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21)화 (21/172)
  • 21화

    “힘들어? 아니야, 힘들다는 말로 설명을 할 수가 없지. 그래도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으니 필사적이었어.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한 자식 앞세우고 가슴은 찢어지지, 실제로 아랫도리는 죽은 애 꺼낸다고 찢어 놨지. 그래도 살고 싶다고 네발로 기어서 그 집을 나왔어.”

    “…….”

    “그렇게 집 나와서 인생이 편해졌을까. 몸도 안 풀린 여자가 돈도 없이 어디서 자고, 뭘 해 먹고 살겠어. 또 고생이지. 그러다 어떻게 어떻게 소개를 받아서 지금 도련님의 모친, 당시에 우리 아가씨 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 한 달 지나고, 반년 지나고, 한 일 년 지나니까 조금 살겠더라. 사람이 간사한 게, 애 잃고 당장 죽을 것 같았는데 또 사니까 살아지더라고. 살다 보니 웃게 되고, 웃으니까 살게 되고. 사람 참 단순하지.”

    가끔 멈추긴 하였으나 잔잔하게 이어지는 먹먹한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온 노인네라고 자랑하는 건 아니고. 해민 씨도 힘들 거야. 힘들다는 말로 충분치 않을 만큼, 죽을 만큼 힘들겠지만. 살다 보면 웃을 날도 올 거예요. 나 보고 힘내라고 이야기해 준 거야. 이렇게 박복한 년도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나 보면서 위안 얻으라고.”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나는 해민 씨가 좋아요. 힘들어도 씩씩해서 기특하고, 비뚤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돕는 그 심성이 참 예뻐.”

    “저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씩씩한 게 아니라 포기한 거고, 비뚤어지다 못해 완전히 비틀려 버린 인간인데. 다른 사람을 도운 적도 없고 이환을 구한 것은 그냥…… 어떤 판단이나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인 탓이었는데.

    만약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내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그를 구했을 리 없었다. 그런 나 자신을 알고 있기에 이환의 감사와 여사님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양심이 아팠다.

    “저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실장님을 구한 것도 의도한 게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의도한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구한 거지. 해민 씨의 착한 마음이.”

    말이 또 그렇게 되네.

    절대 그렇지 않다고, 나는 남을 위할 여유가 없는 말라비틀어진 놈이라고 해명하고 싶었는데 자꾸 오해만 깊어졌다.

    “계속 말하지만, 편하게 지내요. 편하게. 해민 씨가 불편하면 우리가 미안하니까. 해민 씨 힘들게 하려고 여기 두는 거 아니거든.”

    “너무 안 힘들어서 문제예요.”

    “안 힘들면 편히 쉬면 되지. 일 없으면 놀면서 쉬다가 할 일 생기면 그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나 봐요, 나도 놀면서 일하는데. 우리 도련님 아침저녁으로 식사 챙겨 주면 나도 하는 일 거의 없어.”

    “이 큰 집의 살림을 다 하시잖아요.”

    “내가? 아닌데? 나는 그냥 도련님 식사만 챙겨 주고 운동 삼아 청소기 돌리고 그러지. 낮에 일 도와주는 사람이 서너 시간씩 왔다 가요. 내 나이가 몇인데 살림을 해. 이 나이에 걸레질하면 무릎 나가.”

    지금 뭔가 미묘하게 감동이…….

    “난 그냥 도련님한테 얹혀사는 거야. 나이 들어서 이제 일도 못 하는 노인네, 혼자 살면 적적할까 봐 우리 착한 도련님이 돌봐 주는 거지.”

    “그, 그러시구나.”

    오늘 의도치 않게 많은 것을 들어 버렸다. 딱히 듣지 않아도 될 것까지.

    “그나저나 우리 도련님,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던가요? 핏덩이 같던 도련님이 언제 저렇게 커서 일한다고 회사를 나가고.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네, 일…… 열심히 하세요. 네.”

    적어도 오전에는 성실하게 일했다. 비록 오후 일정을 내일로 미루긴 했지만, 할 때는 열심히 하는 듯 보였다.

    여사님을 위해 일부 진실을 감추고 일부의 진실만을 말하자, 훌륭한 아들을 키워 낸 어머니처럼 뿌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리 도련님. 이렇게 장성했으니 이제 착하고 예쁜 오메가 만나 결혼해서 도련님 닮은 아이 낳고 알콩달콩 사는 것만 보면 소원이 없겠는데……, 애초부터 그건 그냥 소원이었던지라 현실성이 없어서 포기했어.”

    “네?”

    아까부터 자꾸 끝마무리가 이상한데요, 여사님.

    “좋아하는 사람이랑 잘 살기만 하면 내가 편히 눈감고 죽을 수 있을 것 같고.”

    “아직 정정하신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러니까요. 그건 보고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거지. 이마저도 불가능하려나 했는데 해민 씨가 와 줘서 참 다행이에요.”

    내 손을 붙잡고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여사님이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역시나 마무리가 이상하신데요, 여사님.

    “늙으니까 말만 많아져. 노인네 이야기 듣느라 고생했어요. 차도 다 마셨으니까 이제 일어납시다.”

    조금 전까지 엄청 슬프고 찡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자리에서 일어선 여사님이 빈 잔을 싱크대에 넣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먼저 들어가세요. 제가 설거지할게요.”

    “아니야.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해 줄 거야. 귀찮으니까 내일 아침 식사한 뒤에 같이 하면 돼.”

    “아, 네.”

    식기세척기라는 좋은 놈이 있었구나.

    여사님은 나보다 더 신문물에 적응을 잘하신 모양이다.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며 침실로 돌아왔다.

    5

    “실장님,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내 말에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린 이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화장실 갈 때마다 보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해민 씨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어디를 갔는지 궁금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민 씨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말씀도 상냥하셔라.

    “죄송합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죄송할 일도 아니고 감사할 일도 아니죠. 다녀오세요. 조금만 더 하면 점심 먹으러 나갈 수 있을 듯합니다.”

    “네.”

    짧게 대답하고 종종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계속 들락거리기 뭐해 참았던 용변을 처리한 후 손을 씻고 개운하게 화장실을 나왔다. 한결 느긋해진 걸음으로 이환의 사무실로 향하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누군가가 나를 추월해 급히 걸어가다가 이내 멈칫했다.

    “아, 이런 씨.”

    짧게 욕설을 내뱉은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야, 영업 4팀 내려가서 최 대리한테 서류 한 장 빠졌다고 가지고 올라오라고 해.”

    “……네?”

    뜬금없는 심부름에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남자가 성난 코뿔소처럼 콧김을 불어 댔다.

    “내 말 못 들었어? 영업 4팀 가서 서류 가져오라고 하라고. 이게 회사에 얼 빼놓고 다니네. 너 이 새끼야, 어느 부서야? 어느 부선데 애새끼 교육이 안 되어 있어?”

    수선한 슈트를 받아 온 기념으로 처음 입고 나왔더니, 사원으로 오해를 했나 보다. 거기까지였다면 나름대로 색다른 경험이었다고 웃어넘기겠는데, 난데없는 심부름에 욕까지 처먹었다.

    어딜 가나 흔히 있는 일이다. 이전에 일했던 식당에서도, 공사장에서도, 어디에서 일을 하든 조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욕부터 박고 시작했다.

    그때는 어쨌든 돈을 벌어야 했기에 꾹 참았지만, 지금은 굳이 참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어차피 눈앞의 사람과는 상관도 없고 다시 볼 일도 없을 듯싶은데.

    같이 욕을 뱉어 볼까 하는 충동이 들었지만, 여기는 이환이 다니는 회사이고 나는 이환에게 고용된 사람이니까 회사 사람과 마찰이 일어나면 중간에 낀 이환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아야겠네.

    약간의 고민 끝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야 이 쓰벌놈아. 왜 대답이 없어! 내 말 안 들려? 어린 노무 새끼가 어른이 말하는데 귓구멍을 처막고 있냐? 이거 아주 기본이 안 되어 있는 놈이네. 야, 야!”

    “죄송합니다. 영업 4팀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요. 급하시면 전화로…….”

    “이런 얼빠진 새끼가.”

    뻑 하고 머리통을 맞았다. 뭐가 그리 화가 나는지 남자는 들고 있던 두꺼운 서류철로 수그린 내 정수리를 퍽퍽 두들겼다.

    “눈치도 없고, 빠릿빠릿하지도 못하고, 능력도 없고. 너 같은 놈들이 동기들 승진할 때 밑바닥 깔아 주고, 백날 천날 복사나 하러 다니는 거야. 누구 밑에 있는지는 몰라도 참 깝깝하다, 깝깝해.”

    깝깝에 리듬을 맞추듯 서류철이 머리에 부딪혔다. 퍽퍽 내려칠 때마다 고개가 수그러졌다.

    고개 숙이고 넙죽 엎드려 빌빌거리기를 바라는 거겠지. 만만한 놈 하나 골라잡아 실컷 화풀이를 해야 또 높은 사람 앞에 가서 자존심 내려놓고 살살거릴 에너지가 생길 테니까.

    재수 없게 걸렸다 싶으면서도 눈앞의 남자가 같잖아 웃음이 나왔다. 작게 흩어지는 코웃음 소리를 들었는지, 머리를 때리던 서류철이 방향을 바꿔 옆얼굴을 후려쳤다.

    “또라이 같은 새끼가, 웃어?”

    모서리로 스쳤는지 눈가가 따끔했다. 손가락으로 더듬자 옅게 피가 묻어났다.

    “미쳤냐? 너 잘리고 싶어?”

    맞은 뺨에 다시 서류철이 부딪쳤다. 연거푸 뺨을 맞고 있는데 뒤에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겁니까!”

    “이 실장님.”

    이환도 화장실을 가려고 나왔나.

    이환의 등장에 남자가 황급히 서류철을 뒤로 감추고 허리를 수그렸다.

    “해민 씨?”

    고개를 푹 숙이고 선 나를 발견한 이환이 놀란 목소리로 부르며 고개를 들게 했다.

    “이게 무슨……. 얼굴이 왜 이래요.”

    “…….”

    때린 남자도 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묻겠습니다. 얼굴이 왜 이럽니까.”

    “…….”

    “해민 씨는 묵비권이고. 그쪽은 할 말 없습니까?”

    “그게…… 여기 있는 사원에게 급한 심부름을 시켰는데 말을 무시하고 딴소리만 해 대더니 건방지게 비웃어서…….”

    아저씨, 차라리 나처럼 묵비권을 행사하지.

    왜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성격 좋은 이환이 화를 내지는 않겠지만, 그렇기에 회사 내의 폭력이라는 부조리를 그냥 넘어가지도 않을 듯했다.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지는 몰라도 회장 아드님보다 더 높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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