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1)화 (11/172)
  • 11화

    “표정이 왜 그래요?”

    아무래도 표정까지 갈무리하기가 어려웠는지 여사님이 내 얼굴을 보며 머리를 갸웃 기울였다.

    “아닙니다. 좀 피곤했나 봐요.”

    “그래? 그럼 얼른 올라가 쉬어요. 푹 쉬어야 내일부터 힘내지.”

    왜인지 여사님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려왔다.

    내일부터 힘내야 할까. 물론 근무 첫날이니 힘내야겠지만, 단순히 그 이유일까. 정상에서 살짝 벗어난 듯 보이는 고용주를 감당하려면 힘내야 한다는 뜻은 아닐까.

    여러모로 생각이 많았지만 언제 남자가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침실로 향했다.

    풀지 않은 짐 가방이 침실에 덩그러니 놓여 나를 반겼다. 저 가방을 푸는 게 옳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냥 저대로 들고 여길 나가는 게 신상에 좋을 듯싶은데.

    당장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잠들기가 두려웠다. 요정님을 입에 담는 서른네 살의 남자와 같은 집에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무서울 줄은 몰랐다.

    3

    여름의 아침은 빠르게 시작된다.

    어둠이 물러난 방이 너무 환해서 깜짝 놀라 일어났지만, 환하게 트인 창 너머로 들어오는 빛과 달리 시간은 이제 막 다섯 시를 넘긴 참이었다.

    채광이 너무 좋아서 식겁했네.

    첫날부터 지각인가 싶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도로 풀썩 침대로 드러누웠다.

    넓고 안락한 개인 침실, 푹신푹신한 쿠션의 침대, 새것처럼 깨끗하게 세탁된 이불, 시원하게 트인 창.

    이렇게 완벽한 잠자리는 난생처음이어서 낯선 곳이라는 어색함도 없이 깊게 잠들었다. 낯가림을 하기엔 너무나도 안락하고 평온한 탓이었다.

    “너무 좋아.”

    팔다리를 쭉 펴고 새가 날갯짓하듯 파닥거리며 침대의 쿠션과 이불의 푹신함을 만끽했다.

    눈을 뜨자마자 대충 씻고 급하게 인력 사무소로 뛰어야 하는 치열함이 없는, 내 인생에 언제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여유로우면서도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지루함이 느껴질 때까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느긋함을 만끽하다가 일어났음에도 여전히 시간은 넉넉했다. 두 팔을 뻗어 쭉 기지개를 켜며 침실을 나섰다.

    집 안에는 고요함이 감돌고 있었다. 조용히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왔다.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될까, 잠시 고민했으나 목이 너무 말랐다.

    멋대로 주방에 들어갔다가 괜한 오해라도 받으면 어쩌지. 차라리 욕실에서 수돗물을 마시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몰래 물만 마시고 오자는 결론을 내리고 조심조심 일 층의 주방을 향해 걸었다.

    “어머, 해민 씨. 일찍 일어났네요.”

    빼꼼 주방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여사님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해민 씨도 잘 잤어요?”

    냉장고 문을 열고 고심하던 여사님이 웃으며 아침 인사를 받아 주었다.

    “모처럼 푹 자고 일어났습니다. 물 한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뭘 얻어 마시기까지. 컵은 여기, 물은 이쪽 정수기. 하나하나 허락 구하지 말고 편하게 지내요. 배고프면 냉장고 열어서 이것저것 꺼내 먹어도 되고.”

    “물이면 괜찮습니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혹시라도 밤중이나 새벽에 배고프면 내려와서 먹어도 된다는 거지. 해민 씨가 냉장고를 거덜 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라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당연한 소리 한 건데. 냉장고 아래 칸에 과일 있으니까 나중에라도 입 궁금하면 꺼내 먹어요. 차 종류는 이쪽 찬장에 있고. 말 안 하면 물어보지도 않을 것 같아서 미리 말해 두는 거예요. 매번 허락받지 말고 알아서 챙겨 먹으라고.”

    “네, 감사합니다.”

    물 한 잔 마시는 것, 냉장고 문 한 번 열어 보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입장에서 여사님의 말은 무척이나 고마웠다. 저렇게 말한다고 진짜로 이것저것 꺼내 먹지는 않을 테지만, 적어도 물은 편하게 마실 수 있지 않나.

    “우리 해민 씨는 예의 발라서 참 보기 좋아.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아침에 깨워 주려고 했는데, 먼저 일어나 버렸네.”

    물이 담긴 컵을 건네주며 여사님이 “혹시 잠자리가 불편했어요?” 하고 물었다.

    “아뇨. 잠자리는 아주 편했습니다. 그냥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어서요.”

    “어휴, 아직 어린 사람이 부지런하기도 하지.”

    무슨 말만 하면 칭찬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뭐 하나 못 해 줘서 안달인 고용주와 더불어 말만 하면 칭찬인 여사님의 반응도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해민 씨, 혹시 가리는 음식 있어요? 먹으면 안 된다거나, 싫어하는 음식을 말해 주면 참 좋을 텐데.”

    “아뇨.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습니다. 다행히 음식 알러지도 없고요.”

    “다행이네. 오늘 아침은 해물 죽을 할까 했는데, 해민 씨가 혹시 해물을 못 먹나 해서 물어봤어요.”

    해물이라니, 없어서 못 먹지 주면 잘 먹는다.

    “해물 좋아해요.”

    “좋아요, 좋아. 그럼 오늘 아침은 해물 죽으로. 식사는 여덟 시니까, 그 전에 해민 씨부터 씻고 한 일곱 시쯤 도련님 좀 깨워 줘요. 삼십 분만 일찍 일어나면 참 좋을 텐데,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해서 만날 빠듯하게 움직인다니까. 학교 다닐 때도 지각 안 시키려고 발을 동동 굴렀던 거 생각하면, 어휴.”

    마치 자식에게 잔소리하는 부모 같은 모습에 작게 웃음이 나왔다.

    이환이 학교 다닐 때도 곁에 있었던 듯하니 진짜 오래 일하신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옆에서 깨우고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했으면 거의 부모의 마음이긴 하겠지.

    그렇게 사고의 흐름이 이환에게로 흐르며, 문득 어젯밤 잠들기 직전까지 치열하게 고민한 문제가 떠올랐다.

    “여사님.”

    “응? 왜? 왜 갑자기 그렇게 무게를 잡고 불러요?”

    근심 걱정 없이 해맑은 얼굴은 이 집 사람들의 특징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소 짓는 얼굴을 향해 차마 ‘도련님의 정신 상태가 평범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고 계시냐.’라는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돌려 물어도 결국 이환이 미친놈이냐고 묻는 꼴이니까.

    “여사님.”

    “응, 편하게 말해요. 왜? 많이 배고파요?”

    “어제…… 실장님과 대화하다 들은 말인데요.”

    “응.”

    “요, 요…….”

    차마 내 입으로 ‘요정’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수가 없었다. 이 나이 먹고 입 밖에 내기엔 부끄럽고, 생각만으로도 수치스러웠던 탓이다.

    “요?”

    “요정이요.”

    하지만 이미 입 밖에 냈으니 묻긴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결국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실장님이…… 요정이라고…….”

    “우리 도련님이 요정이라고?”

    “아뇨, 실장님이 요정이 아니라 실장님이 저에게 요정이라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우니 말이 정돈되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이환이 요정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말을 이상하게 전할 수 없어 최대한 부끄러움을 참고 정정하자, 듣고 있던 여사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해민 씨, 아이들에게는 각자의 요정이 있대요. 보이지는 않지만 아이들 곁에서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보고 도와준다고. 그러다 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면 요정이 죽는대요. 왜 그런지 알아요?”

    무슨 전설 같은 건가.

    모른다며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자 여사님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요정이 없다는 말을 하면 요정이 죽어 버린대요. 성인이 된 아이들은 세상의 때가 묻어서 요정을 더 이상 믿지 않거든. 그래서 아이들이 크면 요정이 죽는다는 거야.”

    “…….”

    “이 이야기를 듣고 도련님이 어렸을 때 엄청 울었어요. 요정을 좋아했거든. 분명 자신의 요정님도 있을 거라고, 자기는 어른이 되어서도 요정을 믿어서 요정이 죽지 않도록 할 거라고. 그때 도련님 참 귀여웠는데.”

    예전 기억을 떠올리는지 여사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으나, 듣고 있는 내 머릿속은 혼란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제가 왜 요정이죠?”

    심지어 부모가 없냐는 패드립까지 들었는데.

    “해민 씨가 도련님을 구해 줬잖아요. 그래서 해 본 말일 거야. 해민 씨가 요정이 아니라는 건 도련님도 알 거예요. 요정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죠? 요정이라니, 너무 진지하게 말씀하셔서 농담이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네.

    괜한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여사님에게까지 멍청한 말을 해 버렸다. 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해 보고자 노력했다.

    “아니. 요정은 진짜로 믿고, 해민 씨가 요정이 아니라는 것만 알 거라고.”

    “……네?”

    “도련님이 아직까지 요정을 믿거든. 그러니까 도련님 앞에서는 요정이 없다거나 미신일 뿐이라거나 하는 말은 하지 말아요. 해민 씨에게는 화내지 않겠지만, 속상해할 거야.”

    “…….”

    방금 들은 말뜻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서른네 살의 이환이 아직까지 요정을 믿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도 대충 생각해도 그렇게밖에 결론이 안 나는데, ……진짜 그거라고?

    “아니, 어떻게…….”

    어떻게 서른네 살이나 먹도록 아직까지 요정을 믿고 있고, 심지어 곁에 있는 사람은 그러한 잘못된 믿음을 고쳐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방조하는 거냐고.

    턱 끝까지 올라온 질문이 목구멍에 꽉 틀어막혔다.

    “말했잖아요. 우리 도련님이 여리고 순수한 구석이 있다고. 아직까지 어릴 때의 순수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거든.”

    그런 순수함은 버려! 제발 버려.

    그건 순수하다고 말할 게 아니라 정신 이상을 의심해야 하는 상태 같은데.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서른네 살의 이환이 여전히 순수하다고 믿고 있는 여사님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서른네 살의 이환이 여태껏 아이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잘못 행해져 온 가르침 탓일까, 아니면 아이의 순수함을 차마 짓밟지 못한 잘못된 배려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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