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5)화 (15/172)

15화

“해민 씨.”

“네?”

“갑자기 멍한 얼굴을 해서……. 뭐 놓고 왔습니까?”

앞서 걷던 이환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뇨. 아니에요.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한 일은 아니죠. 앞에 계단이라 조심하라고 불렀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멍한 얼굴로 내뱉은 인사에 “감사한 일도 아니고요.” 하는 답이 돌아왔다.

계단을 내려와 대문을 넘자 바로 앞에 대기 중인 커다랗고 시커먼 자동차가 보였다. 차에서 내려 기다리고 서 있던 남자 둘이 이환에게 각 잡힌 인사를 했다.

운전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고, 다른 남자는 이환에게 다가오다가 나를 보고 멈칫했다.

그는 실장님이 감사 인사를 하고자 한다며 인력 사무소로 나를 찾아왔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싸가지 없게 면전에서 거절을 해 놓고 뒤늦게 이환의 옆에 붙어 있는 모양새가 되어서 영 면이 살지 않았다.

심지어 그저 심부름을 왔을 뿐인 저 남자에게 엄청 재수 없게 굴기까지 했지.

“……안녕하세요. 저번엔 죄송했어요.”

약간의 멋쩍음과 뒤늦은 미안함에 작게 인사를 하자, 이환이 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묘하게 못마땅한 시선이 서로 어떻게 알고 있냐는 해명을 요구하는 듯 보여서, 이 인간이 심부름 보낸 사실을 까먹었나 생각했다.

“저번에 인력 사무소로 찾아오셨을 때, 제가 좀…… 예의 없게 굴었거든요.”

“해민 씨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언제 봤다고 제 편을 드세요.

이환을 어이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나 단호하게 그럴 리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리 연락을 드리지 않고 찾아갔던 제 불찰입니다.”

“그러게. 윤경이가 잘못했네.”

심부름 보냈던 당사자인 주제에 책하지 말라고.

“연락처를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하셨겠어요. 그땐 제가 좀…… 예민했어요. 죄송합니다.”

“윤경이가 해민 씨를 예민하게 만든 건 아닙니까. 해민 씨가 초면인 사람에게 예의 없게 굴었다는 게 상상이 되질 않는군요.”

편을 들다 못해 모함까지!

나를 신뢰해 주는 것은 좋지만 내가 예민했던 것도 사실이기에, 이환이 말을 할수록 부끄러움이 내 몫으로 돌아왔다. 가만히 있으면 이대로 슬쩍 묻어 두고 넘어갔을 텐데, 옆에서 자꾸 내 편을 드니 어쩔 수 없이 계속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제가 실례했습니다. 그때 제가 일이 좀 있어서…….”

“그래요. 해민 씨가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니죠. 분명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듣지 않고 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침통한 마음을 감추며 입을 다물자, 윤경이란 남자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백윤경입니다. 백 비서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필요한 것이나 불편한 일이 생기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필요한 것이나 불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고용된 건데. 그 필요한 것이나 불편한 일을 백윤경에게 말하면 나의 채용 이유는 무엇이지?

고민에 빠진 나를 슬슬 밀어 뒷좌석에 태운 이환이 내 옆에 앉았다. 탁, 하고 뒷문이 닫혔다. 조수석에 백윤경이 올라타고 운전기사가 자리에 앉아 차를 몰았다.

“해민 씨가 오늘부터 동행할 줄은 몰랐습니다.”

백윤경이 백미러로 시선을 맞추며 말을 붙여 왔다.

“저 고용된 거 알고 계셨어요?”

내 물음에 백윤경이 눈을 휘어 웃기만 했다. 일찌감치 타깃이 되어 있었음을 새삼스럽게 확인받는 기분이다.

“어째서 둘의 사이가 좋아 보이지?”

이 와중에 이환이 농담을 했다. 비서라고 하더니 이환과 백윤경의 사이가 좋은 모양이다. 고용인에게 친절하니 비서와도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구나 싶었는데, 이환의 농담을 들은 백윤경은 어째서인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오늘 일정입니다.”

급하게 업무적으로 돌변한 백윤경이 어떤 화면을 태블릿에 띄워 이환에게 건넸다.

“점심 미팅은 캔슬해. 앞으로 점심시간에 약속 잡지 말고. 오늘 점심 이후의 스케줄은 내일로 연기하고.”

오늘의 숙제를 내일로 미루는 아이처럼, 오늘의 이환은 내일의 이환에게 일을 미루었다. 모쪼록 내일의 이환이 모레의 이환에게 일을 미루지 말아야 할 텐데.

종종 있는 일이었는지 백윤경은 이유도 묻지 않고 그리하겠다는 답을 했다. 곤란한 기색이 없는 것을 보면 미룬 일을 추가로 미루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태블릿을 백윤경에게 돌려준 이환이 내게로 시선을 주었다. 카디건과 휴대폰을 양손에 쥐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들자 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심심합니까.”

“……아뇨.”

“회사까지 멀지는 않은데, 출근 시간이다 보니 아무래도 길이 좀 막힙니다.”

“그러시구나.”

동행이 처음인지라 배려해 주고 싶었는지 이환이 자꾸 말을 붙여 왔다. 딱히 할 말도 없는데 이것저것 물어서 대답이 궁색해졌다.

그냥 없는 사람처럼 내버려 두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할 텐데.

과한 배려심이 오히려 사람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따라 나오려니 피곤합니까?”

“평소에는 네다섯 시에 일어나서요. 오히려 오늘이 널널한 편이에요.”

“해민 씨는…… 일찍 일어나는군요.”

“늦으면 일이 없어요. 인력 사무소에 일찍 도착해 있어야 해서, 조금 이르게 일어나 사무소에서 기다리며 쪽잠을 자기도 해요.”

내가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말은 아니었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인데 이환은 왜인지 먹먹한 표정을 지었다.

부자들이 알지 못하는 하류층의 인생이 놀라울 정도로 구질구질하긴 하지.

그의 표정에 담긴 안쓰러움을 발견하자 왜인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선택한 인생을 타인에게 동정받고 싶지 않았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겨우 새벽 네 시에 일어난다는 사실만으로 던지는 동정이 너무나 값싸게 느껴졌다.

“해민 씨는 참 착하네요.”

슬며시 다가온 손가락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닿았다가 멈칫했다. 그리곤 내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넘겨 주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그러면서도 옆을 돌아보며 타인을 챙기잖아요. 해민 씨가 내 목숨을 구해 준 건 역시…….”

운명이라는 말은 제발 하지 마세요.

“요정님이라서인가.”

“제발요.”

무시했어야 했는데 절로 반응해 버렸다. 운명을 피하니 요정이 나올 줄 미처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네?”

“아, 잠깐 딴생각을 해서…….”

앞좌석에 있는 운전기사와 비서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대놓고 요정님이라 부르는데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는 익숙한 발언인지도 모르겠다.

이환의 옆에서 일하려면 나도 저들처럼 익숙해져야 하는 걸까. 계속 듣다 보면 익숙해져서 저렇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양 무시할 수 있는 시기가 오는 걸까.

운명의 종소리니 요정님이니 하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게 되는 것도 무서운데.

어서 빨리 저런 소리에 면역이 되어야 이 상황을 버텨 낼 거라는 생각과 함께 결코 익숙해지면 안 될 듯한 이 상황에 익숙해져 버리면 나란 사람은 어떻게 될까 걱정이 들었다.

이제 겨우 업무 첫날인데, 업무 외적으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얼른 침대로 퇴근하고 싶어졌다.

“회사에 가면 제가 할 일이 있을까요.”

“그럼요.”

있을 겁니다. 찾아봐야죠. 대충 그런 모호한 대답을 예상했는데, 너무나 확실한 답이 돌아와서 오히려 당황했다.

“……있어요?”

“내 앞에 앉아 있기?”

“네?”

“일 열심히 하라고 응원하기. 점심 같이 먹어 주기. 커피 마실 때 같이 마셔 주기. 쉴 때 대화해 주기. 같이 퇴근해 주기.”

저런 건 보통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다 해 보고 졸업하지 않나. 같이 화장실 가기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무엇도 업무와 관련된 일이 아닌데, 너무나 당당한 그의 발언에 잠시 당황했던 것 같다. 이게 진짜 내 일이냐며 백윤경에게 시선으로 물었다. 백미러로 눈이 마주친 그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저 놀리시는 거죠.”

내가 회사 안 다녀 봤다고 지금 놀리는 거잖아.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 주제에 회사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 있겠냐고 돌려서 핀잔을 주는 건가.

“아닌데요. 해민 씨 회사 가면 진짜 저거 다 해야 하는데.”

“…….”

“그리고 내 심부름도 가끔 해 주고.”

역시나 놀린 거구나. 주된 업무는 잔심부름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버릇처럼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 잘근거리고 있노라니, 옆에서 슬그머니 다가온 손이 턱을 살며시 눌렀다. 물고 있던 아랫입술이 톡 하고 제자리를 찾아 나왔다. 아이 같은 버릇이 웃겼는지 이환이 작게 웃었다.

“요정님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아…….”

안 돼.

이런 걸 보통 항마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거겠지.

이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요정님이라고 칭하는 말에 정신을 놓고 싶어졌다. 굳이 무시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딱히 대꾸할 말이 없기도 했다.

경험의 노하우 같은 거였을까.

개가 지나가나 하는 표정으로 덤덤하게 앞을 주시하는 운전기사와 백윤경을 참고하며, 나 역시 이환에게서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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