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6)화 (16/172)

16화

4

SG 그룹.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업.

어느 가정이든 SG의 제품이 하나 이상은 있을 정도로 온갖 잡다한 물건부터 비싼 가전까지 만들어 파는 기업이다. 가전만 파느냐. 옷도 팔고 자동차도 팔고 아파트도 만들어 판다. 카드도 팔고 보험도 판다.

유통업으로 남의 상품도 가져다 팔고, 백화점이라는 판매 장소도 팔고, 호텔과 리조트에서 서비스도 판다.

한때 SG가 팔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았다.

그런 SG 그룹의 SG 건설 본사에 내가 앉아 있구나.

응, 그렇구나.

소파에 두 무릎을 모으고 얌전히 앉아 현실 도피를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았다가 뜨고, 멍한 정신을 바짝 조여도 달라지는 점은 없었다.

넓고 채광이 좋은 고층의 사무실, 고급 가죽일 게 분명한 소파, 그 너머에 커다란 책상을 두고 앉아 일하는 이환.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떠도 보이는 장면은 똑같았다.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현실성은 없지,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시지, 머리만 자꾸 굴려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니 이 와중에 졸음까지 밀려왔다. 자세가 흐트러지며 소파에 등을 기대다가 문득 이쪽을 바라보는 이환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허리를 뻣뻣하게 새웠다.

“지루합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각 잡고 앉아 있어요? 편히 앉아요. 피곤한 얼굴인데 누워서 눈 좀 붙여도 됩니다. 당분간 들어올 사람 없으니.”

피곤하지는 않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려니 미치도록 졸렸다. 애써 참는다고 했는데도 얼굴에 졸음이 묻어난 모양이다.

“실장님. 저 세수 좀 하고 와도 될까요.”

“가만히 있으려니 지루하죠? 내가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런 건 아닌데…….”

“나가면서 비서에게 마실 것을 들이라고 말 좀 전해 주겠습니까?”

“네, 네. 어떤 걸로 준비해 달라고 할까요.”

“시원하고 맛있는 것으로.”

참 애매한 주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토를 달지 않았다. 사무실을 나와 바로 앞 데스크의 비서에게 이환의 주문을 전달한 뒤 화장실을 찾았다.

찬물로 얼굴을 적셨다. 세수를 하니 약간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다. 허리를 이쪽저쪽으로 움직여 스트레칭을 하며 굳은 뼈도 풀어 주었다.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냐.”

회사에서 내 도움이 필요할 일이 뭐가 있겠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이환이 도울 일이 있다고 확신하듯 말해서 진짜 있는 줄 알았는데 없었다.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없었다.

이런 걸 월급 루팡이라고 했던가.

그런 유행어를 봤을 때 살짝 부러운 마음도 들었는데. 막상 하는 일 없이 월급을 받고 있노라니 마음이 불편했다. 심지어 월급 주는 고용주 앞에서 일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 주고 있으려니, 차라리 막노동을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건 뭐, 마음이 불편해서 숨 쉬는 것도 편히 못 할 지경이다.

거울을 통해 얼빠진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알이 맛 가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공사장에서 일할 때는 몸이 녹초가 되어도 눈깔이 이 정도로 맛 가는 일은 없었는데.

어쩌면 나는 육체적 피로보다 정신적 피로에 약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공부에 흥미가 없었을까. 머리 굴리는 일은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에 더 가까우니까. 돈이 있어도 대학교는 못 들어갔겠어.

의식의 흐름에 따라 헛생각을 이어 나가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젖은 손으로 뺨을 두어 대 때리자 차진 소리가 났다.

아무리 하는 일 없이 멀뚱멀뚱 앉아 있다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 되지.

이환이 있는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 유독 고되었다. 쭈뼛거리며 비서들의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 전 사무실을 나올 때와 다르게 누군가가 방문해 있었다.

“어?”

들어오면 안 되는 거였나. 방을 잘못 찾은 척 슬그머니 도로 나가야 할까.

잠시 고민하는데 고개를 든 이환이 나를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너무 안 와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찾으러 가야 하나 고민했어요.”

“아……, 죄송합니다. 세수 좀 하고 왔어요.”

“그러게요. 머리카락이 젖었네요.”

휴지로 대충 닦는다고 닦았는데도 물기가 남은 모양이다. 손가락으로 축축한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소파에 앉은 누군가를 힐끗거렸다. 이환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했다.

“서해민 씨?”

“……안녕하세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는 척을 하니 인사부터 해야겠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반가워요.” 하는 인사말이 돌아왔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와서 앉아요.”

마치 사무실의 주인처럼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쭈뼛쭈뼛 걸음을 옮겨 남자의 앞에 앉았다.

“스무 살이라고?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 보이네.”

이름도 알고 있고, 나이도 알고 있다?

내가 화장실에 가 있는 동안 이환에게 들었을 수도 있지만, 굳이 이환을 찾아온 용건을 두고 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는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환이 형이에요.”

“서해민입니다.”

서른 후반, 마흔쯤 되어 보이는 얼굴 위로 이환과 닮은 부분이 언뜻 보이기도 했다.

“마시지 마. 해민 씨 거야.”

목이 마른지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를 들어 올리는 남자에게 이환이 말했다.

“형이 마시면 안 돼?”

“새로 가져다 달라고 해.”

책상에서 소파로 자리를 옮겨 온 이환이 남자에게서 컵을 빼앗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화장실에 가기 전에 비서에게 요청한 ‘시원하고 맛있는’ 음료로 보였다. 그게 어째서 내 몫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셔요, 해민 씨.”

“……감사합니다.”

딱히 무언가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굳이 제 형에게서 뺏어 와 건네는 이환 탓에 거절하기도 민망했다.

“이 실장, 부회장님 접대를 그런 식으로 하면 쓰나.”

“용건 없이 찾아올 때는 부회장이 아니라 형이지. 부회장님 대접받고 싶으면 용건 가지고 와.”

“동생이라는 놈이 냉정하기는.”

쯧, 하고 혀를 찬 남자가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기대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로운 눈매가 슬쩍 휘어지며 웃음기를 드러냈다.

“왜 그렇게 봐요?”

“그…… 부회장님이라고…… 지금…….”

상가 연합이나 조기 축구회 등등의 회장님, 부회장님은 아닐 테고.

더듬거리며 묻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SG 그룹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이정입니다.”

그는 마치 연극을 하는 배우처럼 지갑에서 꺼낸 명함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내게 내밀었다. 한마디로 병신 같지만 멋있는, 꼴값이지만 품위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이환의 형이라더니, 과연 남다름이 느껴졌다.

“아, 그룹 부회장님이셨구나. SG 그룹 부회장…….”

두 손으로 공손히 명함을 받으며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이환과 이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회장님이시죠.”

“…….”

“환이가 말을 안 했나 보네요?”

“…….”

“해민 씨가 많이 놀란 모양이네. 나는 그걸 알고 우리 환이한테 달라붙은 줄 알았는데.”

웃음기를 머금고 휘어진 눈이 번들거렸다. 묘하게 꺼림칙한 시선이었다.

“해민 씨가 우리 환이를 구해 줬다고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확인하듯 이정이 물었다.

확인. 단순히 확인인가? 아니면 숨은 속뜻이라도 있나.

‘네.’라는 답을 원하는지, ‘왜’ 구해 주었는가 하는 이유를 원하는지, ‘어떻게’ 구하게 되었는가 하는 상황 설명을 원하는지. 머릿속이 복잡해진 탓에 적절한 답을 할 수 없었고, 그런 나 대신 이환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마치 요정님처럼.”

주관적인 관점으로 한껏 나의 대단함을 어필한 이환이 요정 발언으로 정점을 찍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이환의 말을 듣던 이정이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네. 요정님처럼 딱 나타나 구해 줬구나.”

동심이 말라비틀어졌다던 첫째 도련님은 마치 국어책을 읽듯이 어색한 어조로 맞장구를 쳤다.

“요정님, 다치면 어쩌려고 뛰어들었어요?”

“……위험한 상황이었거든요.”

요정님이라는 단어는 자체 검열, 삭제하여 들었다. 이환이나 이정이나 요정님을 입에 담는 데에 전혀 거부감이 없는 듯 보였으나, 나까지 요정님을 부르짖기에는 면이 뻔뻔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위험한데 왜 뛰어들어. 환이는 안 다쳤을 건데. 오히려 해민 씨가 뛰어들어서 더 위험한 상황이 생겼을 수도 있잖아요.”

그 상황을 보지도 않고 다쳤을지 다치지 않았을지 어떻게 알아.

일반적인 형제라면 안전하지 못한 현장 상황에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이정의 지적 포인트는 조금 남달랐다. 이환을 구해 준 내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태도도 아니었다.

“형 말이 맞아요. 나는 위기에 강하거든요. 요정님이 곁에 있으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해민 씨의 안전을 생각하도록 해요.”

이환이 슬그머니 내 손을 붙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상황, 이 대화가 이상한 건 나뿐인가.

동생을 위하면서도 동생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듯 보이는 이정, 그걸 당연시 생각하며 오히려 내 안위를 걱정하는 이환.

쌍으로 이상한 태도와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형제들을 보며 극단적인 동심의 유무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잠시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데 베타라고?”

“네?”

“베타, 맞아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이정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흐음 하고 코 울리는 소리를 냈다.

“알파였으면 꽤 곤란했을 텐데 다행이네. 베타라고 하니 못 느끼겠지만, 우리 환이 페로몬이 유독 강해서 알파는 같이 살기가 영 힘들거든요.”

“아,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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