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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10)화 (10/172)
  • 10화

    조금 전에 같이 식사한 사실을 잊었는지 허튼소리를 하는 남자를 향해 지적하자, 그는 왠지 모르게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럼 아침저녁으로 옷 갈아입고 씻으시는 것만 도와 드리면 되나요?”

    그러면 너무 공으로 돈을 먹는 기분인데. 설마 겨우 이것 때문에 일할 사람을 구한 건가.

    설마 그랬을까 싶지만 부자들의 생리를 알 수 없으니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같이 출근해야죠.”

    “아까 여사님도 그 말씀을 하시던데. 제가 회사에서 도울 일이 있을까요.”

    “당연히 회사에서도 해민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회사에서 옷 갈아입을 일도 없을 텐데 내가 왜 필요해?

    눈을 끔뻑거리다가 남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나 저번처럼 현장 나갈 일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때는 여러모로 필요성이 높아지겠지. 내가 현장에서는 나름 경력직이니까, 안전 장비도 챙겨 드리고 물이나 간식도 바로바로 대령해 드릴 수 있고.

    “네, 알겠습니다.”

    “해민 씨는 의문이 들어도 혼자 납득하는 경향이 있네요.”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는 듯 남자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일하기도 전에 질문이 많으면 구박받기 좋거든요.”

    일 시키는 사람은 질문하는 놈보다 시키는 대로 일하는 놈을 좋아한다. 입 털면서 알랑방귀 뀌는 놈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그건 비위가 상해서 못 해 먹으니 그냥 입 다물고 시키는 일이나 해야지.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굴러먹으며 체득한 삶의 교훈 중 한 가지였다.

    “그럼 오늘은 옷 갈아입고 씻는 것부터 도와 드려야겠네요.”

    “지금 말입니까?”

    남자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교차하여 가슴을 가리며 물었다. 생각한 반응과 달라도 너무 달라서 덩달아 당황해 버렸다.

    선금을 받았으니 일을 하겠다는데, 어째서 순진한 총각 희롱하는 치한이 된 듯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걸까.

    “지금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네?”

    “내일부터 하죠. 오늘은 해민 씨도 쉬어야 할 듯싶고, 짐 정리도 해야 하고, 잠자리도 바뀌었으니 내일을 위해 푹 자야 하고…….”

    “아, 예. 그럼 내일부터.”

    갑자기 필사적으로 바뀐 남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으니 진정 좀 했으면 싶었다.

    “아, 실장님은 몇 시에 일어나세요? 일어나시기 전에 제가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일곱 시쯤 일어납니다.”

    “네. 일곱 시.”

    대충 이 정도면 할 말 다 하고 들을 말 다 들은 것 같은데.

    꽃 씻은 물을 홀짝홀짝 다 마시고 빈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일을 시키려면 시키고 아니면 이제 그만 해산했으면 좋겠는데,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는 도통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먼저 가서 자겠습니다, 가서 짐 정리 좀 하겠습니다 하고 일어날 수도 없고.

    언제쯤 눈치를 봐서 일어나야 할까 고민하며 엉덩이를 움찔거리는데 남자가 “해민 씨.” 하고 불렀다.

    “네, 실장님.”

    “실장님이라고 부르니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네요. 이환입니다, 내 이름. 앞으로 같이 지내야 하니 편하게 불러요.”

    편하게 어떻게?

    이환 님? 아니면 이환아?

    나이가 띠동갑보다 더 차이가 나는 서른네 살의 고용주를 어떻게 편하게 불러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에 좁힐 거리감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저는 지금이 편해서요. 실장님께서 절 편하게 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마음 넓은 고용주라는 걸 생색내고 싶기라도 했나. 이럴 때는 그냥 칭찬해 주는 게 최선이다. 괜히 해 본 말에 휩쓸려 정말 편하게 대했다가 모가지 날아가는 거 한순간이니까.

    “나중에…….”

    지금 당장 일 시킬 거 아니면 이제 그만 헤어지자.

    언제까지 저놈의 잔디를 보고 있어야 하는지,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슬슬 정신이 혼미해지려고 했다.

    “나중에 내가 좀 더 편해지면, 그때는 이름으로 불러 줘요. 기다리겠습니다.”

    “……네.”

    대체 왜 저런 아련한 눈으로 쳐다보며 아련한 목소리로 말하는지 모르겠다만.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가 울멍울멍한 시선에 흠칫 놀라 애꿎은 잔디로 시선을 던졌다.

    “이만 일어날까요.”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나자, 남자는 말과 다르게 왜인지 아쉽고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사람 민망하고 미안해지는 기분이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걱정이네요.”

    “다행히 잠자리를 가리지 않아서요. 오히려 숙식 제공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편한 점 있으면 말해 줘요.”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꼭 말해 주고요.”

    “네, 감사합니다.”

    “필요한 가구가 있으면 말해요. 책상하고 컴퓨터도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노트북 쪽이 좋으려나요.”

    “네, 감사, 아니, 그건 괜찮습니다.”

    슬슬 대꾸할 말도 떨어져 가는데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관성적으로 말을 내뱉으려다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방 한 칸 내주신 것만으로도 진짜 충분합니다.”

    고마해라. 감사하다는 인사 레퍼토리도 슬슬 떨어져 간다.

    지친 기색을 읽었는지 남자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매우 아쉬워했다. 서운해하는 남자와는 달리 정작 나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 뭐 하나라도 더 해 주려는 고용주가 처음이라 부담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날 도와주기 위해 해민 씨가 있는 거지만, 나는 해민 씨가 여기서 편히 지냈으면 좋겠어요.”

    업무 환경과 직원 복지에 신경 쓰는 고용주라니. 신문이나 뉴스에서 나오는 갑질 부자가 아니라 드물게 존재하는 착한 부자인가 보다.

    내내 부담스럽게만 느껴지던 남자에게 약간의 호감이 생겼다.

    과하게 상냥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겨우 하루 만나 이야기해 봤을 뿐이지만 돈 많은 사람답지 않게 갑질을 하거나 강압적이지도 않았다.

    가끔 이상한 말을 하는 것도 같지만, 어쩌면 의외의 상황에 내 귀가 환청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배려 깊은 고용주님이 허튼소리를 할 리가 없다며, 내 귀를 일단 탓해 보았다.

    “진심으로…… 실장님의 배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도 실장님께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진짜 모처럼 드물게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남자의 얼굴 위로 떠오른 섭섭함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참 착하고 친절한데 비위를 맞춰 주기에는 묘하게 어려운 사람이다.

    “도움이 되지 않아도, 요정님이 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습니다.”

    “네?”

    중간에 또 이상한 단어가 들린 것 같은데.

    귀에 문제가 생겼는지, 몸에 문제가 생겼는지 아까부터 자꾸 헛소리가 들린다. 눈앞의 고용주가 헛소리를 내뱉지는 않았을 테니 역시나 내 귀가 문제인 모양이다 싶어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해민 씨, 혹시 부모님 없이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이게 지금 무슨 소리지? 그렇게 안 봤는데 초면에 부모 욕부터 박는다고?

    “지금 애비 에미도 없는 후레자식 뭐 그런 욕을 고상하게 돌려 표현하시는 겁니까?”

    비록 엄마와 나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죽어 나자빠지긴 했지만, 제정신이 아닌 상태일지라도 어머니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부모 없이 태어난 자식이라니. 뜬금없는 타이밍에 이토록 미묘한 뉘앙스로 욕을 들어 먹긴 처음이라 어이가 없었다.

    “욕이 아니라……. 해민 씨가 내 요정님 같아서요. 어떻게 요정님이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또다, 또 들어 버렸다.

    요정님.

    스무 해를 살아온 내 입으로도 내뱉기 민망한 단어를 서른네 살 먹은 남자의 입을 통해 들어 버렸다.

    뜨악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무척이나 진지하고 진심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장님의 농담이 참 재미있네요. 유쾌하신 분이었구나.”

    “아직 농담은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해민 씨가 원한다면 앞으로 농담도 많이 하겠습니다. 요정님이 웃게 할 수 있다면, 난 뭐든 할 수 있어요.”

    “…….”

    고용주가 미친놈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이 정도면 위약금을 내지 않고 사직할 사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월급을 미리 받아 써 버렸으니 죽어도 한 달은 채우고 나가야 하겠지.

    “해민 씨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아니, 그렇게 무서운 소리를 진지하게 하지 말아 달라고요.

    나는 표나지 않게 주변을 둘러보았고, 어디에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음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다부진 표정으로 남자를 마주했다.

    “실장님. 제가 첫날이라 좀 피곤하기도 하고, 아직 못 한 짐 정리도 남아 있고. 그래서 그런데 먼저 올라가 봐도 될까요.”

    “당연하죠.”

    받은 돈이 있다 보니 당장 일을 때려치울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고용주에게 제정신이 맞느냐는 질문을 할 수도 없었다.

    일단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는 수준에서 말을 하자,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나를 놓아주었다. 언제 다시 붙잡을지 몰라 꾸벅 인사를 하고 빈 찻잔을 모아 쟁반을 들었다.

    여사님. 여사님에게 물어봐야 한다.

    아니, 여사님을 찾는 게 과연 올바른 선택일까.

    입버릇처럼 ‘우리 도련님’을 연발하는 여사님은 누가 보더라도 저 남자의 편인데. 내가 고용주의 정신 상태를 의심한다면 여사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이야기는 잘 끝났어요?”

    잠시나마 애타게 찾은 여사님이 주방에 앉아 있다가 내게 쟁반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네.”

    조금 전의 일을 이야기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했으나, 치열한 고민 끝에 일단 침묵하기로 했다.

    고용된 첫날, 고용주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다는 말을 한다면 누구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화를 내고 나를 욕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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