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8)화 (18/172)

18화

잠시 기다리고 있자 옷이 걸린 행거가 줄줄이 들어왔다.

“이환 실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단골손님인가. 이환의 이름을 알고 있네.

신기하면서도 의아한 마음에 백화점 직원과 이환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이환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어 직원의 입을 막았다.

“슈트부터 봅시다.”

“네, 실장님. 생각하신 브랜드가 있다면 먼저 보이겠습니다.”

“이번 시즌 제품으로 하나씩 꺼내 봐요.”

“알겠습니다.”

뭔가 명령하는 자세가 익숙하다. 그 명령을 수긍하는 직원 또한 익숙해 보이고. 이 자리가 불편한 사람은 나뿐인가 보다.

끼어들 타이밍도 아니고, 끼어들어서 할 말도 없기에 입을 꾹 다물고 없는 사람처럼 존재감을 지웠다.

“OO의 슈트입니다. 첸토벤티밀라 울 소재로 제작되어 가볍고 매끈하며 부드러운 감촉을 자랑합니다. 우아한 레귤러 핏의 슈트는 다양한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죠. 재킷은 클래식한 숄더 디자인과 노치 라펠, 플랩…….”

뭐라는지 알 수 없는 전문 용어가 혼란스럽게 만들어 얼른 머릿속을 비워 냈다. 분위기 깨지 않게 듣는 척만 해야지. 진지한 표정으로 적당하다 싶은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떻습니까, 해민 씨.”

어떻기는.

이렇고 보고 저렇게 봐도 그냥 정장이다. 정장같이 생긴 정장을 보고 어떤 감상을 내놓아야 할지 고민되었다.

“아주…….”

“아주?”

“아주 멋있네요.”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화색을 띠는 직원과 달리 이환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뭔가 못마땅한 듯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다른 것으로.”

“고급 울 트윌 소재로 제작한 OOO의 시그니처 네이비블루 슈트입니다. OOO의 슈트는 세련된 디자인으로 젊은 분들이 선호하십니다. 노치 라펠과 허리선을 잡아 주는 다트 디테일…….”

역시나 알아듣지 못하는 영역의 대화다.

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일 타이밍을 노렸지만, 안타깝게도 이후로 이환은 내게 감상을 묻지 않고 계속 다른 정장을 요구했다. 그렇게 열댓 벌의 정장을 보고 난 후, 고민하는 얼굴로 이환이 나를 돌아보았다.

“해민 씨.”

“네, 실장님.”

“그냥 눈으로만 보기에는 고민이 되네요. 미안하지만 입어 볼 수 있겠습니까? 힘들 테니 두어 벌만.”

“네, 괜찮아요.”

인간 마네킹이면 어떠한가. 출근한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이 멀뚱거리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라도 시켜 준다면 오히려 고마웠다.

“사이즈부터 재도록 해요.”

“제 사이즈를요?”

“핏이 살아야 예쁘니까요.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 그 옷의 장점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사이즈를 굳이? 라고 생각했으나, 이환의 판단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하긴,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몸에 맞지 않는다면 이상해 보이겠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입혀 보려 하는데,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착용한 모습을 보는 이유가 없다.

“이후로도 필요할 수 있으니까 전체적으로 싹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실장님.”

이환의 눈짓에 직원이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마네킹처럼 멀뚱하게 서 있으려니 줄자를 가져온 직원이 키부터 시작하여 어깨너비, 가슴둘레, 허리둘레, 상체와 하체의 길이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발 사이즈도.”

“슈트를 입어 보시려면 구두도 신으셔야겠네요.”

말이 아닌 시선으로 대화를 하는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몇 번의 시선을 주고받은 직원이 사이즈에 맞는 옷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이백오십이라니. 해민 씨는 손도 작고 발도 작고, 귀엽네요.”

“……감사합니다?”

똘똘하다, 야무지다, 악바리다, 아들 같다 등등의 칭찬은 같이 일하던 아저씨들에게도 많이 들었지만, 작아서 귀엽다는 칭찬은 난생처음이었다. 사내새끼한테 작아서 귀엽다는 말이 진짜 칭찬인지 조금 미묘한 기분도 들었다.

“손,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작은 손은 처음 본다, 뭐 그런 뜻은 아니겠지.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보여 주지 못할 수준도 아니고 하늘 같은 고용주님의 요구인지라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는 이환의 커다란 손을 보니 확실히 내 손이 작긴 작아 보였다.

“해민 씨 손이…….”

흡, 하고 숨을 멈춘 이환은 무언가를 꾹꾹 참는 얼굴이었다.

“작고 귀엽네요.”

“아, 예에.”

“작지만 단단해요.”

“굳은살이 박여서요.”

작지만 귀엽지는 않다. 살짝 휘어진 손가락은 굳은살까지 박여서 울퉁불퉁하고 거칠었다.

“그만큼 해민 씨가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지요.”

친절한 고용주는 상대방이 듣기 좋게 말하는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고생을 많이 한 손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열심히 살아온 손이란다. 무언가 속에서부터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실장님, 준비되었습니다.”

정장이 걸려 있던 행거가 밀려나고 새로운 행거가 자리를 차지했다.

“해민 씨, 부탁합니다.”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며 이환은 관전자처럼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탈의실에서 셔츠와 바지를 갈아입고 나오자 직원이 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정장 재킷까지 걸치고 이환을 향해 돌아서자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그는 뭔가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구두는?”

“베이직한 스타일로 준비했습니다.”

직원의 손짓에 누군가 구두 한 켤레를 들고 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꼬질꼬질한 운동화를 벗고 조심스럽게 구두를 신었다.

“거울.”

이환의 말 한마디에 구두가 나오고, 거울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환이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아 거울을 향해 돌려세웠다.

“어때요.”

“……괜찮은 것 같아요.”

역시나 정장은 그냥 정장이다.

멋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처음 입어 보는 정장이 어색하기만 했다.

어울리지 않아.

딱 맞는 사이즈를 입혔는지 옷이 몸에 착 감겼지만, 내 것이 아닌 옷을 훔쳐 입은 사람 모양 불편했다.

“바짓단 좀 잡아 줘요. 허리도 좀 큰 것 같은데.”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이리저리 정장을 만지작거리더니 낙낙한 곳에 핀을 꽂아 옷태를 맞추었다.

“이렇게 보니 요정님이 아니라 천사님 같네요.”

요정에 이어 천사까지 나왔다.

요정 같다, 천사 같다. 평범한 사람들도 드물게 비유를 위해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이환은 진심으로 실존한다 믿고 있는 존재로서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현명하게 침묵했고, 실상을 알지 못하는 직원은 그저 흐뭇하게 웃음을 지었다.

“잘 어울려요. 해민 씨는 뭘 입어도 예쁘겠지만.”

이환은 확실히 만족한 얼굴로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일단 고용주가 만족한다는 점에서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오늘 하루를 놀면서 보내지 않는구나,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는구나.

“이거하고, 아까 세 번째 슈트. 그것도.”

핀이 빠지지 않게 조심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다음으로 갈아입을 옷을 들고 탈의실로 넣어졌다.

조금 전까진 지루하기만 했는데, 이환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힘이 났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매무시를 정리하고, 아까처럼 기장과 품을 손봤다. 그러한 과정을 서너 번 반복했고, 이환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가 입었던 옷들을 모조리 주문 넣었다.

엄청 마음에 들었나 보네.

집에도 많이 있는 정장을 이렇게 또 살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부자들은 부자들만의 쇼핑 습관이 있을 테니까.

“이제 일상복을 보죠. 해민 씨가 골라 볼래요?”

“제가요?”

“슈트면 몰라도 일상복은 각자 스타일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요. 각자 원하는 스타일이 있기 마련인데, 그걸 왜 나한테 시키시죠. 입으실 분이 직접 고르셔야지.

게다가 옷을 고르는 나의 기준은 스타일보다 가격이 우선이었다. 그건 이환이 가장 관심 없을 기준이기도 했다.

“제가 시각적인 감각이 그리 뛰어나지 않아서……. 차라리 직원 추천을 받는 게 어떨까요. 전문가가 괜히 전문가는 아니잖아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숨기려 하고, 남에게 도움을 구하기보다 자신의 편협한 선택을 주장하기 마련인데. 해민 씨는 겸손하고, 또 현명하네요.”

“…….”

이게 또 이렇게 칭찬으로 이어진다고?

이환이라는 남자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너무 선하고 긍정적이라, 이환의 앞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요정 발언만 안 하면 참 완벽한 사람인데.

“들었습니까? 해민 씨의 조언에 따라 부탁을 좀 드려야겠네요.”

“맡겨 주세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직원은 기분 좋게 웃으며 나를 안내했다. 바지와 셔츠, 남방 등의 일상복이 걸린 행거가 끝도 없이 밀려 들어왔다.

“이런 베이직한, 음, 기본적인 스타일은 어떠세요.”

직원은 내가 옷의 원단이 어떻고, 어떤 컬러에 어떤 버튼을 사용하고, 어떤 스타일인지 등등을 말해 봤자 못 알아먹는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쉽고 간단한 설명으로 대체했다.

그마저도 내 눈에는 다 똑같은 셔츠에 색깔만 달라 보일 뿐이었지만.

그 와중에 이상한 게 끼어 있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잘못 가져온 것 같은데. 자잘하게 구멍이 난 티셔츠는 좋게 생각하려 해도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직원이 구멍 난 티셔츠를 자랑스럽게 꺼내 보이며 설명했다.

“이런 티셔츠도 개성적이고 세련되어 보이죠.”

“구멍이 나 있는데…….”

“디자인이에요, 디자인.”

하하하, 웃었지만 잠시 정색했던 듯도 하다.

구멍 난 티셔츠를 돈 받고 파는 사람이나, 돈 주고 사는 사람이나 제정신은 아닐 듯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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