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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20)화 (20/172)
  • 20화

    미리 땡겨 받은 월급만 아니라면 도망가고 싶었다. 약간의 망설임을 알아차렸는지 이환이 조심스럽게 내 뺨을 손으로 감쌌다.

    “왜 대답이 없어요?”

    “네, 도망…… 안 가요.”

    솔직히 못 가는 쪽에 가까웠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이환은 내 대꾸에 만족한 얼굴을 했다.

    “해민 씨가 원하는 건 뭐든 해 주겠습니다. 그러니 도망가지 말아요.”

    그럼 일단 요정 발언부터 금지하자고 말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건 이환의 성격과 정체성에 뿌리를 둔, 아주 중요한 동심의 기초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왜요?”

    원하는 것 대신 이환에게 물었다.

    “전 그냥 일하는 사람일 뿐인데. 원하는 건 실장님이 제게 해 주실 게 아니라, 제가 실장님에게 해 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원하는 건 해민 씨가 옆에 있어 주는 거니까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이제 해민 씨가 원하는 걸 내가 들어주고 싶어요.”

    고용주가 해 주고 싶다는데 뭐라고 하겠나. 원하는 대로 하셔야지. 하지만 이환이 굳이 내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어 하는 이유만큼은 알고 싶었다.

    “내가…… 요정님이라서요?”

    “해민 씨, 요정님이었습니까?”

    아이, 씨.

    이환의 눈높이에서 말하려던 시도는 오히려 놀림거리가 되어 버렸다. 스스로 내뱉은 말에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자 이환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해민 씨는 요정이 아니죠. 이렇게 만져지니까.”

    뺨에 닿은 손바닥에서 온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고용 하루 만에 급격히 가까워진 고용주와의 거리감이 부쩍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슬그머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의 손에서 벗어나자, 비어 버린 손이 몹시 아쉬운 듯 이환이 허공을 움켜쥐듯 손을 오므렸다.

    “실장님.”

    혹시 저 좋아하세요?

    묻지 못한 말이 입 속에 맴돌았다.

    “…….”

    내 부름에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던 이환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주한 시선이 올곧게 나를 응시했다. 모든 것을 투영하듯 새까만 눈동자는 오직 나만을 담고 있었다.

    이환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혹시나 그가 혼란스러운 내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습지도 않은 질문을 품고 있는 내 속내가 드러날까 문득 부끄럽고 두려워졌다. 얼굴을 가리고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해민 씨 눈 속에 별이 있네요.”

    살며시 올라온 손끝이 눈가에 닿았다. 미미한 열기를 품고 있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못내 조심스러웠다.

    그의 눈 속에 담긴 나는 내가 보았던 나와 같은 모습일까.

    한참을 고민했으나 끝내 알 수 없었다.

    ∞ ∞ ∞

    “해민 씨? 왜 내려왔어요?”

    “물 좀 마시려고요.”

    이환을 씻기고 입히고 저녁까지 먹여 서재로 들여보낸 후, 나는 이른 자유를 얻었다. 그래 봤자 할 일이 없어서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렇게 굴러다니다 목이 말라 내려왔더니 주방에 여사님이 앉아 계셨다.

    “음식이 짰나?”

    “아뇨. 목이 좀…….”

    “감기?”

    “아뇨. 그냥 목이 말라서요.”

    관심도 과하고 걱정도 과하다.

    기껏해야 밥은 먹었냐 정도의 관심만 받아 보다가 물 마시는 것까지 염려를 듣고 있노라니 불편하면서도 기쁘고 귀찮으면서도 뿌듯하고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갈구하는 본능이 존재한다더니. 나도 몰랐는데 내게도 관심종자의 기질이 있었나 보다.

    “여사님은 뭐 하고 계셨어요?”

    “차 끓는 거 기다리고 있었어. 해민 씨도 같이 차 한 잔 마실래요?”

    “……네.”

    딱히 끌리지는 않았지만, 노인네 혼자 두고 가기엔 적적해 보여서 주방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둥굴레차인데 해민 씨가 괜찮으려나. 다른 거 줄까요? 녹차나 홍차도 있는데.”

    “괜찮아요. 저도 그거 주세요.”

    마신다는 행위가 중요하지, 무엇을 마시는지는 딱히 중요치 않았다. 녹차나 홍차나 무슨 맛인지 모르는 건 비슷했으니까. 어차피 물에 풀 씻은 맛이지.

    “오늘 회사 따라갔던 일은 어땠어요. 힘들지 않았고?”

    포트에서 팔팔 끓는 차를 한 김 식혀서 예쁜 유리잔에 따라 주며 여사님이 물었다.

    “하는 일이 없어서 힘들 수가 없었어요. 다만 너무 할 일이 없다 보니까 걱정이 좀 되네요.”

    “걱정될 게 뭐 있어. 하루 이십사 시간 남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아닐 때는 편히 쉬면 되지.”

    “실장님 회사 출근하신 뒤로 퇴근하실 때까지 저는 계속 쉬고만 있었는데요.”

    내 대꾸에 여사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련님이 손으로 뭘 만드는 분도 아니고, 앉아서 서류 보고 결재하고 그러시니 크게 도움이 필요한 일은 없을 거예요. 회사에서는 거의 그렇다고 생각하고 해민 씨는 따로 시간을 보낼 일을 찾아야 해. 멍하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잖아. 그게 하는 일 없이 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데.”

    “맞아요. 차라리 막노동하는 게 마음은 더 편할 것 같더라고요. 그렇다고 나름 업무 시간인데 딴짓을 하면 안 될 것 같고.”

    “아이고. 일 분 대기조처럼 있지 않아도 된다니까. 책을 가져가서 읽거나 공부를 해도 좋고.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든가, 음악을 듣든가. 아무튼 뭐라도 해요. 이러다 사람 말려 죽이겠네.”

    그렇다고 어떻게 고용주를 앞에 두고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볼 수 있나. 생각해 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도움은 되지 않는 충고였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편히 지내요. 하루 이틀 일할 것도 아닌데, 너무 긴장하고 있으면 탈 나. 해민 씨가 착하고 성실한 건 알지만, 조금은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여유.

    동글동글한 글자에 부드러운 어감의 좋은 느낌이 나는 단어다. 그런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글자가 제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이지만.

    “그런 거…… 모르겠어요.”

    “그럼 이번에 알아보면 되겠네. 일주일 일하고 그만둘 거 아니잖아. 여기 있는 동안에 여유로움이 뭔지,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네요.”

    여사님이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내 손등을 감쌌다. 그 손길에는 둥굴레차보다 더 따스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삶은 원래 팍팍한 거래요.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아픔이 있어. 누가 더 힘들고 누가 덜 힘들고, 비교할 수가 없어요. 그냥 내가 제일 힘들지. 누구는 좋은 옷 입고, 좋은 밥 먹고, 좋은 집에 살아서 인생 편할 것 같지만, 그 사람도 힘든 일은 있을 거야. 나도 그렇고. ……해민 씨도 많이 힘들죠?”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묻는 말에 울컥 서러움이 솟구쳤다.

    아, 눈물 질질 짜는 신파는 싫은데.

    내가 이렇게 힘들다고, 나 고생하고 있다고, 죽을 것 같다고 타인에게 말해 봤자 도움 되는 건 하나도 없고. 불쌍하게 좀 봐 달라고 악을 쓰는 것도 추해 보이고. 울어 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그냥 서럽고 또 서러웠다.

    “괜찮아요, 괜찮아. 내 나이 먹고 보니 인생이란 게 그렇더라고. 요 인생이라는 놈이 참 얄궂은 게, 힘들어서 당장 죽을 것 같은데 기다리다 보면 숨 쉴 구멍이 생기더라고. 딱 죽지만 않을 정도로 간당간당하게 숨구멍을 열어 준단 말이야. 그 구멍을 찾아서 숨을 쉬고, 더 크게 찢고 나오면 살아지는 거고. 아니면 꽥 죽어 버려.”

    뭔가 훈훈했는데 마무리가 이상했다. 훌쩍하고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숨 쉴 구멍을 찾아요. 찾으면 그 구멍을 넓혀서 나오면 돼.”

    “저한테는 없어요. 그런 거.”

    “아니야. 해민 씨에게도 분명 그런 기회는 올 거고, 나는 해민 씨가 이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그런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울지 말고 차 좀 마셔요, 하며 여사님이 찻잔을 밀어 주었다. 뜨거운 김이 날아가고 미지근해진 둥굴레차를 홀짝거리며 삼켰다.

    “내가…… 서른이 안 되었을 때였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내가’ 하고 한참 뜸을 들이던 여사님이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내가 그때 개차반 같은 서방 놈이랑 살고 있을 때였거든. 술, 폭력, 도박하는 놈이랑은 절대 살면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내 서방은 뭐 좋은 거라고 그 세 가지를 아주 고루 했어. 술 처먹고 도박하다 돈 다 잃고 기어들어 와서 마누라를 개 패듯이 팼지.”

    “…….”

    “그 시절은 지금처럼 이혼이 흔하지 않았어. 서방이 나가서 계집질을 해도 마누라가 문제라며 손가락질을 했고, 집에서 마누라를 때려도 이유가 있겠거니 하던 시절이었거든. 사람들이 나쁜 게 아니라 인식이 그랬어.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는 그냥 참고 살아야 했던 시절이었지. 시골이라서 더 그랬을 거야. 아무튼 그랬는데…….”

    말을 잇기가 힘든 사람처럼 여사님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골랐다.

    “그때…… 내가 애를 배고 있었는데…… 남편 놈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을 엄청 먹고 들어와서 나를 때렸단 말이에요. 아직도 기억나. 그때가 딱 칠 개월 되던 때였어. 머리통을 맞아서 쓰러졌는데 손으로 때리다 못해 발로 밟더라고. 아, 이렇게 맞다가 죽겠구나 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애만 죽고 나는 살았어. 수술해서 죽은 애를 꺼내고 나는 몸도 안 풀린 상태에서 도망쳤어요. 그 집에서 내 새끼 죽인 살인자 놈하고 같이 살 생각을 하니까 숨이 안 쉬어지는 거야. 자식 잃은 년이 그래도 살고 싶다고 그렇게 도망을 쳤어.”

    “……많이 힘드셨겠어요.”

    어떤 말로 위로를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여사님은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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