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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6)화 (6/172)
  • 6화

    “우리 도련님은 뭐랄까, 조금 아이 같은 면이 있어요. 물정 모르는 철부지라는 말은 아니고요.”

    “네.”

    “훌륭하게 장성했지만, 듬직한 남자이면서도 그 안에 여리고 순수한 아이의 모습도 함께 있죠.”

    “…….”

    여자는 마치 자식 자랑을 하는 부모처럼 흐뭇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문제라면 여리고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는, 훌륭하게 장성한 남자의 모습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아 약간의 꺼림칙함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 네에.”

    “해민 씨가 우리 도련님 옆에서 말동무도 해 주고, 잘 지켜봐 줬으면 좋겠네요.”

    말동무를 해 주고 지켜봐 주라니. 훌륭하게 장성했다는 부잣집 도련님은 혹시 아직도 자라고 있는 중일까.

    개인 비서와 운전기사를 달고 다니는 고등학생, 중학생 남자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도련님이라는 분 나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봐 와서 나한테는 항상 아이처럼 느껴져요. 이제는 세월 지나는 속도도 모르겠고. 어디 보자, 그러니까 우리 도련님 나이가…… 서른넷이네요.”

    여리고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서른네 살의 남자가 두려워졌다.

    2

    다른 일정이 없으면 내일 당장 와 달라며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네는 여자의 박력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배달하는 일이 아니라면 올 일조차 없을 부촌의 동네는 가끔 지나는 차를 제외하면 걸어 다니는 행인조차 없었다. 쓰레기 하나 없는 길을 따라 걸으며 주소지의 대문 앞에 섰다.

    높은 담과 커다란 대문.

    작게 숨을 고르며 조심스레 초인종을 누르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문이 열렸다. 덜컹 소리를 내며 잠금이 풀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자,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 너머로 커다란 저택이 보였다.

    “어서 와요. 날이 덥죠?”

    현관 앞에 나와 기다리고 서 있던 여자가 미소 지으며 손짓을 했다.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며 내 등을 밀었다.

    여자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가서 본 집의 내부는 거실 하나, 방 하나 혹은 둘, 화장실 하나로 구성된 일반적인 집과는 다르게 뻥 뚫린 거실과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이쪽으로 와요.”

    티브이에서나 볼 법한 이런 집이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오는 데 힘들지는 않았어요?”

    “아닙니다.”

    “여기 잠깐만 앉아 있어요. 가서 음료수라도 내올게요. 뭐가 좋아요? 탄산? 아니면 주스? 녹차도 있어요.”

    “얼음물이면 됩니다.”

    이왕이면 비싼 걸 마시고 싶었지만, 단 음료는 이상하게 더 갈증이 나서 지금은 꺼려졌다. 비싸 보이는 소파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내리고 앉아 있자, 여자가 쟁반에 물이 담긴 컵을 받쳐 나왔다.

    “일할 생각으로 온 거죠?”

    “네.”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해민 씨가 긍정적인 대답을 줄 거라고 믿었어요.”

    내 입에서 긍정이 아닌 답변은 절대 나오지 않으리라 믿었다며 내보이는 미소는 뭐랄까, 농담처럼 말하자면 조금 무서웠다. 일을 하려고 마음먹고 왔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당장 일을 시작해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어제도 느꼈는데 묘하게 웃는 얼굴 속에 박력이 있는 할머니였다. 고압적이지는 않지만 사람이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능력. 거절을 하려고 하면 매우 죄책감이 느껴지게 만드는 그런 능력.

    “어제 다녀와서 해민 씨 이야기를 했더니 우리 도련님도 좋아하시더라고요. 일당 얘기를 듣고 많이 서운해하셨어요.”

    “……일당으로 주는 건 곤란하다고 하십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일당이라는 건 하루 일하고 받아 가는 거잖아요. 앞으로 쭉, 오래오래 일을 해 줬으면 싶은데 하루 일하고 그만둘 것처럼 느껴진다고.”

    “네에.”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조금 안심했다. 일도 시작하지 않고 돈 얘기부터 꺼낸다며 화를 내는 고용주도 많이 겪어 본 탓이었다.

    “저…… 말씀은 안 하셨지만, 혹시 몰라서 가져왔습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이력서를 꺼내 여자에게 내밀었다. 뭔가 하는 표정으로 종이를 펼쳐 본 여자가 어머, 하고 작게 웃었다.

    “미처 생각을 못 했는데 준비성이 좋네요. 사실 이런 건 필요 없지만, 그래도 형식상 받아 둘게요. 믿음이라는 게 이런 종이에서 생기는 건 아닌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정말 형식상으로 우리도 계약서를 좀 준비해 봤어요.”

    이미 계약서까지 준비해 놓고 무슨 형식상이래.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여자가 거실 서랍장에서 꺼내 와 내민 종이를 바라보았다.

    “미리 말을 못 해서 도장을 안 가져왔을 테니까, 여기 인주 있어요.”

    이런 거 보통 사인으로 하지 않나요.

    나는 철저하게 준비된 계약서와 인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강요는 아니에요. 천천히 읽고 괜찮다 싶으면 찍어요. 이상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면 협의해서 충분히 고칠 수도 있으니 부담 갖지 말고 말해 주고요.”

    “네에.”

    계약서를 들어 천천히 눈으로 읽어 내리자, 처음부터 갑과 을이 난무하는 글자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거기에 계좌 적는 곳 있죠? 계좌도 적어 줘요. 도련님이 어제 해민 씨 이야기 전해 듣고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월급까지 미리 준비해 두셨다니까요.”

    고용주님께서 그동안 많이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잔심부름해 주는 사람을 이렇게나 반겨 주시다니, 왜인지 느낌이 좋았다.

    사실 저택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약간 의심을 했었다. 그만큼 눈동자에 선량함이 보인다는 여자의 말이 미심쩍었던 탓이다.

    일 시켜 준다고 해 놓고 다른 나라에 팔아 버리는 건 아닌지, 몸뚱이는 그대로 두고 안에 장기만 꺼내 가는 건 아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으리으리한 저택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안에 들어와 앉아 있자 헛생각이었구나 싶어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이런 곳이라면 잔심부름이 아니라 잔디를 깎고 커튼을 손으로 빨라고 시켜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러고 보니 저택에 여사님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큰 저택이라면 일하는 사람을 두세 명은 부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저렇게 나이 드신 여사님이 넓은 집을 혼자 쓸고 닦고 하시는 건가. 그래서 내가 필요한가. 은근슬쩍 분위기 봐서 집안일도 시키고 잔디도 깎게 하려고. 그래도 이 정도 돈을 월급으로 받는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다.

    대충 계약서를 훑어보고 엄지에 인주를 묻혀 지장을 찍었다. 자세히 읽어 보려 했지만 심상치 않은 용어들의 나열에 읽어 봤자 의미가 없겠구나 싶어 반쯤 포기한 탓도 있었다.

    “잘했어요. 내가 읽어 봤는데 딱딱하게 적혀 있어서 그렇지 해민 씨가 언제부터 얼마를 받고 일합니다 하는 내용이더라고요. 이건 해민 씨 거니까 나중에 시간 날 때 심심하면 읽어 봐요.”

    여자가 계약서 하나를 챙기고, 나머지 하나를 접어 봉투에 곱게 넣어 내밀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이력서에서는 못 본 것 같아서.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알파나 오메가는 아니죠?”

    “네. 그냥 베타입니다. ……알파나 오메가면 일을 못 하나요?”

    “아니, 일을 못 하는 건 아니고. 혹시 알파나 오메가라면, 서로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으니까.”

    알파나 오메가가 겪는다는 히트 혹은 러트 사이클 때문인가.

    구인 구직란에서 그런 시기에 휴가를 보장한다는 점을 내세우며 회사의 복지를 장점으로 꼽는 글들을 본 기억이 있다. 어차피 히트나 러트 사이클을 내가 겪을 리도 없고, 그렇게 복지 좋은 회사에서 고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을 뽑을 일도 없을 테니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며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일자리의 복지가 끝내주게 좋을 예정인가 보다.

    “우리 도련님이 알파거든. 그래서 물어봤어요. 아니라니 따로 당부할 말은 없네요.”

    “네에.”

    아니구나. 그냥 고용주가 알파라서 진짜 미리 조심하자는 의미였나 보다.

    알파와 오메가들은 가끔 페로몬으로 기 싸움 같은 걸 한다던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물리력도 없는 그것으로 어떻게 싸운다는 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릴 적 만화에서 보았던 초능력자들의 몸 주변으로 꿈틀거리는 불꽃 형태의 에너지만 떠올랐다.

    “해민 씨?”

    “……네?”

    “아니, 갑자기 멍한 얼굴을 해서.”

    상관도 없는 일로 괜한 헛생각에 빠져 있었다며 짧게 반성을 했다. 정신 차렸다는 뜻으로 두어 번 깜박거린 눈을 힘주어 부릅뜨자, 여자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당장 사람을 부르기엔 여의치가 않은데, 짐은 내일 차를 보낼 테니 실어 와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옷가지 몇 개가 전부라 가방 두어 개면 충분합니다. 그 정도는 혼자서 들고 올 수 있고요.”

    “그래요?”

    내 말에 여자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예 지금 가서 가져올래요? 저녁 시간까지 여유가 있으니까, 해민 씨는 가서 짐을 챙겨 오고 나는 그사이에 식사 준비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새 식구도 들어왔으니 오늘은 더 맛있는 걸 해 먹어야겠네요.”

    “짐을 지금 당장이요?”

    “그래야 내일부터 우리 도련님과 함께 움직이지. 참, 여기서 버스 정거장까지 한참 걸어야 하죠? 택시 타고 다녀와요. 저녁 식사 전에는 와야 하니까 짐 챙기는 시간만으로도 빠듯할 거야.”

    서둘러 줘요, 라고 말을 하며 여자는 택시비까지 챙겨 주었다. 여자의 채근 아닌 채근에 소파에서 일어나 집에서 떠밀려 나온 나는 으리으리한 대문을 나서며 이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돌이켜 생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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