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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5)화 (5/172)

5화

“음식 나오기 전에 조금 시간이 있을 것 같으니, 미리 설명을 할게요. 답은 식사하면서 천천히 생각하고 그 뒤에 말해 줘도 괜찮아요.”

“네.”

“일을 할 사람을 구하고 있어요.”

애초에 그렇게 듣고 오긴 했다.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고. 다만 어떤 일에 사람이 필요한지의 문제였다.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할 마음이야 있지만, 때때로 고용주들은 의욕만으로는 불가능한 기술을 요구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건지 가늠이 안 되어서요. 청소할 사람을 구하시는지, 심부름꾼을 구하시는지, 기사를 구하시는지, 아니면 다른 전문 기술을 요하는 일인지.”

“그런 건 아니고.”

여자는 작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음, 우리 도련님의 개인 비서 정도가 적당하겠네요.”

도련님?

고용주가 눈앞의 여자가 아니라 도련님이라는 다른 분이라고?

사모님이라고 생각했던 눈앞의 여자는 그럼 정체가 무어란 말인가.

도련님은 또 무엇이고. 도련님, 형수님 할 때의 그 도련님인지. 아니면 주인님, 마님, 도련님 할 때의 도련님인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게다가 집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더니 갑자기 웬 개인 비서?

도련님이라는 고용주와 여자의 관계, 그리고 채용 목적에 대해 머리 아프게 고민하고 있노라니 음식이 하나둘씩 나왔다. 남의 속도 모르고 여자는 맛있겠다며 일단 배부터 채우자고 식사를 권했다.

“날이 더워도 뜨거운 걸 먹으면 속이 풀리는 느낌이라니, 참 신기하지 않아요?”

해물누룽지탕을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여자가 조곤조곤 말을 붙였다.

“그…… 비서라는 건, 제가 그런 쪽으로는 아는 게 별로 없어서요.”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비슷하게 말하자면 비서 같은 역할이라는 거지. 따로 수행 비서도 있고, 운전기사도 있으니까요.”

“그럼 딱히 제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내 말에 여자의 숟가락이 잠시 멈췄던 것도 같다.

“우리 도련님이 얼마 전에 손을 다쳐서 왔지 뭐예요. 아무래도 한쪽 손을 못 쓰니 불편한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손이 나을 때까지 옆에서 잔심부름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지금 있는 비서나 기사는 회사 업무 관련해서 하는 일이 정해져 있는 사람들이니까.”

“아, 그럼 시다를 구하시는 거네요.”

“시다?”

“시다바리요.”

공사장에서도 아저씨들 시다로 붙어서 온갖 잡일이란 잡일은 다 했었다.

별다른 기술이 없으니 거푸집 해체부터 슬러지 정리에 아저씨들 간식이랑 식수까지 온갖 것들을 다 날랐다. 기공이니 조공이니 뭔가 있어 보이게 말하지만, 결국엔 시다바리지.

“비, 비슷하려나.”

여자는 살짝 당황한 얼굴이 되어 손부채질을 했다.

“심부름시킬 잡일꾼 구하는 거라면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내심 안도했다. 운전이나 경호처럼 전문 기술이 필요한 일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만, 기껏해야 잔심부름이라면 못할 수가 없으니까.

“으응, 해민 씨가 좀 격하게 표현한 감이 있긴 한데…… 크게 다르지는 않겠죠. 아무튼 도련님 곁에 항시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은 출퇴근하는 직원이거든. 그래서 입주 가능한 사람을 도련님이 개인적으로 구하시려는 거예요.”

“입주라면…… 숙식 제공이라는 말씀인가요?”

“당연히 그렇겠죠?”

숙식 제공,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끌리는 조건이다.

“도련님과 출퇴근을 같이 해야 하고,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옆에 있어야 돼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다 일하는 시간이겠지만, 그건 언제 필요할지 몰라 곁에서 지키고 있는 거지 크게 힘든 일은 없어요. 쉽게 말하면 도련님의 다친 손이 하는 일을 대신 해 준다고 보면 되겠네.”

고용주의 다친 손 대신 일을 한다면 뭐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개인 비서에 운전기사까지 거느리는 부잣집 도련님이 노동을 할 일도 없을 텐데.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고용주와 붙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 걸렸지만, 힘쓰는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잔심부름만 하면 되는데 고용주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것쯤이야 힘든 수준에 속하지도 않았다.

여자의 말처럼 전혀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다만 일이 너무 간단하다 보니 수당이 적을까 싶어 걱정이었다. 고용주와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니 투잡을 뛸 수도 없는데, 하는 일이 쉽다고 수당이 적으면 일이 고될지라도 막노동을 뛰는 게 나았다.

“저…… 수당에 대해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그리고 소장님이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당을 주는 곳에서만 일을 하고 있습니다.”

“네, 그 얘기는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제일 중요한 부분을 빼놓고 얘기하고 있었네요.”

여자는 백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뭔가를 끄적였다.

“한 달 월급은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오래 일을 하면 당연히 더 높아질 거고.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는 따로 봉투를 챙겨 주기도 하고 그래요. 일당이라면 거기서 한 달로 나눈 금액이 되겠죠?”

수첩 속 금액이 예상했던 수준보다 훨씬 높은 것을 확인하고 놀라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 금액이면 공사장에 나가서 한 달 내내 연장 근무에 야간작업까지 빼지 않고 꼬박꼬박해도 받을 수 있을까 말까 할 수준이었다.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체력과 건강을 깎아 가며 버텨야 겨우 손에 쥘 수 있는 금액.

그런 돈을 여자는 고용주를 따라다니며 잔심부름만 해도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숙식비를 제합니까?”

“아뇨, 그대로 받아 간다고 생각하면 돼요. 숙식은 그냥 제공하는 거고요.”

여자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렇게 웃긴 질문이었나 싶지만, 이쪽은 중요한 문제였다. 부자들은 신경도 쓰지 않을 돈일지 몰라도 나는 숙식비로 나가는 돈조차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간단한 일을 하는데, 이 금액을 주신다고요?”

믿기지 않아서 재차 묻자, 여자는 부드럽게 눈을 휘어 웃었다.

“간단한 일이라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죠. 몸이 힘들지 않더라도, 계속 업무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괜스레 정신이 피곤해지잖아. 그거 다 계산한 거예요.”

“그래도, 수당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습니다.”

“적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농담인가 싶었지만 의외로 여자는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눈앞의 여자와 아직 보지 못한 고용주의 스케일에 내심 감탄했다.

“도련님 태어나서 자라는 거 쭉 지켜봐 온 사람으로 말하자면 그리 까다로운 고용주는 아니에요. 그래도 생각해 봐. 하루 종일, 잠자는 시간 빼고 월급 주는 사람이랑 붙어 있어야 하는데, 고용주가 암만 착하고 친절해도 마음은 불편하잖아요.”

그게 바로 정신노동이라고, 여자는 절대 부담 갖지 않아도 될 금액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매시간 붙어 있어야 한다지만 따로 일이 있어서 개인 시간이 필요하다면, 미리 말씀드려 시간을 뺄 수 있어요. 물론 자주는 곤란하겠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일이 생기면 부담 갖지 말고 말해 줘요.”

고용하기 전에 말뿐인 배려일 수도 있겠으나, 이 정도의 금액을 준다면 말과 다르게 빡세게 노동을 시킨다 할지라도 감사했다. 적어도 야간에 공사장 건물 위에서 작업하는 것보다 위험한 일은 아닐 테니까.

“여기 면도 괜찮고, 꽃빵도 퍽퍽하지 않고 아주 맛있네요.”

이 가격에 뭔들 맛이 없을까.

살이 통통한 새우튀김을 한입에 집어넣고 아쉬운 마음에 소스를 젓가락으로 찍어 먹자, 맞은편에서 불쑥 나온 젓가락이 새우튀김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배가 불러 다 못 먹을 것 같아서요.”

“……감사합니다.”

“상황이 괜찮다면 당장 내일부터 와 줬으면 싶어요.”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일용직이었으니 당장 내일부터라도 못 할 것은 없다.

하루라도 일찍 일을 시작해야 하루치라도 일당을 더 받을 수 있다. 병원비 입금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온 이상, 어떻게든 있는 돈 없는 돈 박박 긁어서 병원비 일부라도 입금을 해야 한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나는 해민 씨가 되도록 오래 일을 해 줬으면 좋겠어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식사는 조용히 이어졌고, 빈 그릇을 치운 테이블 위에 후식으로 나온 매실차가 놓였다.

“도련님, 아니, 집주인, 아무튼 그분 손이 다 나아도요?”

손을 다친 탓에 곁에서 잔심부름해 줄 사람을 구한다고 했던 게 아닌가. 손이 아예 잘린 게 아니라면 뼈에 금이 갔든 부러졌든 다친 손은 언제고 나을 텐데.

의아한 물음에 여자는 마땅한 대답 대신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어 고개가 갸웃 기울여졌다.

“해민 씨를 오늘 처음 봤지만, 참 마음에 들어. 눈에 선량함이 가득하거든. 마치 우리 도련님을 보는 것 같아. 나는 해민 씨가 우리 도련님과 같이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디에서 선량함을 발견했는지 모르겠으나, 여자의 시력이 나쁘거나 혹은 빈말일 가능성이 컸다. 지금까지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구하게 되어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살짝 사기꾼의 냄새가 풍겼다.

내 표정의 미묘한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흐음 하고 잠시 말을 골랐다.

“함께 지내야 하는 입장에서 나는 꾸준히 있어 줄 사람이었으면 좋겠거든요. 도련님 손이 나아도 개인적으로 옆에서 도련님을 챙겨 줄 사람이 있으면 안심이 되니까. 조금 더 욕심을 부리면 성실하고 반듯한 사람이었으면 싶고.”

겨우 두어 시간 보았을 뿐인데 내가 성실하고 반듯한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린 여자의 기준은 무엇일까.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지만, 조용히 이어지는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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