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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8)화 (8/172)

8화

“얘기했잖아요. 돈 주는 사람이랑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노동이라고. 그리고 우리 도련님이 좀 남다른 분이셔서. 그래도 나는 해민 씨가 잘해 줄 거라고 믿어요. 내가 보기에 해민 씨는 정신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거든. 우리 도련님 곁에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고.”

뭔가 의미를 알 수 없지만 묘한 뉘앙스의 말이었다. 미간에 주름이 지도록 고민하는 와중에 여자가 젖은 손을 행주에 닦으며 해맑은 얼굴로 웃었다.

“어머, 도련님 오셨나 보네.”

벌써? 아니 그보다 어떻게 알고? 초인종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쪼르르 주방을 나서는 여자의 뒤를 주춤주춤 따라나섰다. 그래도 초면인데 좋은 모습은 보여야지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 사람은요?”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뭔가를 묻고 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거실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선금도 받았으니까 최대한 좋은 인상을 남겨서…….

“요정님?”

“……네?”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기분인데.

눈을 끔뻑거리며 고용주임이 분명한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다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서해민이라고 합니다.”

“네, 서해민 씨. 와 줘서 고맙습니다.”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을 덥석 붙잡은 남자는 정말 기쁘다는 듯 웃고 있었다. 묘하게 상기된 얼굴이 이상하게도 낯익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이 남자를 어디서 봤었냐면…….

“그러고 보니 해민 씨가 우리 도련님을 구해 줬다고 했죠? 그때부터 우리 도련님이 해민 씨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몰라요. 오늘만 해도 해민 씨 언제 오냐고 계속 물어보셨던 거 있죠.”

그래, 얼마 전 건설 현장에서 내가 구해 준 남자였다.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며 비서까지 보내 전달한 식사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했던 바로 그 남자.

나는 멍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다 고개를 돌려 해맑게 웃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건…… 진작 말해 줬어야지.

∞ ∞ ∞

“여사님은 일 층 방을 쓰시고, 나는 이 층을 사용합니다. 손님방이 일 층에도 있긴 한데, 아무래도 함께 움직여야 하니 이 층이 편하겠죠?”

손을 다쳐 옆에서 도와줄 사람을 구한다던 도련님은 내 짐 가방을 빼앗듯이 들고 계단을 올랐다. 내부에 계단이 있는 이층집은 처음이라 무척이나 낯설었다.

아니, 그보다 선택권이 있는 뉘앙스로 말을 하는데 어째서 선택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들리는 것일까.

“저쪽으로는 서재와 내 침실입니다. 해민 씨는 이쪽 방과 욕실을 쓰면 됩니다.”

계단을 올라와서 왼쪽이 남자가 쓰는 구역이고, 오른쪽이 내 침실이라는 뜻이다. 오른쪽 방문을 열고 들어간 남자가 침대 옆에 내 가방을 내려놓았다.

“사람이 들어올 거라는 생각을 못 해서 가구가 손님용 침대와 협탁뿐입니다. 따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줘요. 아니면 해민 씨 취향에 맞는 디자인으로 가구를 바꿔도 좋습니다. 말만 해요.”

얼마나 일을 할지도 모르는데 가구를 바꿀 필요가 있나. 슬쩍 보니 붙박이장이 있는 것 같은데, 침대와 장롱이면 충분하다.

그보다 나는 남자의 뒤를 따르며 지금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딱히 만날 이유도 없고, 만날 시간도 아깝고, 감사 인사를 받자고 하루 일을 공칠 수도 없기에 식사 요청을 거절했다. 만난다면 사례금이랍시고 성의 표시를 할 거라 생각하긴 했으나, 아무리 급해도 목숨값이라며 공돈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전혀 아쉽지 않았다.

그랬는데, 결국 제 발로 굴러들어 온 꼴이라니.

비서에게 톡 쏘아붙였던 과거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콧대 높은 척은 있는 대로 해 놓고, 끝내는 이렇게 고용주와 고용인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비싼 월급 준다는 말에 굽신거리며 기어들어 왔으니, 그걸 보는 남자는 얼마나 우스울까.

이런 꼴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나를 불렀을까. 이 타이밍에 일 못 하겠다고 다시 나간다 한들 우스워진 내 꼴이 원래대로 돌아오긴 할까. 꼴에 자존심을 부린다고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선금으로 받은 월급을 병원비로 입금해 버려서 돌려줄 돈도 없지만.

“계약서에 사인했다는 말을 듣고 조금 놀랐습니다. 사실 난 계약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는데, 여사님은 신뢰의 문제라고 하시더군요. 웃기지 않습니까. 위약금 세 배 같은 것 말입니다.”

“…….”

위약금 세 배라니?

처음 듣는 말에 눈을 끔벅거렸다.

“해민 씨도 그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 계약서에 사인을 했겠죠.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는데, 해민 씨가 지장을 찍었다는 말을 듣고 ‘아, 정말 일을 할 생각인가 보구나.’ 하고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그 신뢰라는 말이 이제 이해가 됩니다.”

“…….”

원금을 돌려주는 것도 벅찬 상황인데 거기에 더해 세 배라고?

상황이 부끄럽고 무안해도 그냥 눈 딱 감고 일을 해야겠구나. 그냥 우습고 하찮은 존재가 되어야겠구나. 적어도 한 달은 이곳에 달라붙어 일을 할 수밖에 없겠구나.

겸허히 내 처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해민 씨?”

“네?”

“아니, 뭔가 고민이 있는 얼굴이라서요.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해민 씨가 여기서 최대한 편하게 지내기를 바라니까요.”

매우 큰 고민이 남자의 발언으로 인하여 생겨났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더불어 일하러 온 사람한테 편하게 지내라는 말은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저기…… 실장님.”

“네, 해민 씨.”

남자는 내 부름에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곧장 대답했다. 조금 부담스러운 반응이었다.

“혹시…… 일부러 저를 고용하신 건가요? 그러니까 일할 사람을 구하는 와중에 우연히 제가 여기 온 게 아니고, 제가 연락을 자꾸 씹으니까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것처럼 인력 소장님을 통해 저를 부르신 건가 해서요.”

그래서 위약금을 세 배나 걸어 파기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화풀이라도 할 생각이냐는 물음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고용된 상황이 의도되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알아 두고 싶었다.

음, 하고 뜸을 들이던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흘끔 내 눈치를 보더니 어렵사리 입을 뗐다.

“사실을 말하자면 맞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악감정을…….

“해민 씨를 만나기가 어려워서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이렇게라도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화낼 겁니까?”

자기 마음 편하고자 감사 인사하겠다고 사람을 억지로 끌고 온 것도 아니고, 나름 좋은 조건으로 많은 돈을 선금으로 주며 일을 시켜 주겠다는데 화낼 이유는 없지.

“그래도 나 손 다친 건 진짜입니다. 해민 씨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진짜고요.”

깁스한 손을 들어 보이며 장난스럽게 웃는 남자의 얼굴은 삼십 대라기보다 철부지 십 대 소년처럼 보였다.

이래서 듬직하게 장성했지만 여리고 순수한 아이의 모습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한 걸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금 받은 만큼은 열심히 해야지. 사람을 어떻게 부려 먹을 계획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저히 못 참겠더라도 뱉어 낼 돈이 없으니 한 달은 버티고 나가야 한다.

“여사님이 식사를 준비하신 모양인데. 짐 정리는 나중에 하고 일단 식사부터 하러 내려갈까요? 나도 겉옷만 벗고 나오겠습니다.”

왠지 살짝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머뭇거리던 남자가 등을 돌려 방을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조용히 품에서 계약서를 꺼내 펼쳤다.

복잡한 전문 용어들의 틈에서 위약금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

아니, 이런 건 좀 크게 써 두셔야 하는 거 아닌가? 시력 안 좋은 사람은 보지도 못하겠네.

제대로 읽어 보지 않고 지장을 찍은 내 잘못이 컸다. 그나마 근로 계약서이니 다행이지, 잘못해서 보증이라도 섰다면 진짜 장기가 털렸어도 모를 일이었다.

내게 배당된 욕실로 들어가 손과 얼굴을 씻으며 속으로 반성을 했다.

∞ ∞ ∞

넓은 테이블에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킁킁, 소리 나지 않게 코를 씰룩이며 냄새를 맡았다. 목구멍이 기름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꿀렁이는 것을 보면 고기가 분명했다.

“어서 와서 앉아요.”

상석이 아닌, 길쭉한 면의 한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당장 오늘부터 머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해서 차린 것이 별로 없어요. 그래도 차린 성의를 생각해서 맛있게 먹어 줘요.”

여사님이 갓 지은 것처럼 김이 솔솔 나는 밥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사님의 말과는 달리 상차림이 푸짐했다.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다는 말이 이런 상황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서 들어요.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여사님이 옆에 서서 음식을 손짓했다. 빠르게 식탁 위를 훑어보는 나보다 먼저 쑥 나온 젓가락이 갈비찜 하나를 들어 내 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먹어 봐요. 여사님 음식 솜씨는 내가 장담합니다.”

웃을 때마다 그린 것처럼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눈을 마주하면 왠지 모르게 멋쩍음이 느껴진다. 저런 식으로 호의를 담아 웃는 사람을 마주한 적이 드물기 때문인지, 호의를 보내는 저 남자가 고용주이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맛있네요.”

빈말이 아니라 갈비찜은 훌륭했다. 오랜만에 먹는 고기는 좋은 요리 솜씨까지 더해지니 입에 넣자마자 씹을 새도 없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다행이에요. 그럼 천천히 이야기 나누면서 식사해요.”

만족스럽게 웃은 여사님이 주방으로 자리를 피하고, 남자와 둘만 남게 되었다.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이 자리가 조금 불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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