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27)화 (27/172)
  • 27화

    토요일 저녁.

    나는 결국 자동차 뒷좌석에 이환과 나란히 앉아 그의 본가로 향하고 있었다.

    아주 가끔 외근 나가는 일을 제외하면 거의 이환의 집과 회사를 오가기만 했기에, 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향하는 길이 어색했다.

    “해가 떠 있는 오후에 집을 나서니, 왠지 늘어지네요.”

    다른 때였다면 그 느긋함에 동조했을지도 모르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긴장감과 부담감으로 가득 찬 내게 느긋함이나 여유로움이 차지할 부분은 조금도 없었다.

    “역시 슈트도 잘 어울립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평소 회사에 갈 때처럼 옷을 챙겨 입은 나를 보고 여사님이 적극 추천하여 슈트로 갈아입었다.

    예쁘게 입는 것도 좋지만, 격식을 챙겨야 하는 자리도 있는 법이라고. 그런 격식을 챙겨야 하는 자리에 굳이 나를 동행시켜야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옷장을 뒤적이는 여사님의 손길이 자못 전투적이어서 자연스럽게 입이 다물어졌다.

    밝은 색상의 슈트마저 제외하고, 정장 하면 떠오르는 기본 네이비 컬러의 슈트와 와이셔츠를 챙겨 입었다. 검은색과 회색 스트라이프 넥타이로 약간의 가벼움을 더했으나, 그거야 보는 사람의 입장이고 입고 있는 나는 불편해 죽을 것 같았다.

    딱 한 번 입어 보고 안 좋은 경험 탓에 옷장에 봉인해 두었던 슈트를 이렇게 다시 입게 되었지만, 전혀 좋지 않았다. 옷은 여전히 불편했고, 상황에 따른 마음은 그보다 더 불편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잠깐 딴생각이 나서요. 죄송합니다.”

    “딴생각할 수도 있지. 죄송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런 일로 사과하지 말아요.”

    무슨 그런 일로 사과까지 하냐며 이환이 손을 내저었지만, 고용주를 옆에 두고 딴생각을 하는 건 확실히 잘못이었다. 그러다 고용주의 기분이 상하면 욕설을 들어 먹는 일은 기본이고, 손찌검을 당하거나 일을 잘릴 수도 있는 문제인데.

    이런 점에서만큼은 이환이 너그러운 고용주라 다행이었다.

    “회사 가는 게 아니니 조금 풀어져도 됩니다. 밥 먹으러 가는 거니 그냥 놀러 간다 생각해요.”

    놀러 간다고 생각하기엔 SG 그룹 회장님 집이 놀이터는 아니지 않나요.

    일단 입고 있는 옷부터 편하지 않았고, 편하게 생각하고 싶어도 생각할 수 없는 스케일인지라 부담감만 더해졌다.

    “왠지 오붓한 느낌도 들고, 드라이브하는 기분도 들고.”

    “아, 네.”

    이쪽은 마음이 불편해 죽을 것 같은데, 저쪽은 마냥 신이 나는 모양이다.

    “저녁 먹으러 가지 말고 드라이브나 할까요. 가다가 괜찮은 식당이 보이면 들어가서 밥 먹고.”

    너무 나간 이환의 발언에 나는 못 들은 척 침묵했다.

    “세상 끝까지 달리고 싶은 기분입니다. 이대로 바다를 보러 가도 좋을 것 같네요.”

    언제나 긍정적인 이환이기에 가만히 두면 알아서 기분이 좋아졌다가 잠잠해지겠거니 했는데, 오늘따라 그의 기분은 끝을 모르고 상승 중이었다. 마냥 침묵만 하다가는 진짜 바다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에 결국 입을 열었다.

    “가족분들이 기다리지 않을까요. 모처럼 함께 식사하는 자리니 참석하시는 게 좋을 듯해요.”

    “해민 씨는 정말 배려가 깊네요. 남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는 건 어려운 일인데.”

    아니야. 나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해석해서 받아들이는 이환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차마 아니라고 답하지 못하고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본가에는 회장님이랑 사모님만 계시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네?”

    “좀 애매해서요. 아버지와 계모는 한 건물에 살고 있고, 형네 가족과 계모의 자식들은 그 주변에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둘째 치고, 보통은 이복동생이라고 말하지 않나. ‘계모의 자식’으로 선을 긋듯이 말하는 이환의 발언에 새어머니뿐만 아니라 이복동생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은가 의문이 들었다.

    “동생들하고는 사이가 안 좋아요?”

    “딱히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습니다. 신경을 안 써서.”

    그건 이환의 입장에서 하는 말일까, 아니면 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대답이 조금 부족했다고 생각했는지 이환이 나름대로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쌍둥이인데 여자애는 싸가지가 없고 남자애는 정상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다가오거나 말을 걸면 피해요.”

    덧붙인 설명이 내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음을 이환은 알지 못하겠지.

    정상이 아니라는 남동생은 어떻게 정상이 아닌지 묻고 싶었다.

    혹시 남동생도 요정을 믿나요?

    만약 그렇다면 정상이 아니란 말을 하지 않았겠지. 이환의 입장에서 요정을 믿는 본인은 지극히 정상일 테니까.

    정상이 아닌 사람이 정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남동생의 상태가 궁금했으나 그렇다고 눈으로 확인을 하기엔 두려움이 앞섰다. 이 마음은 마치 여리고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서른네 살의 남자가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던 얼마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깨달았다. 세상에는 상상 이상의 무언가가 분명 존재한다고.

    “다 왔네요.”

    잠시간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 보고 있을 무렵, 이환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높은 담이 쭉 이어지다가 나온 대문. 운전기사가 리모컨을 누르자 커다란 대문이 자동으로 서서히 열렸다.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거대한 성문을 대면한 기분이다. 성문 너머 어떤 구조물이 있을지 알지 못하는 현대인처럼, 저 대문 너머 어떤 집이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천천히 대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온 차가 멈추고, 운전기사가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내리죠.”

    “네, 네.”

    이환 쪽의 문을 열어 주고 차 뒤를 돌아 내 쪽의 문까지 열어 준 운전기사는 우리가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닫고 차를 몰아 주차장으로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를 이환이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실장님 집도 엄청 크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더 크네요. 저기서 회장님이랑 사모님이 사시고, 다른 형제분들은 같은 동네에 사는 거예요?”

    울창한 정원수를 지나 드러난 넓은 정원과 커다란 저택.

    대저택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며 묻자, 이환이 “같은 동네도 맞는 말인데…….” 하고 말을 끌었다.

    “형 가족은 저기 아래 건물, 계모의 자식들은 그 맞은편 건물에서 살고 있습니다. 건물 네 채를 둘러싼 외벽만 있고, 네 채의 건물 사이에는 벽이 없거든요. 그래서 각각 다른 건물에서 살지만 독립했다고 보기에도 애매하고, 같이 산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겁니다.”

    그래서 아까 이환이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 말했구나.

    이환의 말에 뒤늦게 동감하면서도 회장님 스케일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남들은 자식들에게 각자의 방을 만들어 주고자 방 두 칸, 방 세 칸짜리 집을 찾는데. 회장님은 자식들에게 방 대신 집을 한 채씩 주셨구나.

    “……이게 그룹 회장님의 스케일인가요?”

    얼빠진 내 물음에 이환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건물이 네 채라면, 나머지 한 채에는 실장님이 사셨어요?”

    “나머지 한 채는 시큐리티 직원들이 상주하고, 방문 손님이 머무는 곳입니다. 나는 형과 같은 건물에서 지냈어요. 우리 형제들이 한 채, 계모의 자식들이 한 채를 차지했죠. 형이 결혼하면서 내가 따로 나와 버렸지만.”

    “여기서 가족들과 살아도 좋았을 텐데.”

    “그러기엔 귀찮은 인간들이 많아서요.”

    살짝 냉랭한 목소리에 그렇게도 계모와 얽히는 게 싫었구나 싶었다.

    “정원수 때문에 다른 건물들은 잘 안 보일 텐데, 보러 갈까요?”

    이환이 느긋하게 집 구경을 제안했다.

    으리으리함을 넘어 이렇게 스케일이 큰 집을 또다시 볼 일이 있을까 싶어 혹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 냈다.

    “실장님.”

    “네, 해민 씨.”

    “저희 늦은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요. 밥이야 아무 때나 가서 먹으면 되지, 시간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밥을 ‘같이’ 먹는 데에 의의가 있으니까, 시간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내 대꾸에 이환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늦으면 혼나지 않을까요.”

    “안 혼납니다. 어차피 내가 안 왔다고 마냥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이환은 발길을 돌려 회장님 내외가 지내고 있다는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이환과 대화하며 잠시 잊었던 긴장감이 커다란 저택에 가까워지면서 도로 생겨났다.

    “왜 그렇게 긴장했어요?”

    “SG 그룹 회장님을 직접 본다고 생각하니까 긴장이 돼요.”

    “그룹 회장이 별겁니까. 요정님에 비하면 흔한 사람인데.”

    “…….”

    긴장을 풀어 줄 의도였다면 아주 적절한 농담이었다. 다만 그런 말을 꺼낸 사람이 이환이라는 점에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옷도 예쁘게 입었고.”

    저택 앞에 당도하여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환이 나를 향해 돌아서서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늉을 했다.

    “얼굴은 언제나처럼 예쁘고.”

    “…….”

    “예쁜 마음으로 예쁘게 말할 거고.”

    서른네 살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예쁘다’라는 단어가 어색하면서도 익숙했다. 익숙해지는 나 자신이 싫지만, 반복 학습의 결과는 강력했다.

    “걱정되네요.”

    “네?”

    “요정님을 알아볼까 봐.”

    “…….”

    “요정님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면 영 곤란할 것 같은데.”

    살짝 눈 끝을 찡그리며 불쾌감을 표하는 이환이 진심인 듯 보여서 하하 하고 억지웃음을 흘렸다.

    “식사 중에 누가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도 신경 쓰지 말아요.”

    식사 중에 이상한 소리를 할 만한 사람이라면 이환밖에 더 있을까. 이환 같은 사람이 그룹 총수 일가 중에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실장님 덕분에 긴장이 많이 사라졌어요. 감사합니다. 더 늦기 전에 얼른 들어가시죠.”

    더 이상 너의 개소리를 들어 주지 않겠다며, 차라리 긴장의 대상과 마주하는 쪽을 택했다.

    이환은 뭔가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으나 내가 많이 좋아졌다는 말에 만족하며 저택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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