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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4)화 (4/172)
  • 4화

    무게가 없는 돈은 쉽게 왔다가 쉽게 간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받아 낸 돈은 더 큰 상처가 되어 빠져나간다.

    그때 이후로 살림은 더 어려워졌고, 엄마는 술에 더 의존하게 되었으며, 나는 더 맞아야 했다.

    나는 묻고 싶었다.

    세상이 이렇게 치열한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코 상냥하지 않은데, ……공돈이란 놈이 정말 존재하긴 하느냐고. 존재한다 한들 우리까지 차례가 올 리 있겠냐고. 언제 우리에게 쥐꼬리만 한 행운이라도 찾아온 적이 있기나 하냐고.

    목숨값, 사례금, 보상금. 무어라 이름 붙인다 한들 공돈이다.

    남자에게로 뛰어가며 떨어지는 철근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던 인영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사고의 충격으로 놀라 잠시 잊었는데, 뒤늦게 떠올려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관리되는 것이 자재다. 애초에 멋대로 떨어질 만큼 아무렇게나 굴리지도 않았다. 사람이 들고 옮기다 떨어뜨릴 수는 있어도 자재 혼자 떨어지는 사고는 드물었다.

    이번에 찾아올 공돈은 내게서 무엇을 또 가져가려 할까.

    더 이상 가진 것도, 물러날 곳도 없는 나는 두려웠다. 내가 딛고 선 바닥마저 빼앗길까 봐, 그대로 추락할까 봐, 더는 서 있지도 못할까 봐.

    사람의 목숨을 대상으로 일어난 고의적 사고.

    눈앞으로 다가온 공돈.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 ∞ ∞

    “SG 쪽으로 갈 인원이 줄었어. 여덟을 보내라 하네. 먼저 와 있던 사람들 누구야?”

    소장은 신경질적으로 종이에 낙서를 하며 사무소 안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적긴 하다. 아무래도 기업 쪽에서 인원을 뽑아 보낸 모양이다. 뜨내기보다야 꾸준히 일할 사람이 관리하기도 편할 테니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쪽도 먹고살아야 하기에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시끄러워. 일할 곳이야 많은데 뭔 불만들이 그렇게 많아. 조용히 좀 하고 있어 봐.”

    앞으로 나선 사람들을 체크하던 소장이 나를 붙잡아 옆으로 끌어냈다.

    “여기 박 씨까지 해서 여덟이 가면 되겠네.”

    “소장님, 저는요.”

    “넌 좀 있어 봐라. 어서어서 내려가서 차에 타. 오늘따라 왜 이리 굼떠. 이러니까 사람을 뽑네 안 뽑네 말이 많지. 이것도 잘리기 싫으면 서두르라고.”

    “소장님.”

    박 씨 아저씨가 신경이 쓰였는지 한마디를 하려다 소장의 채근에 마지못해 사무소를 나선다. 뽑힌 인력들이 사무소를 나서고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소장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서해민, 넌 오늘 특별히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만날 사람 없고요, 전 일하러 가야 하는데요.”

    “아, 그래. 일당, 여기 오늘 일당이다. 이거 받았으니 오늘 일한 것으로 치고. 가서 좀 쉬다가 씻고 말끔하게 입고 여기로 가 봐라.”

    소장이 주머니에서 지폐 열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여 주고 책상에서 메모지 한 장을 찾아 내밀었다. 평소 짠돌이 기질이 있는 소장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다. 일자리 알선이라며 장기 매매로 팔아 버리려고 이러나, 순간 의심이 들었다.

    “아주 부잣집 사모님 같더라. 집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데 보수도 아주 좋아. 내가 특별히 너 생각해서 꽂아 주는 거야.”

    “진짜 부잣집 사모님이 집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면, 그런 사람을 왜 이런 곳에서 찾아요? 그리고 저 월급 받을 때까지 못 기다리는 거 아시잖아요. 그냥 현장이나 갈래요.”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던 소장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제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지만, 이쪽 역시 일당이 아닌 월급 받으며 일할 상황이 아님을 알면서도 저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소장의 행태가 짜증 났다.

    “얘기가 잘되면 일당으로 줄 수 있다는 말도 하더라. 내가 너 몰라서 엉뚱한 곳에 가져다 붙이겠냐.”

    그렇다면 뭐.

    나는 소장이 쥐여 준 종이 끝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비비며 뜸을 들였다.

    “가서 뻘소리 지껄이면서 건방지게 굴지 말고, 네네 알겠습니다 하면서 비위 좀 맞춰 드리고. 넌 인마, 어린놈이 너무 뻣뻣해서 문제야. 돈 벌기 힘든 줄 아는 놈이 왜 야들야들하게 굴지를 못해? 며칠 전에 그 뭐냐, 높으신 분한테 기어코 연락도 안 했다며? 그 뒤로 비선가 뭔가 하는 양반이 몇 번 찾아와서 너 언제 한가한지 은근히 묻고 가더라. 그 높으신 분들이 눈치 보게 만들고. 서해민, 아주 그냥 대단해.”

    내 머리를 손으로 툭툭 건드리며 핀잔을 한 소장이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협박하듯 말했다.

    “일당까지 줬는데, 그거 받고 다른 곳 가서 일했다는 소문 들리기만 해. 그 사모님 허탕 치고 돌아갔다는 연락 오는 날에는 너 여기서 일 받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다른 사무소에도 쫙 전화 돌릴 거야.”

    인력 사무소 하나 가지고 있는 주제에 치사하게 굴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가진 것이 없는 나는 약자였고, 저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따르지 않으면 정말 소장의 으름장처럼 여기서 일 구할 생각은 하지도 못할 터였다.

    “네.”

    “그래, 대답만 하지 말고 꼭 가라. 목욕탕에 가서 시원하게 때도 좀 밀고.”

    인당수에 몸 바치러 가는 심청이도 아니고, 정화수 떠 놓고 절을 할 것도 아닌데 무슨 때를 밀어. 라고 생각하면서도 소장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머니에 돈을 쑤셔 넣고 사무소를 나섰다.

    ∞ ∞ ∞

    점심시간인지 정장을 갖춰 입은 회사원들과 근심 하나 없어 보이는 대학생들로 카페 내부는 꽤나 붐볐다.

    으리으리한 음식점이나 술집도 아닌데, 고작 카페에 들어서면서도 주눅이 든다. 아마도 나와 어울리지 않는 장소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상대방을 찾을 길이 없어 마치 짐짝 모양 가만히 서 있던 나는 카페를 나서는 사람들에게 치여 한쪽으로 찌그러지듯 비켜서야 했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꼼지락거리다 손끝에 걸리는 쪽지를 꺼내고서야 전화를 걸어 보면 된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이런 사소한 상황에서까지 꼭 모자란 짓을 한다.

    ―여보세요.

    신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상대도 카페 내부에 있는지 비슷한 소음이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전해졌다.

    “서해민이라고 합니다. 인력 사무소에서 이쪽으로 가 보라고 연락처를 줘서요.”

    ―아, 서해민 씨. 잠시만요.

    어떤 차림을 하고 있냐는 물음을 꺼내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화장실에라도 갔나, 아니면 그냥 엿을 먹이려는 건가.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들고 멍하게 서 있자, 누군가 다가와 톡톡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서해민 씨?”

    “아, 네.”

    몸을 틀어 돌아보자 곱게 늙은 중년 여인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멋들어지게 틀어 올리고, 투피스 바지 정장을 입은 여자는 아줌마라고 부르기엔 늙어 보였고 할머니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세련되어 보였다.

    “나갈까요? 여긴 조금 시끄럽네요.”

    “아, 네. 나름 번화가라서요.”

    버벅거리며 내뱉은 말에 여자가 작게 웃었다. 걸어가는 여자를 앞서 문을 열어 주자 고마워요, 하는 인사가 돌아왔다.

    “점심 들었어요?”

    “아뇨, 아직입니다.”

    “잘되었네요. 나도 점심 전이라, 식사하면서 천천히 얘기하는 게 어때요.”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 준다는 밥을 거절할 정도로 배부른 놈은 아니다. 여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여유롭게 걸으며 어디가 좋을까 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이쪽 동네는 초행이라. 혹시 맛있는 곳 알아요?”

    “……아뇨.”

    가는 식당이라고 해 봐야 함바집이나 기사 식당이 전부였다. 그런 곳을 가자는 의미는 아닐 테고, 데리고 간다 한들 사모님 입맛에 맞을 리 만무하여 고개를 내저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은요?”

    “다 잘 먹습니다.”

    “일단 길에 서 있는 건 좀 그러니까, ……저기 조용하고 괜찮아 보이네요. 중식 괜찮죠?”

    괜찮기야 하지만, 중식이라고는 동네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배달해 먹은 게 전부이다. 저렇게 으리으리하게 생긴 중식당이라니. 보기만 해도 왠지 비싸 보였다.

    궁궐 대문처럼 꾸며진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종업원이 달려와 맞이했다.

    “몇 분이세요?”

    “둘이요. 혹시 룸으로 된 자리가 있나요?”

    “네, 이쪽으로 오세요.”

    종업원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병풍 같은 가림막으로 구역이 나뉜 곳이 나왔다. 동그란 테이블 앞에 서자 먼저 의자에 앉은 여자가 앉으라며 손짓을 한다.

    “먹고 싶은 것으로 골라요.”

    메뉴판을 펼치며 여자가 말했다. 들여다본 메뉴판 속 음식의 가격에 힐끗 여자의 눈치를 보았다.

    몇만 원이 넘어가는 메뉴. 역시 만만한 것은 자장면이나 짬뽕인데. 그마저도 곱절은 비싼 가격이다.

    “인원이 적으면 이게 문제 같아요. 여러 개 시켜서 나눠 먹기도 어려우니까. 그렇죠?”

    여자는 내 고민을 오해했는지, 코스 요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 인분씩 나오는 건 왠지 양이 적은 것 같아서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맛볼 수 있는 점에서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코스로 시키는 거 어때요?”

    여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의 가격대를 보고, 설마 일을 맡지 않는다고 해서 음식값을 내라고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아니면 애초에 각자 먹은 것을 계산할 생각으로 왔을지도 모르고.

    “……네, 괜찮습니다.”

    그래도 사람 불러서 밥 먹자고 해 놓고 각자 계산하자고 하겠어. 부잣집 사모님이 그런 수준은 아니겠지. 조금 배짱을 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한 여자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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