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화 (1/172)

1화

Prologue

남자는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입을 다물고 잠시 침묵하는 남자를 따라 실내의 공기가 숨 막히게 무거워졌다. 조금 전까지 방정맞게 웃으며 떠들어 대던 사내 또한 급격하게 변한 분위기에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나불거리던 입을 꾹 다물었다.

“……웃겨?”

큰 의미가 담기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남자의 심사가 뒤틀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기도 했다. 질문을 받은 사내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그 증거였다.

“화, 환아. 왜 갑자기 정색을 해. 분위기 썰렁해지게. 형이 농담한 거지. 오랜만에 만나서 형이 오버 좀 했나 보다. 기분 풀어.”

“오랜만에 만나면, 사람 기분을 좆같이 만들어도 되는 건가?”

“에이, 화났어? 형이 잘못했네.”

“형은 씨발. 형 친구라고 형님 형님 해 줬더니 네가 진짜 내 형이라도 되는 줄 알아? 오랜만에 보니까 내가 존나 만만해?”

남자는 동네 건달처럼 건들거리며 시비조로 물었으나, 그를 마주하고 있는 사내는 불만보다 미약한 불안을 표정에 드러냈다. 슬쩍 남자의 형제에게 도움을 청하듯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아, 내 말은 좆같아서 그냥 무시해도 된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런데 왜 좆같이 굴어. 내가 씨발…….”

감정의 폭주를 참아 내듯 남자는 뒷말을 삼키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가…… 요정이 없다고 말할 때마다 요정님이 죽는다고 했어 안 했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감정을 추스르다 끝내 실패한 남자는 옆에 있던 소파 쿠션을 사내에게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점프하듯 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쥐었고, 몇 차례의 주먹질에 바닥으로 쓰러진 사내에게 발길질을 해 댔다.

“너 때문에 오늘 당장 죽은 요정이 수십은 되겠다. 내 말이 좆같냐? 좆같냐고!”

자업자득이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나댈 때부터 싸하다 싶었지.

다 큰 남자들이 뒷골목 취객처럼 때리고 두들겨 맞는 장면을 영화 보듯 멀거니 구경하며 생각했다.

서른 넘은 나이에 요정님 운운하는 남자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런 남자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알면서도 굳이 낄낄거리며 자극하던 사내도 정상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일방통행인 도로에 180km/h로 역주행하는 트럭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중에 항의를 하든 신고를 하든 일단은 피해야 한다. 같이 역주행을 하든 후진을 하든 우선은 피해야 마땅하다. 막아 봤자 사고만 나니까.

미친놈이란 역주행하는 트럭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저 남자는 미친놈이었다.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이 통하지 않는, 뚝심 있게 돌은 놈.

미친놈인 줄 알고 있었으면 몸을 사려 피했어야 정상이지.

사무실 바닥에 쓰러져 몸을 말고 개처럼 얻어맞고 있는 저 사내를 처음 봤을 때, 어쩌면 지금의 상황을 조금은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저런, 우리 환이가 화가 많이 났네.”

두들겨 패는 남자의 형제이고, 얻어맞는 사내의 친구라던 이가 혀를 찼지만 곤란함이나 난처함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즐기듯 약간의 보람과 뿌듯함이 담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내 물음에 그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우리 환이가 착해서, 사람은 안 죽여.”

아니, 댁 동생 말고 저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댁 친구.

누구에게 묻더라도 날뛰는 남자보다 개처럼 얻어맞는 사내의 안위를 먼저 걱정할 텐데.

형제가 쌍으로 일반적이지 못했다.

역시 이 상황에서 정상인 사람은 나뿐인가.

“……꿀차가 맛있네요.”

돈 많은 높으신 분이 주는 꿀차라서 그런지 아주 진하고 달다. 꿀차를 홀짝홀짝 아껴 마시며 중얼거리자, 크흠 하고 만족스러운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저번에 해민 씨가 맛있게 마시는 거 보고, 미리미리 좋은 놈으로 준비해 두라고 했지. 백 퍼센트 천연 유기농 로얄제리야. 몸에 아주 좋…….”

“한 잔 더 부탁드립니다.”

몸에 좋은 거는 두 번 마셔 줘야지.

반쯤 남은 꿀차를 단번에 삼키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실컷 분풀이를 해 대던 남자가 내 목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이 왜 그렇게 붙어 있어.”

이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 곁에 다가앉아 있던 그의 형제가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해민 씨가 꿀차 맛있대. 챙겨 줄 테니까 갈 때 가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제 형제와 나를 번갈아 보던 이환이 피 묻은 주먹을 바지 자락에 쓱쓱 닦으며 다가왔다. 터벅터벅 걸어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내 발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꿀차 맛있었어요?”

“……네.”

꿀차의 호불호보다 저기 널브러져 있는 사내의 생사가 더 중요해 보였으나, 정상적이지 못한 사람을 자극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어서 모른 척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요정은 이슬과 꿀을 먹고 산대요. 해민 씨는 정말 요정님이네요.”

저는 이슬만 먹고 사는 연예인이 아니라서, 밥을 먹고 삽니다만.

“요정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첫 웃음소리가 흩어져서 생겨난대요.”

“…….”

“당신은 내가 웃었을 때 태어났나요?”

이환의 물음에 어떤 답변을 돌려주어야 할지 깊게 고민했다.

그는 종종 뜬금없는 타이밍에 생뚱맞은 질문으로 나를 당혹스럽게 하곤 했다.

그래도 최대한 의연한 태도로 남자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으나, 아무리 계산을 해 보아도 그와 나의 나이 차이가 ‘불가능’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이환의 나이 서른넷, 내 나이 스물.

내가 그의 첫 웃음에 태어났다면, 적어도 그가 열네 살 때 처음 웃었다는 말이 된다. 이환이 엄청 근엄하고 진지한 아이였거나, 그냥 개소리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인데.

나는 후자에 무게를 두었으나 현명하게도 이환의 앞에서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기엔 나이가 맞지 않는데요.”

대신 치명적인 오류를 짚어 주자, 이환은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며 작게 웃었다.

“저런, 내 요정님이 아니었군요. 하지만 괜찮아요. 만질 수 없는 요정보다 만질 수 있는 해민 씨가 내 곁에 있는 게 더 좋으니까.”

평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는 그의 손등은 어느새 말라붙은 붉은 얼룩이 꽃송이처럼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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