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시간도 못 맞춰 와 놓고, 가족 식사 자리에 외부인까지 데려오는 건 대체 무슨 경우야.”
예상처럼 식사 시간에 늦어 버린 탓에 인사고 뭐고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식탁 앞으로 안내되었다. 문 앞이나 거실에 떨궈 두고 가면 좋으련만 굳이 식당으로 끌고 가서 제 옆자리에 앉혀 놓는 이환의 행동에 밥까지 받아 버렸다.
젓가락은 쥐었지만 과연 이걸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와중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표나지 않게 눈동자만 굴려 그녀를 힐끔거렸다.
거리를 다니면 남자들의 시선을 받을 법한 미인. 관리를 받아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에 화장이 잘 먹힌 얼굴. 흠잡을 곳 없는 이목구비는 빼어났고, 쫙 편 어깨는 당당했다.
이환과 닮은 구석이 없는 듯 보였으나 깊은 눈매만큼은 흡사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이환과 이정이 묘하게 닮은 듯 보이면서도 눈매만큼은 닮지 않았던 점과 또 다른 차이였다.
“수희는 해민 씨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구나. 손님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불청객이죠. 그리고 가족 식사 자리에 손님은 안 부르는 거 아니었어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이환의 형, 이정에게 수희라 불린, 이복 여동생으로 짐작되는 여자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환이를 구해 준 귀한 손님인걸. 가족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사례금 받았을 거 아녜요. 뭐 좋은 일이라고 단체로 감사 인사까지 해요.”
“그럼 좋은 일이 아니란 뜻인가? 수희는 그냥 환이가 죽는 게 더 좋았다는 말이구나.”
“아니, 왜 말을 그딴 식으로…….”
계모와 이복동생들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는 듯하던 이환과 달리 이정은 사이가 좋은가 했는데. 조곤조곤 부드럽게 다독이나 싶던 이정의 대사가 조금 미묘했다. 그걸 나만 느낀 게 아니었는지 새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이수희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만해.”
“아, 왜. 엄마는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내가 뭐 못 할 말 했어?”
“아무튼 조용히 해.”
파르르 성을 내는 딸의 팔뚝을 꼬집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회장 사모님이 힐끗 이정과 이환의 눈치를 살폈다. 의도치 않게 그 모습을 목격하고 나는 시선을 내렸다.
“그래, 밥 먹을 때는 조용하자. 이런 사사로운 일에도 감정을 숨기지 못하면, 큰일은 어떻게 하려고.”
조용히 밥을 먹고 계시던 회장님까지 한마디를 더했다. 이수희는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삐죽거렸다.
“그렇다고 내가 넙죽 엎드려서 비위 맞춰 줘야 해요?”
“비위를 맞추란 얘기가 아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감정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쯧, 혀 차는 소리에 이수희가 꾸지람을 들은 아이처럼 찔끔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 환이를 구해 주었다고?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던가.”
이 상황에 아무 말도 안 하기는 뭐했는지 회장님이 나를 보며 물었다.
“감사 인사는 받았습니다.”
내 대답에 그는 이정과 이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백 마디 말보다 많은 뜻이 담긴 듯한 시선에 이정이 나를 보며 픽 웃었다.
“사례는 거절했다네요.”
“왜. 내 아들 목숨 구해 준 값이 적지는 않을 터인데.”
목숨값.
적지 않았을 그 돈.
이렇게 놀면서 월급을 받고 있노라면 그 돈을 받은 것과 무엇이 다른지 가끔 고민되긴 하지만, 그래도 받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던 공돈.
“대가를 기대하고 한 일은 아니라서요.”
“자기 몫은 자기가 챙겨야 하는 법인데. 영 야물지가 못한 모양이구먼.”
“해민 씨가 착해요.”
“요즘 착하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욕이다. 착해서 이용해 먹기 좋다는 뜻이지.”
“해민 씨는 그냥 착해요.”
인간 불신에 걸린 듯한 회장님에게 맞서며 이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요즘 환이 녀석 옆에서 잔심부름을 해 주고 있다고?”
“네.”
“보수는 어떤가.”
“분에 넘치게 받고 있습니다.”
“한 번에 땡겨 받는 대신 장기적으로 뜯어먹으려는 모양이네. 큰 그림 그리셨나 보다.”
중간에 툭 끼어든 이수희가 빈정거리며 지적했다.
“돈 많은 남자 뜯어먹으려고 큰 그림 그린 사람을 앞에 두고, 제 엄마 욕하는 꼴이라니.”
대기업 회장님 가족이 이구동성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수희처럼 적대적인 태도 또한 예상하지 못했다.
난데없는 공격처럼 느껴지는 이수희의 날 선 비난에 놀랐는데, 거기에 더해 타인에게 공격적으로 말하는 이환의 태도에 더욱 놀라 버렸다.
이 타이밍에 전형적인 악역의 계모처럼 날카롭게 쏘아붙여야 하는 회장 사모님은 정작 이환과 이정의 얼굴을 훔쳐보며 조용히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해 의아한 마음도 들었다.
“뭐라고요? 지금 말 다 했어요?”
이환의 말에 이수희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지만, 이환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해민 씨.”
“네?”
“그러고 있지 말고 많이 먹어요. 분위기는 개판이지만 음식은 맛있어.”
난장판이 된 주변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이정이 눈을 휘어 웃으며 내게 식사를 권했다.
이 분위기에서 무얼 먹든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듯한데. 하지만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밥그릇을 비워야 했다.
“아버지.”
“왜 그러냐.”
“해민 씨에게 고맙다고 하세요.”
생뚱맞은 타이밍에 터진 이환의 생뚱맞은 요구에 회장님이나 나나 눈만 땡그랗게 떴다.
“내 목숨 구해 줬는데 안 고마워요?”
“……그래. 고맙구나. 고맙네.”
“아닙니다.”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었으나 일단 받긴 받아야 했다. 절이든 감사 인사든 일단 받고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거봐요, 해민 씨. 다들 고마워할 거라고 했죠?”
아니, 지금 댁이 댁 아버지에게 감사를 강요하는 모습을 두 눈을 봤는데 그런 말을 한다고?
할 말이 많았으나 일단 참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냥 참는 듯했다. 이수희만이 유일하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으나, 역시나 그녀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식사 시간 분위기가 영 이상하네.
누가 또 말을 붙일까 무서워 우걱우걱 밥을 입에 밀어 넣으며 상석에 앉은 회장님, 왼쪽에 앉은 이정과 그의 부인, 이환, 회장님의 오른쪽에 앉은 회장 사모님과 쌍둥이들을 표나지 않게 훑어보았다.
역시나 이상한 가족이다.
∞ ∞ ∞
“커피 한 잔 마시고 갈까요?”
저녁 식사도 코로 먹었는지 입으로 먹었는지 모르게 정신이 없었는데, 차까지 마시자니. 내일 세상이 무너진다는 말을 들었어도 이보다 더 두렵지는 않을 듯했다.
내 대답을 듣지 않고 주방에서 커피 두 잔을 얻어 온 이환이 자연스럽게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장님?”
“아까 못 했던 집 구경이나 하죠.”
내게 잔 하나를 건네며 이환이 해맑은 얼굴로 웃었다.
식사 시간 보였던 낯선 모습은 마치 꿈인 듯 자취를 감추고 어느새 평소의 이환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아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요. 그것보다 더 보람차게 시간을 보내고 싶네요.”
“보람차게?”
“네, 보람차게 해민 씨 안내자 역할.”
이러면 안 되지만 불편한 장소에 있다가는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밥이 체할 성싶어 모른 척 이환의 뒤를 따랐다. 저택을 나와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두워져 가는 하늘 아래 일찌감치 켜진 정원 조명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분위기가 별로 안 좋죠?”
“네?”
“식사 자리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자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언제나 그러했듯 아버지의 자기만족이겠지만.”
“…….”
남의 가족에 대해 섣불리 말을 더하기가 애매하여 입을 다물었다.
“다행이죠?”
“……?”
“다들 요정님을 못 알아봐서요.”
그러게. 참 다행이다.
식사하는 도중 이환의 입에서 요정님 발언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얼마나 다행인지, 하늘에 감사해야 했다.
“어쩌면 나만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요?”
걸음을 멈춘 이환이 나를 마주 보고 가만히 시선을 마주했다.
“내 요정님이니까.”
“…….”
“내 요정님, 내 운명.”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눈앞이 어두워졌지만 나를 감싸는 시선은 여전히 따스했다.
“다른 사람들이 내 요정님을 알아보고 훔쳐 갈까 걱정됩니다.”
“그럴 일…… 없어요.”
“다들 욕심낼 거예요.”
“아니에요.”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저도요. 제가 요정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수치스러워서요.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켰다. 고용주님의 동심을 지켜 주기가 너무나도 힘겨웠다.
“앞쪽에 계단 조심해요.”
시기적절한 이환의 염려에 감았던 눈을 떴다.
“계단을 내려가면 형 부부가 사는 건물과 쌍둥이들이 사는 건물이 보일 겁니다.”
방금 무슨 이야기가 오갔냐는 양, 주변 건물을 설명하는 이환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벽이 없는 대신 대충 계단과 정원수로 경계를 대신 하고 있어요.”
부지에 약간의 경사가 있는 탓에 회장님 내외가 머무는 건물과 자식들이 사는 건물은 높이 차이가 있었다.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자 넓은 정원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각기 다른 모양의 건물이 나타났다.
“왼쪽이 형 부부가 사는 건물이에요.”
“아까 옆에 있던 분이 형수님이죠?”
“네. 그리고 저쪽 건물이 아까 봤던 쌍둥이들이 머무는 곳.”
싸가지 없다는 여동생과 정상이 아니라는 남동생이었지.
지극히 주관적인 이환의 평가였기에 맹신하지는 않았으나, 식사 자리에서 겪은 여동생의 성격이 평범 이상이었던 건 확실했다. 다만 남동생은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밥만 먹은 터라 존재감이 미미했기에 어떠하다 판단하기가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