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23)화 (23/172)

23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뒤늦게 나를 바라본 황만철 부장이 코앞으로 다가와 넙죽 허리를 수그렸다. 바로 앞에서 위아래로 흔들리는 정수리를 보고 있자니 왜인지 현기증이 일었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손님인 줄도 모르고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나가 보세요. 아픈 사람 정신없게 하지 말고.”

슬쩍 비껴 난 내 시선을 알아차린 이환이 손을 내저었다. 황만철 부장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뒷걸음질로 사무실을 나갔다.

“실례라는 말은 너무 가볍지 않나? 사람 때려 놓고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면 끝나니. 맞은 사람만 억울해서 살겠나.”

툭 하고 내뱉은 말에 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까지 유능하게 일하던 회사원에서 한순간 불퉁거리는 사내아이처럼 보인 탓이었다.

“위험했어. 하마터면 어릴 때 버릇이 나올 뻔했네.”

“잘 참으셨습니다.”

“참아야지.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 받으려면.”

이환과 백윤경의 대화를 훔쳐 듣다가 나온 단어에 기침을 할 뻔했다.

설마…… 요정에 더해 산타까지 믿으시는 건 아니겠지.

돌아올 대답이 두려워 차마 묻지 못하고 모른 척 눈을 감았다.

조금 전까지 냉철하고 유능한 회사원으로 높아졌던 이환의 이미지는 요정과 산타로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인사 고과 마이너스로 먹여 버려.”

“마이너스 점수가 없습니다.”

넥타이를 풀어 던지며 짜증스럽게 말한 이환에게 백윤경이 넌지시 첨언했다.

“그럼 최하점으로.”

“애초에 만년 부장으로 끝날 사람인데, 최하점 먹인다고 타격이나 있겠습니까.”

“……감사과에 던져 줘. 입사 때부터 지금까지 탈탈 털라고 해.”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이환이 가벼운 어투로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사표 받지 말라고도 전해.”

회사원들의 저승사자라고 불린다는 감사과.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이 끌려가는 곳으로 자주 등장했기에 낯설지 않았다.

황만철 부장도 무언가 비리가 있나. 아니면 비리를 만들어 씌울 작정인가. 그래도 사표를 받지 말라는 걸 보면 어느 정도만 괴롭게 만들고 끝내려는 모양이다.

“사표가 처리되면 퇴직금이 나오거든요.”

마치 내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백윤경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퇴직금 안 주고 쫓아내시려고요?”

그거 엄청 억울한 일 아닌가.

받을 돈 못 받고 쫓겨나는 게 직원에게는 제일 억울한 일인데, 그 억울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동안 해 먹은 돈이 많을 겁니다. 황 부장은 퇴직금보다 그동안 처먹었던 돈을 토해 낼 걱정부터 해야 할 거예요.”

건설 회사에서 뒷돈 안 받아먹는 놈이 드물다고, 황 부장은 그 드문 케이스에 속하지 않을 놈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한 이환이 조금씩 녹아 물이 흐르는 얼음주머니를 가져갔다. 차갑게 언 손을 붙잡아 제 손으로 문질러 녹여 주며, 이환이 “해민 씨.” 하고 나를 불렀다.

“네, 실장님.”

“쓰레기 같은 놈 때문에 해민 씨만 안 좋은 일을 당했네요. 미안합니다.”

“왜 실장님이 사과를 하세요.”

“내가 있는 회사에서, 내가 해민 씨를 보호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니까요.”

그리 말하는 이환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오히려 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어린 사람이 정장 입고 있으니까 사원으로 오해하셨나 보더라고요.”

“기분 좋게 꼬까옷 입고 나왔더니 이런 일이 생기네요. 앞으로는 별다른 일 없으면 슈트 대신 평상복만 입어야겠습니다.”

음, 꼬까옷. 어감이 귀여운 단어를 모른 척하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실장님이 부사장님보다 더 높은 사람이에요?”

“네?”

“아까 부사장님 거쳐 실장님한테 결재 서류가 올라온다고 하셔서요. 여기는 사장님 대신 실장님이라고 부르나 하고…….”

보통은 회장 밑에 부회장, 사장 밑에 부사장인데. 생각할수록 더 이상했다.

“아.”

내 질문의 의미를 이해한 이환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SG 건설 사장은 따로 있습니다. 나는 건설이랑 상사 쪽을 맡아 관리하고 어드바이스할 뿐이고요. 따로 직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고, 그래서 월급도 안 받습니다. 그렇다고 이름을 부를 수는 없으니 적당히 실장이라고 부르는 거죠.”

“어드바이스…….”

대충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아니, 열심히는 모르겠지만 매일 출근을 하고 계시는데 월급도 안 받는다는 점에서 일단 놀라운 단계를 거쳐 경악했고. 그래서 사장님이 높다는 건지, 실장님이 높다는 건지도 여전히 아리송했다.

“음, 내가 인사권을 쥐고 있습니다. 사장도 내가 앉혔죠.”

실장님이 사장님보다 높구나.

쉽고 빠르게 이해가 되었다. 의문이 해소되었음을 알아차렸는지 이환이 해사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해민 씨.”

“네, 실장님.”

“내가 해민 씨에게 부탁을 하나 하고 싶은데요.”

“네.”

“해민 씨 도장을 좀 빌리고 싶네요.”

“……도장……이요?”

이환에게 붙잡혀 있던 손을 슬그머니 빼내며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도장은 쉽게 찍어 주거나 빌려주는 게 아니라고, 그나마 내 인생을 걱정하던 몇몇 어른들에게서 어릴 때부터 들어 온 터라 경계심이 생긴 탓이었다.

“폭행으로 고소를 넣어야 할 것 같아서요.”

“고소를…….”

“폭행, 겁박, 모함, 기타 등등. 싸그리 모아서 고소할 겁니다. 예쁜 얼굴에 상처를 내 놓고 말 한마디로 넘어가는 건 양심이 없는 거죠.”

이걸로 고소하는 게 더 양심이 없어 보이는데.

“변호사에게 일임할 테니 해민 씨가 번거로울 일은 없을 겁니다. 고소장 만들어 오면 도장이나 한번 찍어 줘요.”

“그래도 고소를 하기엔 조금…….”

“충분합니다. 저런 사람들은 다른 곳에 가서도 저러거든요. 피해자를 늘리지 않기 위해서도 해민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건 사회에 매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그리고 그렇게 해야 제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 같다고 이환이 말했다.

이게 사회 공헌까지 나올 이야기인가 싶었으나, 이환이 너무 강력하게 요청하여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 ∞ ∞

“해민 씨, 현장에 다녀와야 할 듯싶은데. 회사에 있을래요?”

“저 혼자 회사에요?”

현장이나 외근 나갈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하여 회사에 따라오는 건데, 정작 그런 일이 생기니 따라나서지 말라는 요구가 당혹스러웠다.

내 표정을 힐끔 살핀 이환이 손가락으로 눈썹 끝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현장은 덥고, 먼지도 많고, 위험하기도 하니까. 해민 씨가 굳이 따라오지 않았으면 싶거든요.”

이환은 내가 얼마 전까지 그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임을 잊은 모양이다.

“혼자 회사에 남아 있기 거북하다면 먼저 집에 가 있는 건 어떻습니까. 해민 씨 태워다 주고 현장에 가도 될 듯싶은데.”

“외근 보실 때를 위해 제가 있는 건데요.”

“그래도 위험한데.”

현장에서 자재 옮기고, 거푸집 떼고, 그걸 또 옮기고, 심지어 야간작업까지 하던 사람에게 현장 둘러보러 가는 일은 산책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던 이환에게나 위험하지. 저번과 같은 일이 또 생길 수도 있고.

이환을 노리는 누군가가 진짜 존재하는지도 확실치 않고,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멍청하게 똑같은 장소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사고를 일으키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아무튼 누가 더 위험한가를 따지자면 나보다는 이환을 꼽아야 하지 않을까.

“위험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장님 옆에 있는 게 제 일이니까요.”

“……그럼 조심하고 내 옆에만 있어야 합니다.”

이환의 옆에 있으면 없던 위험도 생길 듯싶다. 또다시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이환을 구하는 것도 내 업무에 속할까. 잠시 심도 있게 고민했다.

“해민 씨? 대답이 없네요.”

“아, 네.”

일단 대충 고개를 끄덕여 이환을 따라나설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네.”

“현장 도착하면 안전모부터 쓰고요.”

“네.”

“위험한 물건은 만지면 안 됩니다.”

“네.”

“전기선도 조심해야 합니다.”

“네에.”

“낙사 위험이 있으니 발 디딜 때 주의하고요.”

“……네.”

현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환은 공사장 짬밥이 수년인 나에게 끊임없이 주의를 주었다.

고용주가 하는 말이니 넙죽넙죽 대답은 해 주고 있지만 사실 과한 염려가 조금 귀찮기도 했다. 현장 안전 수칙 시험을 본다고 해도 이환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텐데, 그걸 모른 척하는 것도 답답했다.

이런 걸 보면 사회생활도 참 어렵다.

“실장님.”

“네, 해민 씨.”

“저번 사고요…….”

그러다 문득 생겨난 의문에 운을 떼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저번 사고가 인위적인 사고임을 알고 있냐는 질문을 한다면 그 사실을 나 역시 알고 있다고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 말해야 하고, 그러려면 건물 위에 있던 정체 모를 누군가를 보았다는 사실도 말해야 한다.

그럼 왜 그러한 사실을 말하지 않고 감추고 있었는지 추궁을 받겠지. 어쩌면 그 사람과 한통속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그냥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 봐 말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어느 타이밍에 말해야 할지 혹은 이제 와서 말해도 좋을지 난감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아, 아닙니다.”

결국 이번에도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저번 사고라…….”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방법은 없었고, 흘러나온 말에 반응하듯 이환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저번 사고는 위험했습니다. 해민 씨 덕에 위험한 일을 피할 수 있었지만,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해민 씨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도록 해요.”

고용주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발언에 이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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