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가만히 서서 팔자 좋게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환이 갑자기 남자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윽.”
“실장님?”
난데없는 이환의 행동에 놀라 혀를 씹었다.
성격이 너무 순해서 걱정이었던 이환이 다짜고짜 머리채를 잡았다고?
이환에게 저런 과격한 면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에 놀람은 배가 됐다.
남자의 머리채를 붙잡고 사무실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이환을 다급히 뒤따랐다.
“보안실에 연락해서 십 분 전부터 지금까지 복도 CCTV 영상 보내 달라고 해요. 구급함 챙겨서 들어오고.”
“네, 실장님.”
비서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차분히 내선 전화를 들어 연락을 취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이환의 뒤를 쫓았다.
“아, 미안합니다. 내가 어깨를 붙잡고 온다는 게 머리채였네요. 회사에서 일어나는 폭력 행위에 놀라 머리인지 어깨인지를 몰랐습니다.”
조금도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그리 말하며 이환이 잡고 있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그는 손가락에 감긴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불쾌한 표정으로 후, 불어 날렸다.
“영업 4팀 황만철 부장님.”
“예, 실장님.”
“미안하지만 잠깐만 서 있어요. 해민 씨 얼굴부터 치료해야 해서. 예쁜 얼굴에 상처가 났네요.”
봉두난발이 된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황만철 부장은 이환과 나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듯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예, 예. 고개를 조아리며 답하면서도 그는 지뢰를 밟은 상황이 아닌가 싶어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며 이환과 나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앉아요, 해민 씨.”
평소와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주춤주춤 소파에 앉자, 문이 열리며 비서가 구급함을 가지고 들어왔다.
“고마워요. 아, 얼음주머니 좀 작게 만들어 와요. 뺨에 대고 있게.”
“네, 실장님.”
이환이 구급함 안을 뒤져 소독약을 꺼냈다.
“눈에 들어갈지도 모르니, 눈 감아요.”
“제가 할게요.”
“거울도 없는데 어떻게 혼자 합니까. 가만히 눈 감고 있어요.”
소독약으로 세수를 할지언정 혼자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마주하고 있는 얼굴이 마치 잘 만든 인형처럼 무표정해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나 손길은 여전히 상냥한데도 불구하고 눈앞의 이환이 낯설게 느껴졌다.
“피가 났어요.”
“조금 스쳤나 봐요.”
“약 들어가니까 입은 다물고.”
‘주둥이 다물어’의 상냥 버전인가.
나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었다. 칙칙 하고 분사된 소독약이 뺨에 닿았다.
“뺨이 붓네요. 열도 오르는 것 같고.”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그걸 해민 씨가 어떻게 압니까. 의사도 아니면서. 예쁜 얼굴에 흉 지겠습니다.”
예쁜 얼굴 아닌데. 흉터야 며칠 지나면 아물 거고.
“이제 약 바를 겁니다. 계속 눈 감고 있어요.”
호오, 하고 바람을 불어 물기를 날려 보내고 미끈거리는 연고를 상처 위에 살살 발라 준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왜인지 얼굴이 간지러워졌다.
“흉터가 안 남는 반창고가 따로 있을 텐데.”
넓은 반창고를 뺨 위에 붙여 주며 이환이 불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상처는 약만 발라도 괜찮아져요.”
“얼굴에 난 상처는 특별히 신경 써야 합니다. 예쁜 얼굴에 흉터가 남으면 속상하잖아요.”
예쁜 얼굴도 아닐뿐더러, 이 정도 상처는 여기저기서 구르며 일하다 보면 일상과도 같았다. 결코 이렇게 유별을 떨 수준의 상처는 아니었다.
“실장님. CCTV 영상 보냈다고 합니다.”
“고마워.”
얼음주머니를 가지고 들어온 백윤경이 그것을 이환에게 건네주며 동상처럼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황만철 부장을 바라보았다.
“뺨에 얼음주머니 대고 있어요. 차갑겠지만, 그래야 부기가 빠집니다.”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얼음주머니를 싸서 내게 내민다. 괜찮은데,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얌전히 그것을 받아 뺨에 댔다.
후우, 작게 숨을 몰아쉰 이환이 책상으로 돌아가 마우스를 달칵거렸다. 영상을 확인하는 모양인지 모니터를 보는 그의 미간이 꿈틀꿈틀 요동쳤다.
“황만철 부장님.”
“죄송합니다, 실장님.”
이환이 내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 주고, 얼음주머니까지 준비해서 대 주는 모습을 보며 황만철 부장은 아마도 내가 회사의 사원이 아니라 이환의 개인적인 손님이라고 결론 내린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도 이환과 꽤 가까워 보이는 모습에 일단 넙죽 엎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겠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단번에 태도를 바꾼 황만철 부장은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구부리며 사과했다.
“서류 가지고 오세요.”
“……네?”
“여기 왜 올라왔습니까. 결재 받으려고 온 거 아닙니까. 가져오세요.”
상황에 대한 질책을 들을 거란 생각과 달리 이환에게서 나온 말이 예상 밖이었는지 황만철 부장이 말을 더듬었다.
“황만철 부장님. 내 말 못 들었습니까?”
“아, 이건 부사장님께 올려야…….”
“부사장 거쳐서 결국 나한테로 올라올 거 아닙니까. 오히려 다이렉트로 나한테 주면 황만철 부장님은 더 좋은 거 아닌가. 회사 생활 참 못하시네.”
실장님이 부장님보다 높은 사람인 건 확실해 보이고, 부사장보다도 더 높은 사람이었나. 회사 체계를 알지 못하니 영 아리송했다.
쯧, 하고 혀 차는 소리에 황만철 부장이 바닥에 떨어뜨렸던 서류철을 집어 이환에게로 다가왔다. 서류를 내미는 황만철 부장의 손이 살짝 떨리는 듯 보였다.
“서류철이 참 두껍네요. 단단하고.”
“예, 예.”
“이걸로 맞으면 아프겠어요.”
“……죄송합니다.”
이환은 끝까지 그의 사과에 대한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괜찮다, 아니다 하는 대꾸 없이 못 들은 척 서류를 살폈다.
“멀티미디어 센터에 발을 걸치려고요?”
“예, 알아보니까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고 합니다. 다른 건설사들이 발 걸치기 전에 미리 기름칠 좀 해 두면 저희를 중심으로…….”
“황만철 부장님.”
들고 있던 서류를 툭 내려놓으며 이환이 한심하다는 어투로 황만철을 불렀다.
“이거 서울 시장이 당선되기 전에 중소 건설사 살리겠다고 공약으로 내걸었던 겁니다. 다른 건설사들이 발 걸치기 전에? 부장님이 돈 좀 되겠다고 생각한 걸 그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안 하는 겁니다. 왜? 이거 먹겠다고 들어갔다가 깎이는 이미지가 더 크니까. 중소 건설사 살리겠다고 진행되는 시 사업에 대기업이 콩고물 주워 먹겠다고 아득바득 들어가면 손가락질받기 딱 좋으니까. 황만철 부장님, 혹시 엑스맨이에요?”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굳이 나서서 회사 이미지에 손해를 입히려고 그러지? 안에서는 폭력을 휘두르질 않나, 밖으로는 기업 이미지에 똥칠을 하려고 그러질 않나. SG에 불만 있습니까? 누가 회사 주가 좀 떨어뜨리고 이직하래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회사에 어떻게든 기여하려는 의욕이 앞서,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제까지 순하고 말랑말랑하고 배려심 넘치는 이환의 모습만 봐 와서, 저렇게 업무에 관련하여 냉철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이환도 회사에서는 엄청 정상적인 사람이구나.
아니다,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언제나 정상적인 사람이다. 요정님 얘기할 때만 제외하면 그는 누구보다 정상적이고 훌륭한 인격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었다.
게다가 회장님 아들이라서 높은 자리에 앉은 게 아니라고 말하듯, 엄청 유능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저 황만철 부장이라는 사람보다도 더 유능하고 똑똑해 보였다.
이환의 새로운 모습에 속으로 감탄하고 있자, 백윤경이 옆에서 슬그머니 내려가는 손을 툭 건드리며 얼음주머니를 제대로 대고 있으라 눈짓했다.
“그 와중에 서류까지 듬성듬성 빠져 있네요?”
“그건 조금 전에 발견해서 심부름을…….”
그건 말하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나도 어느 정도 눈치는 있어서, 그 일을 다시 꺼내 봤자 이환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만들 뿐이란 것이 짐작되었다. 그리고 그 짐작이 틀리지 않았는지, 무표정하던 이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황만철 부장님. 만년 부장 자리에 앉아서 월급 따박따박 받아먹고 있으니 회사 일이 쉽습니까?”
“죄송합니다.”
“누가 보면 황만철 부장님 뒤에 엄청 대단하신 분이라도 있는 줄 알겠습니다. 일을 이렇게 개판으로 하는데도 멀쩡하게 회사 잘 다니고 계신 걸 보면. 누굽니까? 그 황금 동아줄.”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까지는 열심히 안 했어요?”
“……죄송합니다.”
어쩌라고, 개새끼야.
황만철 부장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개미지옥 같은 질문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황만철 부장을 조금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렇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고용주들이 간혹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걸리면 진짜 죽을 맛이었다.
죄송하다고 하면 뭐가 죄송하냐고 그러고, 그걸 대답하면 알면서 왜 죄송한 짓을 했냐고 그러고, 안 그러겠다고 하면 지금까지는 왜 그랬냐고 그러고, 그러면 다시 죄송하다고 답하고 뭐가 죄송하냐는 질문이 나오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하염없이 뛰고 있는 그런 기분.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졌다.
“이런 서류 올려서 가뜩이나 바쁜 사람 시간 잡아먹지 말고, 받아 가는 월급만큼이라도 제대로 일을 합시다. 황만철 부장님.”
말을 할 때마다 따라붙는 ‘황만철 부장님’이라는 호칭이 가슴에 꽂히는 기분이다. 옆에서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찔끔찔끔 놀라는데, 당사자는 얼마나 괴로울까.
이유 없이 나에게 화풀이를 하던 사람이 코앞에서 상급자에게 까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회사 생활이 이런 거구나 깨달았다. 대기업이라고 다를 게 없네. 어디든 남의 돈 받아먹으며 사는 건 힘들어 보였다.
“나가 봐요.”
“감사합니다, 실장님.”
주섬주섬 서류철과 서류를 모아 들고 황만철 부장이 인사를 한 뒤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문을 열려는 그를 붙잡은 건 이환이었다.
“황만철 부장님. 중요한 거 잊지 않았습니까?”
“……네?”
“진짜 세상 쉽게 사셨나 보네. 내 손님한테 손찌검까지 해 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개무시라니. 그 황금 동아줄이 진짜 튼튼한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