 남자의 말을 들으며 심각한 고민을 떠올렸다.

    얘는 중이병일까, 그냥 또라이일까.

    얘가 이환을 좋아하는 이유는 비슷한 또라이에게 느끼는 동질감일까, 저보다 더한 또라이이기에 가지는 선망일까.

    이환이 얘를 싫어하는 이유는 계모의 아들이기 때문일까, 그냥 동족 혐오일까.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졌다.

    “너 형한테 돈 뜯어낼 생각이라면 얼른 꺼져라. 형 눈에 뭐가 씌어서 널 데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 안 믿어. 내가…….”

    “해민 씨.”

    이정이 이환을 빨리 놓아주었는지, 건물에서 나오던 이환이 이쪽을 보고 나를 크게 불렀다.

    “내가 너 지켜본다.”

    의미심장한 경고를 남긴 남동생이 이환을 슬쩍 보고는 얼굴을 붉히며 줄행랑을 쳤다. 멋있어서 좋다는 형을 마주하기엔 마냥 부끄러운 모양이다.

    “해민 씨? 이수영이 뭐라고 했습니까?”

    “네?”

    “정상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무슨 해코지라도 당했습니까?”

    정상이 아니라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래 봤자 이환에 비하면 귀여운 남동생의 질투 정도였는데.

    나는 고용주를 앞에 두고 잠시 불순한 생각을 했다.

    “……아뇨. 그냥 안부 인사였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놀랐습니다.”

    “무슨 일은요. 그보다 금방 나오셨네요.”

    “네. 선물이라고 해서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했나 했는데, 별거 아닌 모양입니다.”

    덜렁덜렁 손에 들고 온 쇼핑백을 내게 내밀며 이환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수영이 말 붙일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알고 일부러 엿 먹어 보라고 이환을 데려간 게 아닐까 의심을 했는데, 선물은 진짜였나 보다.

    “뭔데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얘기를 안 해 주더군요.”

    “열어 볼까요?”

    궁금한 마음에 쇼핑백 안에 곱게 포장된 상자를 흘깃거리며 묻자, 이환이 정원 한쪽에 놓인 나무 벤치로 나를 안내했다.

    벤치에 앉아 쇼핑백에서 상자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포장지를 뜯으니 역시나 고급스러운 상자가 나왔다. 반으로 접힌 두툼한 케이스를 위로 들어 올리자, 약간의 탄력감이 느껴지며 상자가 입을 벌렸다.

    “……음.”

    엄청나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계였다. 쇠라고 보기엔 광택이 예사롭지 않은 은빛의 시곗줄. 그리고 시계에는 큐빅 같은 작은 보석이 숫자를 대신하여 박혀 있었다.

    아무리 가치를 모르는 형편없는 눈이라고 해도 이게 예사 물건이 아님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예쁘고 고급스럽고 비싸 보였다. 비싸 보였는데…….

    “여성용이네요.”

    “그러게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상자와 함께 들어 있는 카드를 발견하고 펼쳐 보았다.

    [9번째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며]

    카드는 편지와 달라 구구절절한 말보다 임팩트 있는 한마디만 적는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너무 한마디 아닌가. 감동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형식상의 멘트인데.

    “부회장님 결혼기념일이신가 봐요.”

    “그런가 보네요.”

    “선물 잘못 주신 걸까요.”

    “것보단 카드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을 겁니다.”

    형의 비서가 참으로 꼼꼼한 성격이라며, 이환은 상자를 닫아 카드와 함께 쇼핑백에 거칠게 쑤셔 넣었다.

    역시 선물은 그냥 핑계였겠구나. 이수영과 마주칠 시간을 벌어 주려고 굴러다니는 선물을 잡히는 대로 준 모양이다. 겨우 그런 이유로 던져 주기엔 과하게 값이 나가는 선물이었으나, 결혼기념일 선물에 연연하지 않은 것처럼 가격 또한 이정은 신경 쓰지 않을 듯했다.

    “돌려 드려야겠어요. 포장지를 뜯어서 걱정이네요.”

    “그냥 대충 던져 주고 오면 됩니다.”

    이환은 내 손을 붙잡고 엄지로 손목 안쪽을 느리게 문질렀다. 얇은 피부 위로 옅은 열감이 번졌다.

    “해민 씨 손목에 아무거나 채울 수는 없죠.”

    “…….”

    “해민 씨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골라 오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시간은 휴대폰으로 확인해서 시계 필요 없어요.”

    이러니까 꼭 선물을 바라는 사람 같잖아.

    괜찮다고 손을 내젓는데도 이환은 손목의 둘레를 재 보듯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말아 내 손목을 감쌌다.

    “해민 씨, 많이 먹어야겠네요. 손목이 너무 가늘어서 바람만 불어도 부러질 것 같습니다.”

    그 손목으로 설거지 알바도 하고, 막노동도 하고, 연장질도 했었습니다.

    의외로 통뼈라며 손에 빡 힘을 주었지만, 이환이 흔드는 대로 펄럭펄럭 흔들리는 손은 그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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