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알파의 신체 능력은 뛰어납니다. 순발력도 나쁘지 않죠. 환하게 트인 공간에서 무언가 떨어진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해민 씨는 스스로의 안전을 생각해요. 나 때문에 해민 씨가 다친다면 내가 많이 슬플 겁니다. 걱정할 거고. 마음이 아프겠죠.”
조심스럽게 뻗어 나온 손끝이 뺨을 스치듯 만지고 떨어졌다. 불식간에 이루어진 접촉은 내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사라졌다.
문득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이환의 손이 닿았던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괜스레 머쓱해져 모른 척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알파라고 해도, 그런 사고를 어떻게 피해요.”
위에서 떨어지는 철근은 거의 자연재해급 사고가 아닌가. 나 역시도 무턱대고 몸을 날렸던 행동을 뒤늦게 반성하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지난 사고에 천운이 따랐다고 생각할 정도인데.
이환은 그저 말뿐인 변명이 아니라 진짜 모든 위험을 피할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잘 피하죠.”
“아, 네.”
잘 피하시는구나. 그렇지, 잘 피해야겠지. 잘못 피하면 큰일 나니까.
무슨 대책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딱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왜인지 대답을 한 사람보다 대답을 들은 사람이 더 멋쩍은 기분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일이 많았습니다.”
“이런 일이요?”
“이런 사고. 뭐가 떨어지거나 날아오거나 부딪치거나, 기타 등등. 다행히 죽는 일은 없었지만 꼭 한 군데씩 다치곤 했죠.”
불운이 따라다니는 팔자 같은 건가?
어디까지가 허풍인지 알 수 없어서 가만히 듣는 시늉을 했다.
“창고에 갇혔던 적이 있습니다. 여기저기 비밀 아지트를 마련해 두고 숨어 놀던 나이였죠. 창고는 잡다한 물건들을 넣어 두던 곳이라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고, 딱히 문을 잠가 두지도 않았을뿐더러 잠금장치가 고장 나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갇혀 버렸죠. 창고라 조명도 환하지 않았던 그곳에서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 동안 누군가 나를 찾아 주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이틀을 꼬박 갇혀 있어야 했죠. 내 생애 가장 첫 위기였고, 가장 강렬했던 기억입니다.”
“문은 왜 안 열린 거예요?”
“놀랍게도 잠금장치가 고쳐져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지시로 말이죠.”
“……그게 누군데요?”
철없는 시절 한 번쯤 있을 법한 일이다.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르고 문을 잠그거나, 혹은 바람에 문이 닫혀 버려서 갇히게 되는 사고는 티브이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경험담이었다.
내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빙긋 웃은 이환이 말을 이었다.
“가끔 화분이 떨어지고, 간판이 떨어지고. 자전거와 부딪치면, 얼마 뒤엔 오토바이가 와서 박고, 그런 뒤에는 자동차 사고가 나기도 하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사고를 겪기 마련이지만, 내 부주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사고를 저렇게 고루 겪기에도 어렵지 않을까.
마치 누군가가…….
“이 정도는 괜찮아? 그럼 이 정도는 어때? 마치 누군가가 나를 대상으로 죽나 안 죽나 시험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일부러 단계를 높이며 사고를 유도하는 듯 느껴졌다. 이환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해민 씨.”
“네, 실장님.”
“어릴 때 동화책 많이 읽어 봤습니까?”
“많이 읽었다기보다는 그냥 말로 전해 들은 게 많죠.”
“그렇죠. 콩쥐 팥쥐, 효녀 심청, 장화 홍련, 신데렐라, 백설 공주. 혹시 이 동화들의 공통점이 뭔지 압니까?”
문학 소설이 아니라 어릴 때 읽은, 혹은 입으로 전해 들은 동화들이라 내용을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콩쥐 팥쥐, 효녀 심청, 장화 홍련, 신데렐라, 백설 공주의 공통점.
미간을 찌푸리며 하나하나의 스토리를 떠올려 보았다.
“여자 주인공들이 남자를 만나 팔자 고친다는 거?”
“…….”
“남자 주인공들이 금수저라는 거?”
“…….”
“요즘 시대에 걸맞지 않은 소극적인 여성상?”
“…….”
“태생으로 금수저와 흙수저를 나누는 차별적 시각?”
“…….”
내 답이 맞다 틀리다는 말 대신 이환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녜요?”
“그것들도 공통점이긴 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정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조금 시무룩해졌고, 그것을 용케 알아차린 이환은 오히려 미안한 얼굴로 “해민 씨의 말도 분명 맞습니다. 동화란 다 비슷비슷하니까요.” 하고 한 박자 늦게 나를 위로했다.
“계모. 주인공들에게는 계모라는 악역이 곁에 존재하죠. 그들을 구박하고, 삶을 고되게 하고, 목숨을 위협하는 계모 말입니다.”
이 타이밍에 갑자기 동화를 끄집어낸 이환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내뱉은 ‘계모’라는 단어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내가 이야기했던가요?”
“네, 저번에 형님 만났을 때요.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형님께 많이 의지하셨다고.”
“그 뒤로 아버지가 재혼을 하셨습니다.”
“그럼…… 실장님이 위험했던 일들은…….”
이환은 이제까지 그가 겪은 사고들의 뒤에 그의 계모가 있다고 말하는 걸까.
본처가 낳은 자식을 구박하는 계모. 자신이 낳은 아이들만 예뻐하고 본처의 자식을 못살게 구는 계모. 심지어 부잣집이라면 유산의 문제도 있으니, 목숨을 위협할 만한 동기도 충분하다.
에이, 그래도 ‘나쁜 계모’는 너무 뻔하지 않나.
한쪽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쪽으로는 너무 뻔해서 그런 캐릭터가 현실에 존재할까 싶기도 했다.
아니지,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막장인 게 현실인데. 현실이니 그런 동화 속 계모보다 더한 계모가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원인을 알고 있고, 원인이 되는 사람을 알고 있다면…… 왜 계속 당해 주는 거예요? 저번 사고는 진짜 위험했는데. 못 하게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계모라지만 어쨌든 가족이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나. 그래도 참고 당하기에는 목숨이 위태로운 수준인데. 경찰에 신고하지는 못해도, 계모에게 경고를 하거나 회장님에게 말하여 어느 정도 제재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건…….”
내 물음에 이환이 무언가 부끄러운 듯 살짝 눈가를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고난과 역경이 있어야 왕자님을 만나니까.”
“……왕자님이요?”
“나도 참고 버텨야 운명의 상대를 만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판을 엎어 버리면 내 운명의 상대가 나타날 타이밍이 사라져 버리잖아요.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또라이, 미친놈, 머리가 꽃밭, 기타 등등.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불순한 생각을 황급히 지워 냈다.
“언젠가 만나게 될 운명의 내 사람을 생각하면 그 기다림이 고되지 않았거든요.”
로맨스 영화처럼 잔잔한 울림이 있는 대사는, 역시 영화에서나 먹히는 거였다. 그것을 현실에서 듣고 있노라니 솜털이 쭈뼛 서고 닭살이 돋았다. 오돌토돌해진 팔뚝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온기를 만들며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만났네요.”
그게 저는 아니겠지요?
간절한 마음으로 아니길 빌었다. 이십 년 인생에 이렇게 간절했던 때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간절하고 간절하게.
“그날, 귓가에 울리던 종소…….”
“쇳소리요. 철근 소리.”
“네, 철근이 떨어지며 울리던 운명의 종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그 어떤 음악도 그보다 감미롭지 못할 겁니다.”
어떻게든 사실을 말해 주려 했으나, 그 사실마저도 이환의 운명 타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나는 할 말을 잊었고, 이환은 현실감을 잃었다.
아무래도 이 세상은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채울 수 없는 상실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모쪼록 이환이 가지고 태어난 부유함만큼 현실성을 상실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 ∞ ∞
“해민 씨. 안전모부터 씁시다.”
현장에 도착하자 이환은 옆에서 건네준 안전모를 받아 자연스럽게 내 머리에 먼저 씌워 주었다.
“안전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그걸 알면 이 안전모를 본인부터 쓰는 게 어떨까 싶은데.
지금까지 공사장에서 굴러먹던 놈에게 무슨 선생질을 하나 싶었으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비위를 맞춰 주며 사근사근하게 굴지는 못해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거나 내가 여기서 굴러먹은 짬밥이 몇 년인데 같은 소리를 꺼내어 굳이 고용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눈치 정도는 있었다.
그저 옆에서 안전모를 건네주었던 백윤경의 어이없는 시선이 따가울 뿐이었다.
“머리가 작아서 안전모가 쑥 들어가네요. 해민 씨는 안전모 쓴 모습도 귀엽습니다.”
하다 하다 안전모 쓴 모습이 귀엽다는 말을 들어 본다.
머리 고정대를 조절하자 조금 빠른 타이밍으로 이환이 턱끈을 조여 고정해 주었다. 얼굴을 바짝 마주하고 내 턱 끝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집중하는 이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손으로도 할 수 있는데 이걸 굳이 왜? 하는 생각이었으나, 눈이 마주친 이환이 쑥스러운 듯 눈가를 붉히며 시선을 비껴 내는 모습에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해민 씨만 너무 챙기는 거 아닙니까.”
안전모를 추가로 가져와 이환에게 건네고 저도 머리에 쓰며 백윤경이 농담처럼 지적했다.
“현장이 위험하잖아.”
“그 현장이 해민 씨한테만 위험합니까? 나도 우리 집 소중한 아들인데.”
“허튼소리 지껄이지 말고. 해민 씨한테 무슨 일 없도록 잘 지켜보기나 해.”
지켜볼 대상이 틀린 듯한 기분이 드는데. 그냥 기분 탓일까.
“해민 씨, 위험하니까 내 옆에 붙어 있어요.”
사고가 일어나면 안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사고가 일어난다면 이환의 옆이 가장 위험할 듯싶은데. 하지만 “네.” 하고 얌전히 대꾸하며 이환의 뒤에 따라붙었다.
오랜만에 나온 현장은 여전히 덥고 숨 막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몸을 움직여야 했는데.
공사 현장을 바쁘게 움직이는 인부들을 보며, 당장에라도 저곳으로 달려가 일을 해야 할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 자리가 이곳이 아닌 저곳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네 자리로 돌아가라며 고함을 지를 것만 같았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