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무래도 단정한 스타일을 선호하시는 것 같네요.”
직원은 구멍이 나거나 너덜거리는 옷들을 한쪽으로 치워 버리고, 기본 스타일의 티셔츠와 남방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저보다 실장님이 원하시는 옷을 골라야 하지 않을까요.”
모처럼 할당된 일이니 열심히 하고자 의욕을 부리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옷을 입을 사람은 이환인데 내 저급한 수준의 눈으로 골라도 될까 의문이 들었다.
이런 티셔츠와 남방을 이환이 입는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잘못 고르고 있는 기분도 들었다. 이런 가벼운 옷을 입고 있는 이환이라니,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내 물음에 직원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실장님 스타일에 맞추시려고요?”
“아무래도 그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럼 여러 벌 고른 뒤에 마지막 선택을 이 실장님께 부탁드리는 건 어떨까요.”
좋은 방법이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며 감탄한 눈으로 직원을 바라보았다.
“오늘 처음으로 의욕적인 얼굴이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옷을 골라 자리로 돌아오자, 어떤 책자를 보고 있던 이환이 생긋 웃으며 나를 반겼다.
“오늘 처음으로 일을 한 기분이라서요.”
“저런. 출근 전에도 나를 열심히 도왔잖아요. 점심 먹을 때도 그랬고.”
그런데 영 일을 한 기분이 들지 않아서 문제였지.
“제가 고른다고 골랐는데 실장님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어요.”
“마음에 듭니다.”
“아직 보지도 않으셨는데요.”
“보지 않아도 마음에 듭니다. 해민 씨는 어떤 걸 입어도 다 어울릴 테니까.”
“……?”
난데없는 칭찬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지금은 대상이 바뀐 것 같은데. 내가 아니라 본인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차라리 ‘나는 어떤 걸 입어도 다 잘 어울립니다.’라고 했다면 듣기에 재수는 없을지언정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을 터였다.
“입어 보는 건 집에서 하겠습니다. 정장은 수선 끝나면 연락 줘요. 다시 입어 보고 체크해야 하니까. 나머지는 한 시간 안에 받아 볼 수 있도록 보내고. 여기 체크한 것도 같이. 사이즈는 아까 적어 둔 것을 확인하고. 아, 그리고 카디건은 뺍시다. 생각해 보니 필요 없을 듯하네요.”
“네, 실장님.”
정작 옷 사러 온 사람은 소파에 앉아 있기만 했는데 쑥쑥 진행이 되어 어느새 끝나 버렸다. 이환이 지갑에서 꺼낸 카드를 건네받으며 설레는 얼굴로 웃는 직원을 바라보았다.
“해민 씨?”
“네, 네?”
“아뇨, 멍한 얼굴을 해서. 자꾸 그렇게 귀여운 얼굴을 하면 보는 사람 심장에 해롭습니다.”
어이쿠, 농담도.
바보 같은 얼굴이라고 돌려 말하는가 싶어서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안 입어 보고 사셔도 돼요? 뭐 골랐는지도 확인 안 하셨잖아요.”
“제 마음에 들어야 합니까?”
“당연하죠.”
입는 사람 마음에 들어야지.
당연한 대답이었으나 이환은 오히려 황송한 말을 들은 듯 감격한 얼굴을 했다.
“해민 씨 마음에 든다면, 저 또한 좋습니다.”
고용주가 참 착하기는 한데, 뭐랄까…… 말로 하기엔 조금 꺼림칙한 그런 무언가가 있었다.
“아, 예.”
대충 얼버무려 대답하며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었지만, 셔츠에 튄 김칫국물처럼 혹은 장판에 눌어붙은 음식 자국처럼 찜찜함이 남았다.
∞ ∞ ∞
이환은 회사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지 백화점을 나와 집으로 차를 몰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퇴근을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는데 그는 개의치 않았다. 가뜩이나 여름이라서 해도 늦게 떨어지는데, 여섯 시도 되지 않은 시간인지라 너무나도 환했다.
오전에 보았던 백윤경은 어디에 있을까. 비서는 상사 곁에 붙어 다니는 사람이 아닌가. 적어도 그가 옆에 있었다면 이환의 이른 퇴근을 말리는 시늉이라도 했을 텐데.
지금의 상황이 괜찮은지 아닌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나로서는 이환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급하게 사느라 백화점으로 갔지만, 다음에 일정을 봐서 양장점에 가도록 하죠. 구두도 수제화로 다시 맞추고.”
“네.”
급하셨구나. 급하신 이유를 모르겠지만 급하셨다니 그렇구나 했다. 그걸 왜 나한테 하나하나 말씀해 주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급하셨다니까.
“그런데, 퇴근하시는 거예요?”
“새 옷을 샀으니 입어 봐야죠.”
“네에.”
오전에는 아무리 부자라도 일은 열심히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오후 시간을 쇼핑하느라 통으로 농땡이 치고 이른 퇴근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회사를 슬렁슬렁 다니시나 하는 생각도 들고.
고용주의 생활을 이해하기엔 하루의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최고로 맛있는 것을 먹고, 최고로 좋은 옷을 입어야죠.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저 자부심, 저 자신감.
저런 당당함은 가진 돈에서 나오는 걸까. 아니면 그만큼 자존감이 높아서일까.
나로서는 이때까지 머릿속으로조차 생각해 보지 못했던 말을 당당하게 꺼내는 이환이 눈부셨다. 그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착했습니다, 실장님.”
“그래요, 수고했습니다. 김 기사님은 바로 퇴근하세요.”
“네, 들어가십시오.”
손수 문을 열고 내린 이환이 내게로 손을 뻗었다.
팔도 다치신 분이 하나 남은 손으로 뭐 하시는 건지.
그렇다고 내치거나 무시할 수도 없어서, 최대한 이환에게 부담이 되지 않게 잡는 시늉을 하며 얼른 차에서 내렸다.
벨을 누르자 이환의 얼굴을 확인한 여사님이 바로 문을 열어 주셨다.
“왜 이렇게 퇴근이 일러요?”
“오후 일정이 없어서 일찍 왔습니다. 집으로 뭘 보냈는데 혹시 왔습니까?”
“아까 왕창 가져다 놓고 갔어. 거실에 뒀어요.”
“이건 오는 길에 샀습니다. 드세요.”
집으로 오는 길에 들른 베이커리에서 산 케이크를 여사님께 넘겨주고 이환이 저택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아직까지 손이 잡혀 있는 탓에 여사님에게 어설픈 인사를 하고 덩달아 끌려 들어갔다.
“살짝 보니까 옷이던데.”
주방에 케이크를 두고 온 여사님이 거실 소파에 앉아 쇼핑백 안을 뒤적거리는 이환에게 물었다.
“해민 씨가 옷을 충분히 챙겨 오지 못한 듯해서요. 급하게 필요한 일이 있을지도 몰라 슈트 두어 벌하고 당분간 입을 옷 좀 사 왔습니다.”
“어머, 그랬구나.”
“저요?”
감탄하는 여사님과 달리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한 질문을 했다.
“네, 우리 같이 가서 고르지 않았습니까.”
“그건 실장님 옷…….”
정장도 일상복도 이환의 옷만 샀지, 내 옷은 산 기억이 없는데. 뭐지?
멍청하게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 이환이 작은 동물을 앞에 두고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처럼 웃었다.
“내가 언제 내 옷을 산다고 했습니까.”
“아까…….”
아까…… 그런 말을 안 했었나?
하지만 누구라도 이환의 옷을 산다고 생각하지, 곁다리로 동행한 내 옷을 산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까 누구 사이즈를 쟀습니까. 그게 적어도 내 사이즈는 아니었는데.”
“제 사이즈……. 그런데 그건 몸에 맞게 옷을 입어야 괜찮은지 판단할 수 있다고 하셔서…….”
“덕분에 예쁜 옷으로 고를 수 있었죠.”
뭐지. 딱딱 맞는 말만 해서 반박할 수가 없네.
“그럼 진짜 정장이랑 일상복이랑, 다 제가 입을 옷을 사신 거예요?”
“당연하죠. 아침에 내 옷장을 보지 않았습니까. 내가 슈트가 필요해 보이던가요.”
네, 필요해 보이지 않았죠.
의아하긴 했으나, 단순히 부자들의 돈지랄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양말을 일곱 개 사서 일주일 신는 것처럼, 팬티 일곱 장을 사서 일주일 돌려 입는 것처럼. 부자들은 슈트 일곱 벌로 일주일을 입는다고 생각하면, 스케일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게 아니었구나.
“제 옷이라면 안 사셔도 되는데…….”
“안 사도 되지만 사도 되죠.”
이환은 가끔 엉뚱한 발언으로 할 말이 없게 만들기도 하지만, 또 가끔 이렇게 논리적으로 할 말이 없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해민 씨가 예쁜 옷을 입은 모습도 보고 싶고요. 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굴러다니는 음료수 캔보다 고풍스러운 화병에 꽂혀 있는 게 더 보기 좋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긴 하다만, 이게 꽃까지 가져와 비교할 일인가.
“그러고 있지 말고, 하나씩 입어 봐요. 백화점에서는 불편해 보여서 일부러 자리를 옮긴 겁니다.”
그런 배려까지.
덕분에 고용주의 눈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한 패션쇼를 하게 되었다.
“어머나, 예뻐라. 저 분홍색 카디건은 누가 고른 거예요? 해민 씨 피부색이랑 너무 찰떡인데.”
“그건…… 빼라고 했는데 딸려 왔나 보네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환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왜에. 잘 어울리는데.”
“그러게요. 분홍색이 잘 받는군요. 반품해야겠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은 불편한 그의 심기를 대변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환이 내게 다가와 분홍색 카디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누가 봐도 요정님이라고 하겠는데.”
“…….”
“나한테 예뻐 보이는 사람이 남들 눈에 안 예뻐 보일 리 없고. 그런 상황에 이렇게 예쁜 옷까지 입고 있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딱히 대꾸할 말은 없고, 조금씩 식은땀이 돋아났다. 면전에서 듣는 예쁘다, 귀엽다 하는 칭찬이 익숙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벗어요. 반품합시다.”
“도련님, 심술부린다. 예쁘면 예쁘다 해 주고 끝내요.”
“네, 너무 예뻐서 안 되겠네요.”
카디건 소매 끝으로 삐죽 나온 내 손끝을 붙잡고 꾹꾹 잡아당기며 이환이 심술궂은 사내아이처럼 불퉁거렸다.
“집에서만 입고 밖에 나갈 때는 입지 말아요.”
“그렇게 심술 맞게 굴면 요정님 달아날걸.”
배달 온 옷들을 세탁해야겠다며, 여사님이 산처럼 쌓인 옷을 착착 포개어 세탁실로 들어갔다. 약 올리듯 남긴 여사님의 말에 이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해민 씨, 도망갈 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