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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9)화 (9/172)
  • 9화

    지금까지 고용주와 함께 밥을 먹는 자리는 가끔 있었지만, 이렇게 일대일로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일은 결단코 없었다. 반찬 하나 집어 먹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기분이다.

    빨리 먹고 일어나든가 해야겠네. 앞으로 계속 고용주와 얼굴 마주하고 밥을 먹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밥그릇에 코를 박듯이 고개를 숙이고 밥을 크게 떴을 때, 남자가 해민 씨, 하고 나를 불렀다.

    “네?”

    “아뇨, 이렇게 해민 씨와 마주 앉아서 밥을 먹는 게 안 믿겨서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참 안 믿기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상황입니다만.

    “왜 그때, 고맙다는 인사를 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까. 난 해민 씨가 연락하기만을 기다렸는데.”

    남자가 조금 원망을 담아 말했지만, 그것은 질책보다 투정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낸다면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애꿎은 갈비찜만 우걱우걱 씹어 댔다.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려고 한 일이 아니라서요.”

    “그래도 내가 해민 씨 덕분에 목숨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해민 씨는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

    “…….”

    아니라고 겸손하게 부정을 해 봤자 들어 먹힐 것 같지도 않고, 생명의 은인이라고 긍정하며 생색을 내는 것도 이상하다. 무슨 말을 해도 사람 이상해지는 상황임을 깨닫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갑자기?

    거기서 죽을 운명이었다는 뜻인가. 살아난 게 기적이라는 뜻인가.

    뜬금없는 말은 도통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내색하지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자, 남자는 어울리지 않게 뺨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내가 위험에 처하고, 해민 씨가 나를 구해 준 것. 운명이겠지요.”

    “아닙니다.”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네?”

    “아뇨. 갑자기 당황해서 나온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다급히 변명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으나 다행스럽게도 남자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무어라 대꾸할 때마다 얼굴을 붉히는 남자의 반응에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하필이면 사고가 일어난 그 시간, 그 장소에 나와 해민 씨가 있었다는 건 분명 운명일 겁니다.”

    그 사고가 남자를 목표로 한 것이 확실하다면, 남자가 존재하는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내가 옆에 있긴 했지만, 내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도 함께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까지는 아닌데.

    “해민 씨가 날 구해 줬을 때, 난 분명히 들었습니다.”

    “뭘 들으셨는데요?”

    “운명의 종소리.”

    푸흡, 가까스로 남자를 비껴 물을 뿜어냈다. 운명의 종소리 같은 개소리를 내 귀로 들을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뭘…… 들으셨다고요?”

    “귓가에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 게 운명이라죠.”

    설마 잘못 들었을까 싶어 다시 물었으나 돌아온 답은 절망스러웠다. 개소리를 진지하게 내뱉는 눈앞의 남자가 순간 무서워졌다.

    “해민 씨도 들었습니까?”

    “생각해 보니까…… 저도 들은 것 같네요. 철근이 떨어지면서 부딪치는 쇳소리요.”

    “역시 운명이네요.”

    아니야, 그거 아니야.

    지금 나와 저 남자가 한국말로 대화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화가 통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언제부터 종소리와 쇳소리가 같은 의미가 되었던가. 종소리와 쇳소리는 엄연히 다른데.

    물론 종소리도 쇳소리이긴 하지만, 같은 종류의 소리라고 해도 무엇이 소리를 냈는지가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나는 쭉 기다…….”

    “아이고, 도련님. 해민 씨 밥도 못 먹게 첫날부터. 대화할 시간은 앞으로 많으니까 일단 식사부터 해요. 해민 씨 배고프겠네.”

    남자가 무언가를 이어 말하려 할 때, 여사님이 황급히 다가와 너스레를 떨며 남자의 말을 잘랐다.

    약간의 고마운 마음과 함께 왠지 지금 저 말을 들어 두지 않는다면 내게 매우 좋지 못할 듯한 예감도 들었다. 순간의 곤란함을 피하고자 미래의 커다란 위협에서 눈을 돌리는 기분이다.

    이 찜찜함은 대체 무엇일까 고민했지만, 도저히 예상하기가 어려웠다.

    “해민 씨, 도련님이 반가워서 하시는 소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마저 식사해요. 젓가락까지 놓아 버렸네. 어서 먹어요, 어서. 뭐 더 줄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내가 부담을 줬군요. 미안합니다.”

    “괜찮…….”

    쿨럭, 하고 나오는 기침을 손으로 막았다. 남자가 황급히 빈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이쪽으로 몰린 두 쌍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물을 마시는 척 얼굴을 돌렸다.

    ∞ ∞ ∞

    “저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여사님이 실장님께 여쭤보라고 하셔서요.”

    아무리 고용주가 묘하게 이상하다 할지라도 돈을 받은 이상 일은 제대로 해야 한다. 심지어 아무 조건도 없이 거액의 월급을 선금으로 주었으니 한 달은 노예처럼 부린다고 해도 감사해야 할 상황이었다.

    “차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할까요.”

    곧 자야 할 시간이라 커피는 부담스러울 거라며 배려 깊게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꽃차를 손수 타 주고,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의 차로는 커피를 준비한 남자가 어설프게 쟁반을 들어 올렸다.

    차마 손까지 다친 고용주에게 차를 나르게 하고 멀뚱히 구경만 하기엔 민망하여 대신 쟁반을 들자, 그가 웃으며 정원이 보이는 전면 유리창 앞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하루 종일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일하니까, 잠깐씩이라도 이렇게 초록색을 보면 좋을 것 같아서 만든 곳입니다. 정원도 신경을 많이 썼고요.”

    그 말을 증명하듯 유리창 너머 정원의 잔디는 일정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몇 가지 관상수와 함께 이곳에서 자랐다고 보기엔 과하게 큰 나무도 존재했다.

    “그네가 있네요?”

    굵은 나뭇가지에 연결된 그네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했다. 영화 혹은 드라마에서나 가끔 볼 법한 그네였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그네는 아이들 놀이터에 있는 철로 된 그네뿐인데.

    “네. 정원의 커다란 나무에 묶인 그네를 가지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정원을 갈아엎을 때 저 나무부터 옮겨 와 심었습니다.”

    “……아, 옮겨 심으셨구나.”

    가지고 싶은 것도 생각 외의 것이고, 그걸 이루고자 옮겨 심었다는 나무도 생각 이상의 스케일이었다.

    부자들의 돈지랄이란…….

    “서 있지 말고 앉아요.”

    “네.”

    점잖게 대답은 했으나, 냉큼 앉을 수가 없었다.

    남자의 말처럼 탁 트인 전경이 보기에 좋았지만, 그 전경을 향해 놓아둔 소파가 문제였다. 마치 카페의 커플석처럼 창가를 보고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일 인용 소파에 고용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기엔 조금 거북스러웠다.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머뭇거리자 남자가 먼저 한쪽 소파에 앉았다. 어서 앉지 않고 뭐 하냐는 시선에 결국 빈 소파를 표나지 않게 옆으로 끌어 미미하게나마 틈을 두었다.

    “…….”

    뭔가 말을 할 줄 알았던 고용주는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딱히 할 말이 없었던 나 역시 정원의 거대한 나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밍밍한 꽃차만 후루룩거렸다.

    “…….”

    “…….”

    “그래서 제가 해야 할 일은…….”

    한참 동안 이어지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끝내 먼저 입을 열자 커피를 즐기고 있던 남자가 컵을 내려놓았다.

    “옆에 있어 주면 됩니다.”

    뭔 개소리야.

    다행히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대신 한참을 생각하여 저 포괄적인 의미의 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들을 만한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니까…… 옆에서 제가 뭘 해야 한다는 거겠죠?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까요.”

    “꼭 뭘 해야 할까요.”

    그걸 나한테 물어본다고요?

    질문인 듯 질문 아닌 질문 같은 개소리를 들으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용주에게는 항상 공손하게, 예의를 지켜서, 부당한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말고 논리적으로.

    지금까지 만나 온 수많은 유형의 고용주들을 떠올리며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여 답을 했다.

    “꼭 뭘 해야 하겠죠. 아니면 제가 월급 받으면서 여기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선문답도 아니고 개소리를 이렇게 진지하게 나누어야 할까. 진심으로 고민이 되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건만, 남자는 묘한 쪽으로 대화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내가 만났던 보통의 사람들은 먼저 판단하고, 먼저 단정 짓고, 먼저 명령하는 사람들이었다. 몸이 힘들고 기분이 상해서 그렇지, 비위를 맞추고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이리저리 치이며 살았기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 또한 일도 아니었다.

    비록 고분고분하지는 않아도 눈치는 빠르다 생각하는 나였는데, 눈앞의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의미의 말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는 도통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그런가. 부자들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있나.

    “음, 옆에서…… 제 손이 되어 주어야겠네요.”

    “실장님의 손이요?”

    “손을 다쳤으니까.”

    깁스한 손을 들어 보이며 남자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일단 옷 입는 것을 도와줘야 하겠고. 넥타이도 매 줘야 하고.”

    “아, 단추.”

    “샤워하는 것도…….”

    그 타이밍에 얼굴만 붉히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샤워라는 단어를 말하며 얼굴을 붉히는 남자 때문에 나까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네, 그렇죠. 깁스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되니까요.”

    어째서인지 남자보다 내가 더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고 있는 기분이다.

    “밥 먹을 때 반찬 올려 주는 것도…….”

    “오른손잡이시잖아요.”

    “아,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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