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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26)화 (26/172)

26화

누구 한 사람이 말문을 틔우면 그 뒤로는 그에 대한 불만이 쏟아질 거다. 박 씨 아저씨 말처럼 사람은 자기가 제일 중한 법이니까. 몸 써서 일하는 현장에서 한 사람 몫을 해내지 못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힘들어지고, 누구든 그 부담을 짊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놈은 신경 끄고, 너는 네 할 일이나 잘해.”

“그러게요. 내 할 일이나 잘해야 하는데.”

내 할 일이 뭔지도 모르겠고,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자리가 아닌 곳에 서 있는 기분을 자꾸 느끼게 된다. 이렇게 있다가 조만간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든다.

처음에는 월급을 땡겨 받은 한 달 치만 일하고 그만둬야지 했는데. 시간 맞춰 따뜻한 밥이 나오고 잠자리가 편하니 꿈의 직장처럼 느껴졌다. 내게 과분한 자리임을 알지만, 일을 그만둘 시기가 오면 엄청 아쉬울 듯한 기분이다.

“너 부르는 거 아니냐?”

“네?”

죽죽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 내던 박 씨 아저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를 툭 쳤다.

“저거…… 너 부르는 거 아니냐고.”

“저를요?”

누가 나를 불러?

의아한 표정을 하자 도리어 박 씨 아저씨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알지 내가 알겠느냐는 얼굴이다. 그 와중에 박 씨 아저씨가 의문을 가졌던 소리가 점차 커져 내 귀에도 들려왔다.

“……민 씨이이. 해민 씨! 서해민 씨.”

현장이 떠나가라 부르는 목소리에 이마를 짚었다.

“뭐야, 너 부르는 거 맞네.”

“그러게요. 저 부르는 건가 봐요.”

“무슨 일 생긴 거 아니냐? 얼른 가 봐라.”

여기서 무슨 일이 생겨도 나를 부를 일은 없을 텐데. 구급차나 경찰을 부르지 나를 왜 부르겠나 싶지만, 저 목소리는 분명 서해민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은 안 생긴 것 같지만, 일단 가 보기는 해야겠어요.”

“그래. 한 소리 듣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얼른 가 봐.”

“담에 봬요.”

인사를 하고 급하게 몸을 돌리는 내 시야에 계단을 타고 사 층으로 올라오는 이환 일행이 보였다. 일 층부터 훑고 다녔는지 계단을 오르며 내 이름을 부르는 모습에 어색함이 없었다.

“실장님.”

뛰듯이 다가가 이환을 부르자,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짖던 이환이 나를 바라보았다.

“해민 씨.”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해민 씨가 없어져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놀라고 또 진심으로 안도한 얼굴이었다. 또르르. 그의 이마 위에서 흐른 땀이 뺨을 타고 내려와 턱에 고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현장은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여기까지 왜 올라온 겁니까.”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그 벨트까지 챙겨 하고 올라왔습니까.”

누가 봐도 작정을 하고 올라온 듯 보이겠지만, 진짜 어쩌다 보니 올라온 것이었다.

억울하지만 설명할 방법이 없네.

뺨을 긁적이자 이환이 손을 뻗어 내 팔을 붙잡았다. 놀람이 가시지 않았는지 그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전화도 안 받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니 이환과 백윤경에게서 번갈아 걸려 온 부재중 전화만 30통이 넘었다. 공사장의 소음과 진동으로 전화가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인데, 그래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부재중 전화가 30통인 건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전화 온 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진짜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걱정했어요.”

그러게.

이환의 표정, 목소리, 손길, 숨소리까지. 그 모든 것들이 그의 긴장과 염려와 불안과 걱정을 담아 물결치는 듯했다. 갈무리하지 못한 그 감정들의 여파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시야에서 벗어나지 말아요.”

“멋대로 이탈해서 죄송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요.”

내 사과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이환은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초조한 듯 보이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지지 말아요.”

손목을 붙잡고 있는 이환의 손에서 열기가 전해졌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의 손바닥이 더위 때문인지 혹은 초조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적어도 지금의 이환에게 더위는 존재 자체가 지워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그의 표정은…….

“안 사라질게요.”

온갖 감정들로 난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보이는 곳에 있을게요.”

불안과 초조함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 위로 옅은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그래요.”

언젠가 그의 얼굴을 보며 물어보려다 말았던 말이 떠올랐다.

실장님은 혹시 저를…….

하지만 이번에도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6.

“오늘 저녁은 본가에 다녀와야 할 듯한데, 여사님도 가시겠어요?”

“거기 밥 차릴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뭘 나까지 가.”

“밥 차려 달라고 모셔 가겠습니까. 오랜만에 가족들 얼굴도 보고, 일하는 사람들 군기도 좀 잡고 하셔야죠.”

“아이고, 군대도 아니고 무슨 군기를 잡아요.”

이환의 말에 여사님이 호호 하고 웃음을 흘렸다.

“외부인이 가서 설치면 누가 좋아라 하겠어. 늙은이 노망났다는 소리나 듣지.”

“누가 외부인입니까. 아버지 제외하면 그 집에 여사님보다 오래 머문 사람도 없습니다. 독립했다고 외부인이면 나도 외부인인가.”

“도련님이랑 누굴 비교해.”

“저나 여사님이나 가족 아닙니까.”

말도 참 예쁘게 한다며 여사님이 장성한 아들 보듯이 이환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대화에 끼지 못하는 나만 혼자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있을 뿐이다.

“아무튼 나는 안 갈래요. 늙으면 어디 가는 것보다 집에서 쉬는 게 최고야.”

“그럼 여사님은 집에서 쉬시고. 저랑 해민 씨만 다녀오겠습니다.”

누구랑 누구요?

밥 잘 먹고 있다가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젓가락을 입에 문 상태로 고개를 들어 이환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저도 가나요?”

“그럼요.”

“본가에 가신다고…….”

본가라면 SG 그룹 회장님이 살고 있는 집을 말하는 거겠지. 그곳에서 내가 도울 일이 뭐가 있을까 싶고, 그룹 회장님이 사는 집이라고 하니 긴장감부터 들고, 내가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곳에 발을 들여도 되는지 걱정도 되는, 여러모로 복잡 미묘한 기분이다.

“내가 독립해서 본가에 걸음을 안 하다 보니, 한 달에 한 번은 이렇게 강제적으로 모여 저녁을 먹습니다.”

“아, 그럼 오늘은 저녁 식사하러 가시나 봐요.”

“네, 그렇죠.”

“그런데 굳이 저까지…….”

끌고 가실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내뱉지 못한 뒷말이 혀 위에 머물렀다. 하늘 같은 고용주님의 말씀에 감히 토를 달 수는 없지만, 매우 큰 의문이 든다는 뉘앙스가 전달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제가 가는 곳엔 해민 씨도 있어야죠.”

네, 그게 제 업무이긴 하지만. 그래도 회장님 댁에 잔심부름할 사람이 없을 리도 없고, 굳이 꼭 제가 가야 할까 싶네요.

“해민 씨가 날 구해 줬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들 궁금해합니다. 이번에 같이 가서 얼굴 한번 보여 주면 좋겠는데. 오늘 가면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들을 겁니다.”

이환의 아버지라면 대기업 회장님, SG 그룹의 총수, SG의 우두머리, 대빵, 기타 등등. 어떤 식으로 말하든 나와 엮일 일이 전혀 없는, 조금의 가능성도, 일말의 기회도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고?

그냥 모른 척해 주는 편이 오히려 더 감사할 지경인데. 높으신 분들 눈에 띄었다가는 좋은 일보다 안 좋은 일을 겪기가 더 쉬웠다.

뉴스에서도 그렇고, 드라마에서도 그렇고. 뭐 하나 마음에 안 들면 쉽게 짓밟을 수 있는 게 그런 사람들이지 않던가. 그러면서도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했던가. 묘사하는 것만 들어 보면 사이코패스인가 싶을 정도로, 평범함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바로 재벌들이었다.

그런 재벌 중에서도 손꼽히는 SG 그룹 회장님에게 감사 인사라니. 생각만으로도 속이 더부룩해졌다.

“그럼 저는 인사만 드리고 나오면 될까요.”

“밥 먹자고 모인 자리인데, 같이 식사도 해야죠.”

SG 그룹 회장님과 겸상이라.

친구네 놀러 가서 친구 아버지와 같이 밥을 먹는다고 해도 이렇게 부담스럽지는 않을 터이다. 이환과 내가 친구도 아닐뿐더러, SG 그룹 회장님이 일반적인 친구 아버지의 수준도 아니니까.

게다가 그 자리에 회장님만 계신 것도 아니지 않나. 가족 식사 자리니까 이환과 이정을 비롯하여 온 가족이 다 모여 있을 텐데. 그런 식사 자리에 합석이라니. 이건 누가 보더라도 포상이 아니라 벌칙인데.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이환의 심하게 낙천적인 사고에 눈앞에 캄캄해졌다.

“오랜만에 갖는 가족 식사 자리이니, 전 기다렸다 식사 끝나고 인사를 드려도 될 것 같은데요.”

“해민 씨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요. 해민 씨를 두고 혼자 밥을 먹을 수도 없고요.”

“왜요?”

“네?”

“아, 아닙니다.”

왜요! 왜 못 해요? 그런 건 고용주 입장에서 당연히 해도 되는 일인데요. 멀뚱히 세워 둬도 괜찮으니까 그냥 기다리게 해 주세요! 내가 허락하겠다는데 왜 못 합니까.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담아 시선을 보냈으나 이환은 그 시선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다들 해민 씨가 궁금하고 보고 싶을 겁니다.”

“그래요. 이참에 회장님 댁 구경도 하면 좋겠네. 여기보다 넓어서 처음 한 번은 그냥 건물 구경하는 맛도 꽤 좋을 거예요.”

내키지 않는 속내를 알아차린 여사님이 슬그머니 이환 옆에서 거들었다.

아니, 누가 SG 그룹 회장님 집을 건물 구경하러 갑니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괜찮다며 손을 내젓는 여사님의 의사에 감히 반기를 들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어버버하는 순간 내 의사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마침내 암묵적으로 동행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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