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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17)화 (17/172)
  • 17화

    저렇게 말을 하는 건 이정도 이환처럼 알파라는 뜻인가. 그래서 이환이 따로 나와 살고 있나.

    페로몬이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같이 살기가 힘들다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 페로몬이라는 것도 베타는 짐작하기가 어려운 영역이고.

    “오메가였으면 눈 뒤집혀서 환이 침대로 뛰어들었을걸. 한집에서 살기엔 우리 환이 순결이 위험하지. 베타라서 참 다행이다. 그렇죠?”

    “아, 네.”

    그 페로몬이라는 놈이 무슨 흥분제 같은 건가요? 순결이 위협당할 정도인가요?

    이해하기엔 알파와 오메가의 세상이 베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다행이라면서 웃는 얼굴이 묘하게 서늘했다. 둥글게 휘어진 눈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차가운 유리구슬처럼 시리게 빛났다.

    “환이 구해 준 사람이 오늘부터 일한다고 해서 한번 와 봤어요. 곧 점심 먹을 시간인데 같이 밥 먹으면서 대화하는 건 어때요?”

    “아니. 오늘부터 점심에는 약속 안 잡아.”

    내게 던져진 질문을 이환이 냉정하게 쳐 냈다.

    “형이랑 밥 먹는 것도 약속으로 치는 거야?”

    시무룩함을 연기하며. 그래, 그건 연기였다. 딱히 상처받지도 실망하지도 않았으면서 표정만 그럴듯하게 꾸민 얼굴로 말하며 이정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릴 때는 형 뒤만 졸졸 따라다녀 놓고. 이제는 형이 귀찮아?”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양 진심으로 귀찮다는 얼굴을 하며 이환이 이정의 말을 무시했다. 끝내 ‘함께 점심 먹자.’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이정은 “나중에라도 밥 한번 같이 먹자.”라는 말을 남기고 쓸쓸히 퇴장해야 했다.

    ∞ ∞ ∞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은 메뉴판마저 부담스러웠다. 내게 주어진 메뉴판을 송구한 마음으로 받아 들었다. 메뉴판에 적힌 이름만으로 어떤 음식인지 예상하기가 어려웠고, 옆에 붙어 있는 숫자 또한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해민 씨는 채식과 육식 중에 어느 쪽이 좋아요?”

    “고르라고 한다면 고기요.”

    부끄러울 일이 아니라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환은 마치 똑똑한 아이를 바라보는 선생님처럼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고기를 먹어야 잘 크고 살이 붙죠. 해민 씨는 너무 여리고 약해서 한동안은 메뉴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약해 보인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특히나 공사장 같은 곳은 체력이 따라 줘야 하는데, 초반에는 지게질 몇 번이나 하겠냐고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퇴짜 맞고 쫓겨나기도 했었다.

    지금은 생각보다 쉽게 퍼지지 않고, 체력이 후달리면 악으로라도 버티는 놈이라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서 그런 소리를 듣지 않지만.

    어린 나이에 살집 없는 체구는 보는 사람에게 만만함을 느끼게 하는 모양이지만, 체형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어서 바꿀 수가 없고 나이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상 답이 없는 문제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 은근히 통뼈예요.”

    미약하게 항변을 했지만, 머리통 하나는 더 큰 키에 두 배는 됨직한 체구를 지닌 남자는 그저 귀엽다는 듯 웃기만 했다.

    하긴, 저 키에 저런 몸을 가지고 있으면 누군들 연약해 보이지 않을까. 아무리 튼튼하다 말해 봤자 삐약거리는 병아리처럼 우스워 보일 터이다.

    “오늘은 첫날이니, 맛있는 걸로 내가 추천을 해도 되겠습니까?”

    “……네. 맛있는 것으로 시켜 주세요.”

    메뉴판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를 보며 이환은 내 곤란함을 눈치챘는지도 모른다. 그의 부드러운 배려에 감사하며 나는 기꺼이 메뉴 선택을 그에게 넘겼다.

    이환이 직원을 불러 뭐라 뭐라 주문을 했다. 메뉴 주문에 뭔지 모를 용어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형 때문에 조금 당황했나요?”

    식기가 세팅된 테이블을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이환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네. 아니, 아뇨. 괜찮았습니다.”

    동생 옆에 생뚱맞은 놈이 들러붙었으니 걱정된 형의 방문은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놀란 포인트는 이환과 이정의 아버지가 SG 그룹의 회장님이라는 점과 이환이 그냥 부자가 아니라 재벌 집 아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동심이 넘쳐흐르는 이환과 달리 동심이 말라붙었다는 이정의 미묘한 태도.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이쪽을 빤히 바라보던 시선이 아직까지도 들러붙어 있는 기분이다. 단순히 낯선 사람을 향한 경계를 넘어, 꺼림칙한 무언가가 느껴졌었다.

    “형이 내게 관심이 많아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릴 때 형에게 많이 의지했거든요. 그래서인지 아직도 어린애처럼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곁에 사람을 두었다니 해민 씨가 궁금해서 와 봤을 겁니다.”

    요정을 믿는 삼십 대의 동생이라면, 나 역시도 걱정이 될 듯싶은데.

    과보호라고 퉁치기엔 형님의 걱정이 너무 눈물겹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구나 생각해요.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네.”

    “요정님이…….”

    이환이 무언가 말하려는 타이밍에 음식이 나왔다. 요정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되는, 고용주의 말을 무시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타이밍에 잠시 감사했다.

    “일단 먹죠.”

    넓적한 접시에 윤기가 잘잘 흐르는 두툼한 스테이크. 양이 많지 않은 것이 흠이지만, 비싼 가격을 생각하면 틀림없이 맛이 좋을 터이다.

    어서 먹어 달라고 재촉하듯 좋은 냄새를 풀풀 풍기는 고기를 보며 칼질을 하다가 문득 이환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그는 깁스 끝에 삐죽 나온 손가락으로 엉성하게 쥔 포크를 이용해 스테이크를 누르고 나이프로 자르다 멋쩍게 웃었다.

    “해민 씨와 처음으로 외식하는 자리인데 폼이 나질 않네요.”

    이럴 때를 대비하여 고용된 사람이 나인데, 한순간 고기에 눈이 멀어서 내 입에 처넣을 생각만 했다.

    미안하고 죄송하고 면목이 없어졌다.

    하는 일 없이 돈만 받아먹는다, 일이 없어서 따분하다 생각했는데. 사실은 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할 수 있는데, 마음 착한 고용주님께서는 먼저 일을 시킬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손바닥만 한 고기를 거의 난도질하는 수준으로 빠르게 조각냈다. 마음이 급한 탓에 거지꼴을 만들어 놓긴 했지만, 그래도 잘렸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저, 실장님. ……괜찮으시다면 이걸로 드세요. 제가 잘라 놨어요.”

    가만히 지켜보던 이환은 내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거지꼴을 만들어 놓은 스테이크가 사뭇 당혹스럽긴 하겠지.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이환과 내 접시를 바꾸었다.

    “해민 씨가 잘라 준 고기라니.”

    찰칵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이환이 휴대폰으로 내가 잘라 준 스테이크를 사진 찍고 있었다.

    “……실장님?”

    “아, 미안합니다. 기념으로 남겨 두고 싶어서.”

    “기념이요?”

    “너무 감동적입니다.”

    감동까지 나올 일이야?

    이환은 가끔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 사람 말문을 막아 버리는 발언을 종종 했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 못 들은 척 대꾸하지 않으면 예의 없다는 소리를 듣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냥 예의가 없는 쪽이 낫지 않을까.

    갈팡질팡하는 마음으로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예의 없는 놈이 되는 쪽을 선택했다. 대답을 하고 싶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왜인지 앞으로도 종종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묘한 예감 때문이었다.

    “어서…… 드세요.”

    “해민 씨가 잘라 주니 더 맛있을 것 같네요.”

    아, 백윤경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괜히 출근길에 백윤경과 운전기사가 이환의 말을 못 들은 척했던 게 아니었구나.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돈 주는 놈이 왕이고, 돈 주는 놈이 법이다.

    고용주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씨부리게 두는 것 또한 업무의 연장선이다.

    탁월한 서비스 정신으로 적절한 대꾸를 하지는 못할망정, 면전에 대고 개소리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적어도 그의 말을 얌전히 들어 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오전에 책상 앞에 앉아 엉덩이 한번 떼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보아서 그랬을까, 이환이 성실한 회사원이라고 생각했다. 출근길에 오후 일정을 내일로 미루는 그를 코앞에서 보았음에도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회사 안 들어가셔도 괜찮으실까요.”

    “오후 일정은 내일로 연기했으니 괜찮습니다.”

    그게 과연 괜찮은 일일까.

    처음 보는 회사원의 하루는 내게 많은 의문 거리를 던져 주었다.

    이렇게 막 오늘 일을 내일로 미뤄도 정말 괜찮은 건가, 일을 미뤘다고는 해도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 나와 있는 게 허용되는 일인가.

    “그렇게 불편하게 서 있지 말고 이리 앉아요.”

    백화점 최상층의 VIP 전용 공간에 들어와 어색하게 서 있는 나를 이환이 손짓해 불렀다. 손목을 가볍게 잡아당기는 힘에 이환이 앉아 있는 소파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여긴 왜…….”

    “옷을 좀 사야 할 듯싶어서요.”

    “아, 네.”

    쇼핑하러 오셨구나. ……업무 시간에.

    “마시면서 천천히 골라요.”

    준비된 음료를 내 앞으로 밀어 주며 이환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내게 말했다.

    “어떤 걸 골라요?”

    “일단 정장하고, 평소에 입을 옷도 좀 있으면 좋겠고. 아, 카디건도 사야겠네요.”

    드레스 룸에 정장 엄청 많던데. 다른 사람들이 티셔츠 사듯이 재벌가 사람들은 정장을 매년 사는 모양이다. 카디건은 내게 하나를 빌려주어서 새로 사려는 것일까.

    “저 때문에 괜히…….”

    “괜찮으니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대신 예쁜 옷으로 골라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빌려준 옷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친절한 고용주가 상냥하게 웃었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패션과는 동떨어진 눈을 가지고 있지만 최대한 그와 어울리는 옷을 골라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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