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이 나거나 다치지 않고 잠을 자는 것처럼 편안하게 떠났어요]
현규하가 돌아올 때까지 울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는데, 그날은 펑펑 울고 말았다.
많고 많은 그리움들이, 겨울밤의 눈처럼 고요히 쌓여 갔다.
9시 정각.
인유신은 오늘도 그리움을 전했다.
백두산의 일을 마무리하고 이동 게이트를 통해 한양으로 귀환한 현규하를 맞은 사람은 최진혁이었다. 인유신을 비롯한 세 사람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최진혁은 그답지 않게 씁쓸한 감정을 드러냈다.
“인사도 없이 가는군. 끝까지 망할 놈들이야.”
“섭섭해요”
“……뭐, 조금은.”
최진혁은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그 자식들과 어울리다 보면 사는 게 조금은……. 재미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내가 알던 최진혁도 그렇게 생각할걸요.”
“……그런가”
“인생의 즐거움을 순서대로 정하라면 첫 번째가 동생 뒷바라지고 그다음이 매형 갈구기일 게 분명합니다.”
“웃기는 놈이군.”
헛웃음을 흘린 최진혁은 곧 평소대로 돌아왔다.
“스토얀에 이어서 네 담당도 내가 되었다. 비서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거다. 왕이 되셨으니 존칭이라도 써 줄까”
“지랄 말고 용건이나 말해요.”
“게이트 건물 밖에 국왕 폐하와 총리 겸 영의정 합하 등등이 보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두 분도 한양으로 내려와 있고. 너만 괜찮다면 바로 극진히 모셔서 만날 준비 만반이야.”
현규하는 대충 흘려들으면서 하품을 했다.
정부가 무슨 속셈인지는 짐작이 갔다. 국제 사회에서 조선이 갖는 영향력의 태반이 스토얀에게서 비롯된 것들이다. 자신이 뒤를 잇게 되었으니 다른 나라로 거취를 옮기는 게 아닐지 전전긍긍하고 있겠지.
그딴 건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 문제였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부터 데리러 갈 건데요.”
“집은 지내던 사택도 상관없긴 하지만, 어디든 원하기만 하면 기꺼이 제공한다는 전언이다. 만월대의 정전인 회경전을 요구해도 바로 통과될 거다.”
“관광객들 드나드는 궁궐에 살아서 뭐 해요. 스토얀이 쓰던 집이나 정리해 줘요.”
당연히 아버지를 기리겠다는 뜻은 아니었고, 화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그곳의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였다. 어머니가 좋아했다는 흔적이 남은 유일한 장소이니. 스토얀이 걸어 놓은 마법을 쓰기 편하다는 이유도 있었고.
“아, 짐이나 가구는 사택에서 쓰던 거 빼서 갖다주고요.”
“알았다.”
인유신의 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란 걸 이해한 최진혁은 별말 없이 그의 손에 열쇠를 던졌다. 최진혁의 집 열쇠였다.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건물 밖에 조심스럽게 모여 있는 사람들을 다 무시한 현규하는 곧장 사택으로 날아갔다. 6세는 은신처에 가져다 놓은 사료를 오물거리다가 현규하의 기척을 느끼고는 경계하며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현규하는 케이지의 뚜껑을 열고는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자신이 눌변이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햄스터 한 마리에게 할 말을 고르는 게 어려웠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 이해할지는 모르겠는데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내가 익숙하지 않더라도 들어 줬으면 좋겠다.”
“…….”
“유신 씨는 이제 안 와. 누나를 유기한 건 아니고, 상황이 급박해져서 어쩔 수가 없었어. 유신 씨가 버리고 몰래 도망갈 사람이 아니라는 거 누나도 잘 알지”
“…….”
“앞으로는 내가 누나를 돌봐 주려고 해. 유신 씨만큼 잘 보살펴 주지는 못하겠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 나도 남는 게 시간밖에 없을 거 같고…….”
“…….”
햄스터는 여전히 은신처에 숨어 있을 뿐이다.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현규하는 입술을 다물었다. 말도 안 통하는 동물을 붙잡고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지.
“……젠장.”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낮은 한숨을 씹었다. 잘난 척하면서 인유신을 먼저 보내 놓은 주제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마음이 헛헛했다. 인유신의 흔적이 짙게 남은 햄스터라도 부둥키고 싶을 만큼.
“내가 무서우면 돌봐 줄 사람 따로 구해 볼게. 걱정하지는 마.”
어떤 사람이어야 6세가 경계심을 덜 가질까. 고민 속에 현규하는 탁자를 짚으며 일어났다. 문득 케이지 안에서 베딩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6세가 은신처에서 기어 나왔다.
열린 뚜껑을 지나 케이지 밖으로 나온 6세가 종종거리며 다가왔다. 이윽고 가까이 접근한 6세는 제 얼굴을 현규하의 손가락에 가볍게 비볐다.
“찍.”
“…….”
이까짓 게 뭐라고.
겨우 이딴 게 뭐라고.
현규하는 입술을 깨물며 6세의 등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포근포근하고 아주 작은, 그러나 분명한 온기. 인간보다 훨씬 빠르게 뛰는 자그만 심장의 맥동이 손끝으로 느껴지는 듯한 저릿함이 그를 안도하게 했다.
조금 더 안으며 쓰다듬으려니, 거기까지는 허락해 주지 않겠다는 듯 손가락을 밀치며 도로 케이지로 돌아갔다.
“알았어. 조심할게.”
실없이 픽 웃고는 6세가 곤히 잠들 아침까지 그 옆을 지켰다.
최선을 다해 돌보고 싶었지만 현재 상태까지 면밀하게 파악하며 치료해 주던 인유신의 빈자리를 채우긴 어려울 터였다. 현규하는 최진혁을 통해 언제 어느 때고 햄스터의 치료를 담당할 치유술사를 헵타곤에 요청했다.
‘연락하면 5분 내로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서 24시간 상시 대기해야 하는 치유술사’라는 요구를 최진혁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보고했다. 안 그래도 귀한 치유술사다. 치료 대상이 햄스터라는 말에 상부에서는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파견해 주었다.
햄스터가 살아 봤자 얼마나 오래 살겠냐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6세는 그들의 예상보다 더 길게 생존했다.
케이지 안에서 다리를 건너다가 베딩으로 떨어지기만 해도 뼈가 부러졌을지 모른다면서 한밤중에 치유술사를 호출할 만큼 유난을 떨었기 때문이라고 최진혁은 평가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생명을 태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원기도 북돋게 하는 현규하가 직접 보살핀 덕분일 것이다.
6세는 인유신과 헤어진 뒤로도 10개월을 더 살았다.
털에 부쩍 윤기가 사라지고 잠을 자는 시간이 길어지자 현규하는 다른 일은 전부 미루고 케이지 옆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6세는 그렇게, 현규하의 손에 안겨서 고요히 잠들었다. 잦아드는 작은 짐승의 심장 소리가 아주 오랫동안 그의 귓가에 머물렀다.
현규하가 다음으로 착수한 건 세계 곳곳에 ‘방주’를 만드는 일이었다. 본디 인간을 위한 수단이었던 섭리의 발현이 멸망하는 세계를 가일층 혼란스럽게 하는 위협이라는 건 상당히 아이러니했다.
‘뭐, 신이라고 해서 완벽한 건 아니라는 방증인가.’
그러한 오판을 하는 이들이니 스토얀이라는 최악의 결과물도 나올 수 있었던 거겠지. 여하튼 지금은 스토얀이 이용했던 힘을 자신도 이용하기로 했다.
〈많이 낡은 지금의 나로서는 무리지만 네가 왕이 된다면 안전한 지역을 생성할 수 있을 거야. ‘방주’의 일종이라고 할까.〉
과거에 스토얀이 했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현규하는 게이트가 생성되지 않으며 마수도 진입하지 못하는 안전지대를 자신이 만들 수 있으리란 걸 알았다. 어디에 어떠한 규모로 몇 개나 되는 방주를 만들어야 하는가……. 라는 고민을 4초 만에 집어치운 그는 전문가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방주를 만들려고 하는데요.”
이호와 총리를 비롯한 조신들이 모인 묘당에 난입한 현규하는 자신의 계획을 대충 설명했다.
현규하는 우리아쉬를 위한 방주를 만들고 유지하느라 긴 세월 대부분의 힘을 소진한 스토얀과는 달랐다. 그가 이 별과 이어지게 되자 전 세계적인 인구의 감소 폭은 조선과 비슷할 정도로 둔화되었다.
그의 가치가 여실히 입증된 상황에서 안전지대까지 만든다. 이에 조선의 이익도 수반될 수 있나.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로. 삽시간에 좌중에는 계산적인 시선들이 오갔다.
그 낌새를 눈치 못 챌 현규하가 아니었다.
“방주를 생성할 우선순위나 위치 선정 같은 거로 받아먹을 게 있으면 적당히 해 먹고요, 계산만 확실하게 해서 알려 줘요.”
현규하는 제 능력으로 가능한 방주의 허용 범위 등을 알려 준 뒤 웅성거리는 묘당을 떠났다.
산발적으로 열리는 게이트를 감당할 인력이 없어서 허우적거리던 각국은 화색을 띠었다. 이를 진행하며 계획을 수립하느라 숱한 논의가 오갔다.
게이트에 경제와 물산의 의존도가 높으니 나라 전체를 차단하는 건 곤란했다. 인구가 많이 몰린 대도시를 중심으로 방주가 생성되었다. 시작은 개성이었다.
방주의 생성에 현규하가 내건 조건은 하나였다.
“독재를 하든 대통령을 뽑든 상관없으니까 사람 죽이거나 하지 말고, 평화롭게 갑시다.”
어떤 아포칼립스가 열리든 현규하는 별로 상관이 없었지만, 인유신은 혼란이 가중되는 세상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민중을 억누르는 일에 익숙한 이들은 암중으로 철권통치를 이어 갔으나, 안전장치 없이 100미터 상공에서 추락하는 사건이 네댓 번 발생한 뒤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은 세상의 어디든 볼 수 있으며 모든 방법으로 죽일 수 있는 절대자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현규하라는 억제제로 인한 강제적이며 항구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이 정도면 평화로운 멸망이 아닌가, 하고 현규하는 자평했다.
“그런데 말이야.”
어느 날 문득 최진혁이 물었다.
“너 여기 남은 거 유신이 때문이지”
“그쪽한테 말한 적 없는데요.”
“김유신에 대한 정보를 요구한 다음에 유신이만 혼자 보냈으니 뻔하지 않나.”
“쳇.”
제 속이 쉽게 읽혔다는 거에 현규하는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허공에 늘어졌다.
“계속 정보 알아봐 줘”
“그냥, 뭐……. 가만히 놔두고 있다가 유신 씨나 가족들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면 몰래 도와줘요. 사기를 당한다든가, 사고가 났는데 가해자가 적반하장으로 나온다든가, 직장 상사가 갑질을 한다든가, 그런 일들 많잖아요.”
“알았다.”
“나한테 일일이 알려 줄 필요는 없고요.”
용건이 끝난 최진혁은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에게 속이 쉽게 읽힌 대가로 현규하는 사소한 염장이나 질러 주기로 했다.
“그쪽도 유신 씨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세상이 즐겁고 재미있으며 반짝거릴 겁니다. 물론 유신 씨 같은 사람이 또 존재할 리는 없지만.”
최진혁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장지문을 쾅 닫고 나갔다.
무리가 되지 않도록 순차적으로 방주를 생성했다. 이를 제외한 여가를 현규하는 인왕산에서 보냈다. 6세마저 죽고 난 뒤에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 별의 비명을 듣지 않기 위해.
시간이 멈춘 육체는 영양의 공급도 수면을 통한 회복도 필요 없었으나 현규하는 웅크린 채 깊은 수마에 잠겼다. 그는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동면하는 짐승처럼 인유신과 나누어 낀 반지를 매만지며 의식을 차단했다.
특별히 가꾸지 않아도 마당의 꽃은 언제나 만발하였기에 잠에서 깬 뒤에도 시간을 통 가늠할 수 없었다. 종종 찾아오는 최진혁의 얼굴에서 세월의 흐름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제 육체만이 아니라 이 별의 시간까지 통째로 정지되었다고 착각했을 터다.
‘아, 이거 조금 위험한가.’
정지된 시간 속에서도, 깊은 수마에 잠겼을 때도, 그는 언제나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삐걱거리며 추락하는 멸망은 완만하지만 선명하게 다가왔다. 현규하는 때때로 공포 어린 별의 비명을 들으며 잠에서 깼다.
그럴 때면 그의 감각 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별의 처절한 두려움이 오싹하게 밀려들었다. 인간을 비롯하여 수십, 수백억의 크고 작은 생명체가 모두 소멸한다는 건 어떤 절망일까. 어떤 공포일까.
‘만약 아버지가 멀쩡했더라도 이런 느낌을 계속 받으면 다 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었겠는데. 망해 가는 원인이 아버지이긴 했지만.’
도주할 준비를 하고 있던 스토얀과는 달리 그는 아직도 홀로 아득한 시간을 버텨 내야만 한다.
인유신을 먼저 보낸 게 잘한 결정이라는 걸 새삼 되새긴다. 운명을 나누어 짊어지게 된 그의 짝이었으니 인유신 또한 이 힘겨움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괴로워하는 건 자신 혼자만으로 족하다.
잠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느낀 현규하는 영혼의 감각을 무디게 했다. 별의 비명에 흔들림이 적도록.
‘……역시 위험해.’
무디어짐에 익숙해지면 조금 더 무디게. 거기서 조금 더 무디게.
그렇게 깎이고 깎이고 깎이면, 종내에는 ‘현규하’라는 인간마저 마멸되고, 세계를 지탱하는 ‘왕’이라는 개념체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현규하는 ‘현규하’라는 자신을 붙잡기 위해 ‘무닌의 눈’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인유신의 1초와 현규하의 1초는 다르다. 시간의 배속이 다른 만큼 좌표에 표시되는 인유신의 움직임은 아주 느렸다. 현규하가 하루 종일 관찰해도 인유신에게는 겨우 몇 분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을 그 시간만이 현규하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오롯함이었다.
‘아직 회사로 출근을 안 하는 거 같은데……. 내 집으로 이사한 건가 유 변과 만났나 보군. 다행이다.’
느릿느릿한 인유신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이런저런 상상을 이어 갔다.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 움직임에 유의미한 변화가 생긴 건, 인유신이 떠나고 11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을 때였다.
‘……’
처음에는 특정한 움직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느릿느릿한 흐름을 유심히 응시하던 현규하는 반복이 이어진 후에야 깨달았다. 규하.
인유신이 연락을 취할 수단을 찾은 것이다.
꽤 오랫동안 자신의 안에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지도 못했던 심장의 고동이 불현듯 가슴 안을 쿵 찍었다.
‘천재……. 진짜 천재…….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아마 인유신이 여전히 그의 상태창을 읽을 수 있다면 온갖 감정의 향연들로 빼곡히 뒤덮였으리라.
두근두근두근.
잊고 있던 거친 울림이 뇌까지 휘젓는 것만 같은 감각에 현규하는 아찔함마저 느끼면서 방 안을 움직였다. 되도록 천천히 이동하려 했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그에 비하면 모스 부호를 떠올린 제 아이디어는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인유신이 모스 부호에 서툴러서 대화는 몹시 더뎠고, 느릿느릿한 움직임에 집중하는 건 꽤 심력을 소모했으나, 이아드에 남은 뒤 처음으로 느끼는 즐거움이었다.
대화의 조각마다, 현규하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았다.
아. 이 사람이 있는 한 나는 언제까지고 ‘현규하’라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겠구나.
그 확신은 동시에 그를 환희하게 하였다.
정신없이 대화에 몰두하던 며칠이 지났다. 현규하는 마지막으로 6세의 이야기를 전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것을 그가 깨닫지 않아도 되도록.
[확인을 못 할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는 날짜 정해서 연락해요]
그렇게 약속을 정했다.
인유신에게는 1주일에 1시간. 현규하에게는 1년 9개월에 4일간의 약속을.
고여 있는 그의 곁으로 시간은 빠르게 짓쳐 갔다.
가장 먼저 부고를 들은 건 이호였다. 이아드의 기준으로 무척 장수한 그녀보다 하나밖에 없던 자식이 먼저 사망했기에 왕위는 왕세손이 이어받았다. 이호를 시작으로 하나둘 마지막 소식을 접했다.
어느 날 근 2년 만에 깨어나 인유신과 대화한 뒤 밖으로 나갔을 때, 현규하는 낯선 사람을 보았다.
“최진혁은요”
“최 부장님은 반년 전에 귀천하셨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앞으로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아.”
그랬구나. 그렇게 되었구나.
현규하는 말없이 방으로 돌아가 ‘무닌의 눈’으로 띄운 좌표만을 응시했다. 언제나처럼 굼뜬 인유신의 움직임이 보인다. 잘 준비를 하는 듯했다.
느짓한 걸음이 침대에서 멈추는 모습까지 바라보며, 현규하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재차 확인했다.
그는 식물 공장과 배양육의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과학자였다.
연구에 몰두했기 때문인지, 혹은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운명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는지, 그도 아니면 마음의 위로가 될 뜨거운 사랑을 만나지 못한 탓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할 모호한 이유로 결혼도 하지 않았다.
늦게야 보육원에서 자신과 같은 고아를 입양했다. 행복한 삶을 누리고 평안히 작고한 자신의 부모처럼 훌륭한 아버지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노력했다.
저명한 학자인 그의 연구는 훌륭한 결실을 맺었다. 은퇴하여 책을 집필하는 도중에도 후배들이 조언을 구하거나, 방송국에서 간혹 취재 요청을 할 정도였다.
그날 찾아온 낯선 방문객도 방송국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정원에 가꾼 인조목 밑의 흔들의자에서 휴식을 취하던 그에게 대뜸 던진 첫마디였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잘생긴 청년이었다. 어리둥절해서 방송국에서 왔느냐 물으니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박사님이 쓴 논문을 읽고 궁금해져서요.”
젊은이가 연구에 관심을 보인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라며 문을 열었으나 청년은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섰다.
청년의 질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박사님의 인생은 어땠어요”
인생의 황혼기에 느닷없이 던져진 질문은 연구만큼이나 그를 고민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천천히 돌이켜 보았다.
친부모에게는 버림받았지만, 헌터로서도 소방관으로서도 부모로서도 존경스러운 양부모에게 입양되었다. 학업도, 연구도 언제나 최선을 다했으며 가족에게도 충실했고 교우 관계도 두텁다. 대학생이 된 아들은 자신의 뒤를 따라 배양 식품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도 그는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부딪히며 자신의 시간을 주도했다.
후회 없이 행복한 삶이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리라.
대답을 들은 청년은 어째서인지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혔다.
맞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가 올리니 이미 청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후 그가 두 번 다시 청년과 만나는 일은 없었다.
담당자가 몇 번 더 바뀌었을 때 현규하는 인왕산을 나왔다. 얼마만의 외출인지도 모르겠지만 하늘은 보다 더 탁하게 흐려졌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많이 줄었다.
그사이에도 솜노로스는 가끔 찾아와 그를 귀찮게 했다.
돌아다니다 보니 왕실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었다는 뉴스를 접할 수 있었다. 방계 왕족에게 대를 잇게 하느냐, 왕실을 폐지하느냐, 이왕삼각(전대의 왕조와 후손을 우대하는 것.)의 예우를 받으며 현존하는 고려 왕실의 직계가 복벽하느냐 등등의 대안이 국민 투표에 부쳐졌다. 결과는 왕정 폐지였다.
“왕자님이 여기에 있는데 인간들은 왕을 없애 버렸잖아!”
“아, 시끄러워.”
“근데 왕자님, 어디 가”
“아무 데나.”
“나도 같이 갈래.”
“낮에는 잠만 처자는 놈이 뭐라는 거야.”
“왕자님도 낮밤을 바꾸면 될 텐데.”
꼬리지느러미를 쫄랑거리며 쫓아오는 솜노로스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낮에는 자느라 못 쫓아올 테니 며칠 안 가서 금방 사라질 것이다.
현규하는 스토얀처럼 땅 위의 모든 세계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그도 방주를 만들고 난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수들이 적의를 드러내는 생명체는 인간에 국한되어 있었다. 마수는 야생동물을 없는 취급 하고, 야생동물은 브레이크 된 던전으로 인해 유지되는 기묘한 생태계가 방주 밖에 구성되어 있었다.
‘뭐, 어차피 던전은 인간을 위해 신들이 만든 거고, 동물들이 결정석을 써먹을 일은 없으니 영향이 크게 없는 것도 당연한가.’
세계를 부감하는 창을 끈 현규하는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목적지는 딱히 없었다. 그냥 내키는 대로 갈 작정이었다.
창을 통하면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지만 그는 직접 여행하는 걸 선택했다. 인유신을 위해 맡게 된 세계를 마지막으로 한 번쯤 둘러보고 싶었다.
별은 고요히 침잠했다.
그녀는 이 별에서 태어난 최후의 인간이었다.
4살이 되던 해에 고유 능력을 각성했다. 비행이었다. 자라나면서 아이누족(일본과 러시아 일대의 소수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각인하게 되었을 무렵에는 이 ‘방주’에 또래의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아이누족 여성은 성장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때마다 문신을 그린다.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문신을 그녀도 입가에 새겼다. 결혼할 생각도 없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었지만 어머니의 문신을 흉내 냈다.
‘엄마, 안녕. 확답은 할 수 없지만 되도록 돌아오려고 노력해 볼게.’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직감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가족과 친지를 전부 먼저 보낸 그녀는 멸망하기 전에 세계나 구경하기로 했다.
이동하는 데 사용하는 정형 게이트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방주도 있었고, 마수들을 돌파하여 진입해야 하는 방주도 있었다.
그녀의 비행 능력은 마수들의 서식지를 가로지르는 데 아주 유용했다. 비행형 마수에게 발각되는 일만 없다면 비교적 무난히 방주와 방주를 건너다닐 수 있었다.
‘방주는 참 신기해.’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인 아주 오랜 옛날에 ‘왕’이라는 이에 의해 생성되었다는 방주다. 그 ‘왕’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상냥한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손에 꼽을 정도의 사람만 남은 방주도, 적막감만이 감도는 방주도, 왕은 무엇 하나 거둔 게 없었다. 방주의 숫자는 지난 200년간 단 하나도 줄지 않았다.
‘사람이 죽어서 하나도 안 남았다는 걸 알 텐데도 거두지 않고 있으니 무척이나 좋은 사람인 게 아닐까 유지하는 것도 힘들 거 같은데.’
전 세계 곳곳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방주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희에게 안식과 평화를 줄 테니 너희는 포기하지 말고 너희의 삶을 살라고.
단순한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긴 여행이었다.
그녀보다 어린 사람은 단 하나도 만나지 못했으나, 도중에 친구도 사귀었고 연인 비슷한 관계가 된 사람도 있었다. 여행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인간의 흉참한 본성을 멋대로 표출시켰다가는 ‘왕’에게 징벌을 당해 처참하게 죽으리란 전설 같은 공포가 전해지는 덕분이었다. 가식이나 위선에 불과할지라도 그녀는 썩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망할 세상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면서 사람이나 죽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긴 여행의 끝에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예상은 했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만 해도 10명 남짓한 사람이 살고 있던 방주는 텅 비어 있었다.
사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난 것도 벌써 수년 전이었다.
스산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풍경에서 고요하다는 감상을 받은 건 고개를 들면 보이는 방주 덕분일 것이다. 방주가 언제나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그녀는 홀로 남은 고독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으며 미치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며 조용히 남은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여정의 마무리를 지을 때가 왔다는 걸 직감했다. 기운이 들어가지 않는 팔다리를 움직이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하늘로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밝은 태양을 보고 싶어.’
이야기 속에서 전해지는 태양은 눈 부실 정도로 환했으나 그녀가 아는 태양은 항상 생기 없는 흐린 하늘로 감추어져 있었다. 태양 빛을 잡기 위해 그녀는 하늘로, 하늘로, 하늘로 솟구쳤다.
얼마나 솟구쳤을까. 서서히 마나가 바닥 나고 호흡이 곤란해지며 온몸에 낯선 압박감이 느껴질 무렵.
‘아아…….’
마침내 그 빛살이, 눈을 따갑게 찌를 정도로 휘황한 밝음이, 온몸을 태울 만큼 격렬한 뜨거움이, 그녀를 맞았다. 세상에는 아직도 그녀를 경이롭게 하는 새로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만족했다.
마지막 한 줌의 마나가 소진되며 육신은 비행하던 것보다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의식이 서서히 어둑한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공포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깊은 잠 속에 잠기는 듯한 평온한 마지막이 그녀를 찾아왔다.
몸이 완전히 지면에 부딪히기 직전, 누군가가 받아 준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지만, 그 착각마저도 온전한 무(無)로 돌아갔다.
최후의 인간이 죽은 뒤에도 수년 동안 별은 명맥을 이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별에 남은 최후의 생명이 마지막 잎사귀를 떨구었다.
“생각해 보면 말이에요.”
현규하는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생존해 있었을 때도 기껏 50년 정도밖에 장담하지 못할 정도였다면서요 상황이 내 예상보다 더 최악이었네.”
“그랬지.”
“근데 내가 뒤를 이어 봤자 160년 170년 아무튼 그 정도밖에 시간을 더 못 번 거 아니에요 영생하는 입장에서 그거는 그냥 하루 이틀 차이 아닌가”
“완전히 달라.”
스토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별의 중심에 종언을 전하는 통로가 생성되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무너졌다. 그렇게 그녀는 200년이 훌쩍 지나서야 현규하와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200년이면 인간을 기준으로 해도 세대가 몇 번이나 바뀔 기간이잖아. 그만큼 긴 시간 동안 이아드는 평화로웠어.”
절망하여 스스로를 포기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비교적 평온하다 일컬을 수 있었다.
200년이 넘도록 단 하나도 거두어지지 않은 방주는 완전히 버림받은 게 아니라는 의지처가 되어 주었다. 거기에 현규하의 존재로 인한 제약은 사람들이 최후까지 윤리와 이성을 온존하게 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 인간들의 본능은 약탈이나 폭력 따위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요.”
“본능대로만 살아간다면 인간이 아니잖니. 무엇보다…….”
스토야가 낮은 한숨을 뱉었다.
“스토얀이 무기력한 채 그대로 있었다면 그나마 남은 사람들의 삶까지 완전히 망가졌을 거야. 그러한 혼란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을 테지.”
“맞아, 맞아.”
솜노로스까지 툭 끼어들었다.
“왕자님이 신계와의 연결을 죄다 차단해 놔서 직접 뜻을 전할 수가 없었지만 신계에서도…….”
“날 이용해 먹은 양반들한테 입발림 소리 들어 봤자 짜증만 나니까 거기까지.”
“입발림 소리 아닌데…….”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린 솜노로스는 다시 기운을 회복했다.
“아무튼 나도 내 동료들도 왕자님 덕분에 마지막까지 우리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요.”
“너도 죽는 건가”
“응. 그치만 고향과 동료들로부터 떨어져서 세계를 방랑하며 영원히 사는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워.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는걸.”
못내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스토야도 현규하에게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어서 고마워, 규하.”
현규하는 그답게 무성의하게 목뒤를 문질렀다.
“어차피 다 같이 망해 가는 판인데 뭘 유난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세계는 시시각각 작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육안으로도 뚜렷하게 별을 침식한 죽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토얀이 불러왔던 흉성보다 훨씬 더 많고 농밀하게 짙은 징조였다.
다만 그때와는 다르게 소름 끼치는 흉흉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겠지만, 이 별을 이루었던 모든 기적은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게 될 거야. 언젠가는 확장되는 세계의 새로운 별이 될지도 모르지.”
종말이되 최후가 아닌 또 다른 시작.
잿더미에서 움트는 새싹과도 같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건 스스로 결심한 현규하의 희생 덕분이었으므로, 그녀는 이후 그의 삶이 지극히 평온하기만을 바랐다.
‘무거운 짐만 떠넘긴 너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 하나뿐이어서 미안해.’
스토야는 이제 보지 못할 조카의 모습을 품으며 명부의 신들에게 받아 온 마지막 힘을 발했다.
종언의 때.
그를 위해 빠르게 가속하던 이아드의 시간은 원래대로 돌아왔고, 동시에 그의 육체에서 멈추었던 시간도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모든 시간의 흐름이 철의 시대와 같아진, 바로 지금이었다.
현규하는 문득 시선을 올렸다.
“아하하.”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머리로 깨닫기에 앞서 그의 심장이, 영혼이 감지한다. 그를 살아 있게 하는 유일한 부름이 닿는다.
시선이 머문 상공은 얇은 막이 내려온 것처럼 불투명하게 흐려졌다. 그 너머에 이아드가 아닌 다른 풍경이 일렁거린다. 점차로 좁아지는 세계에서 그곳만이 오롯하다.
“왕자님! 애인님이랑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해!”
솜노로스는 힘차게 지느러미를 흔들었고.
“…….”
스토야는 말없이 희미한 미소만을 머금었다. 작별 인사는 이만하면 족할 것이다. 그들은 완전한 종말이 아닌 새로운 순환의 흐름으로 섞이게 되었으므로.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현규하는 최후의 여로가 될 한 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인유신이 그를 부르고 있다.
“오, 좋아.”
세탁한 솜 인형을 꾹꾹 경락 마사지하여 형태를 제대로 만든 인유신은 뿌듯해졌다. 처음에는 영상을 보면서도 헤맸는데 이제는 제법 익숙하다.
뺀질뺀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인형에게 화사한 프릴이 달린 보닛과 귀여운 드레스까지 입힌 뒤 선반에 두었다.
지난 2년간 공구로 구매한 인형도 있고, 과거에 팬들이 제작했던 인형도 중고 장터에서 죄다 구했다. 그 덕분에 현규하의 솜 인형컬렉션은 꽤 풍성해졌다. 배송비를 아낀다고 김지연과 같이 산 인형도 있었다.
“…….”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또 할 일이 없어졌다.
일요일 아침부터 일부러 청소도 하고 인형 물품도 정리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손이 멈추니 금세 속이 시끄러워졌다.
‘돌아온 지 2년이 지났는데…….’
연락은 꼬박꼬박 하고 있지만 언제 돌아올지는 아직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캐묻자니 빨리 세계가 망하라고 바라는 것 같고, 시간을 역행하여 되돌아올 테니 현재의 현규하가 정확한 시기를 모른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소파에 털썩 누워 버린 인유신은 오른쪽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2년 전, 이아드에서 돌아온 뒤 귀속 아티팩트를 일부 해방하여 스토야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몹시도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그녀는 사과했다.
『본래라면 태어나지 않았을 크르스니크의 운명을 너에게 씌우게 한 건 나였어.』
세상에 어떤 재난이 일어나도 대비하기는커녕 모든 걸 방기하는 스토얀을 보던 그녀는 불안해졌다. 뒤늦게 자식을 낳고 새로운 왕으로 삼으려는 의도에 혹시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닌지.
설마 그 목적이 육체를 갈취하여 도주하는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여차할 때 스토얀을 제어할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이런 사정을 설명해 봤자 나 때문에 운명이 농락당한 너에게는 변명에 불과할 뿐이겠지. 어떤 말로도 너에게 사죄를 할 수가 없구나.』
〈……사실은요, 예전에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 님에게 규하 씨가 저를 만나서 운명이 변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어요.〉
『그랬니』
〈원래는 사냥꾼밖에 없었는데 저를 만나서 새로운 미래가 열렸다고 들었거든요. 그것도 제가 크르스니크였기 때문인가요〉
『아마도……. 네가 없었다면 규하는 스토얀을 대적하기 몹시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무엇보다 스토얀이 불러냈던 어둠은 네가 아니면 정화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럼 규하 씨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건, 역시 그거겠죠〉
『응. 그 아이는 네가 있어서 왕이 되었으니.』
인유신은 잠시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스토야가 그를 크르스니크로 태어나게 했다. 본래라면 혼자였을 담피르의 운명은 크르스니크로 인해 바뀌었고, 이를 감지한 삼승이 그에게 가호를 부여했으며, 섭리는 그 가호로 인해 그에게 테이밍 능력을 주었다.
스토야가 그를 크르스니크로 태어나게 했기에 인유신은 현규하를 다시 만나 테이밍에 이르렀다.
〈으음…….〉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입속으로 다듬어 보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저는 규하 씨랑 3번 만났었잖아요.〉
옷깃만 스쳐도 삼생의 인연이라는데, 현규하와 자신은 벌써 3번이나 운명을 교차했었다. 이쯤 되면 우연의 만남이 아니라 필연이 아니었을까, 하고 인유신은 조금 어깨를 폈다.
〈3번째로 만났을 때 테이밍을 했거든요. 강제로 규하 씨의 의지를 저에게 묶고 재단하게 되었던 건 지금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
〈하지만 그 결과로 지금의 저와 규하 씨가 있는 거니까요.〉
더 이상 테이밍을 후회하지 않는 인유신은 이 역시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다.
〈저를 크르스니크로 태어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유신.』
〈그리고 삼신할머니가 깨어나신다면 테이밍 능력을 각성할 계기를 주셔서 고맙다고 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응……. 응, 꼭 전할게.』
스토야는 힘겹게 울음을 삼키는 듯한 의념을 전하며 낮게 신음했다.
『너와 대화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야. 이아드가 멸망할 때 너에게 알려 줄 약간의 힘만 남겨 둘게.』
〈규하 씨를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되나요 준비물이 파계라는 건 알겠는데…….〉
『칼리칸트자로스가 예전에 파계를 쓰려던 걸 막았다면서』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그때 왜 그랬었대요〉
『규하가 이아드에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이후에 더 중요한 용처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던 모양이야. 나머지는…….』
2년 전에 들었던 스토야의 설명을 복기하며 인유신은 ‘후긴의 눈’의 좌표를 띄웠다. 현규하의 움직임은 여전히 재빨랐다.
‘무닌의 눈’과 ‘후긴의 눈’.
동일한 세계에서 발견된 세트 아티팩트. 현규하가 찾았으며, 또 그 이전에는 현소라가 찾았던 아티팩트.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비로소 완전해진 하나.
어느새 가슴팍에 올라온 8세의 털을 브러시로 빗질하며 좌표를 응시했다.
‘오늘 연락할 때 어디 갔다 왔냐고 물어봐야지.’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데도 일주일마다 얘기할 게 산더미처럼 쌓였다. 요즘 방주를 생성하느라 세계 곳곳을 다니고 있는 현규하의 이야깃거리도 풍성했다.
그와의 연락을 생각하니 다시 기운이 났다.
“8세야. 저녁 뭐 먹을래”
“뵤.”
8세가 길게 뻗은 꼬리로 휴대폰 갤러리의 사진을 넘기더니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떡볶이”
“꾸잉!”
8세와 나란히 앉아 TV를 보며 저녁 식사로 떡볶이를 만들어서 먹은 후였다. 한쪽에 계속 띄워 두고 있던 좌표에 변화가 생겼다. 눈이 빙글빙글 돌 만큼 빠르던 현규하의 움직임이 멎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걸어가는 것처럼 느린 속도가 되었다.
불현듯 인유신은 오른쪽 귓불의 아티팩트 문양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처음 겪는 증상임에도 직감했다. 알겠다. 알 수밖에 없었다. 현규하를 불러야 한다.
입술이 가늘게 여닫혔다. 그리고 한 번, 다시 한번. 입술 사이에서 음성이 아니라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신음이 흐른다. 안 돼. 이래서는 듣지 못할 거야. 벌써 울면 안 돼, 인유신. 확실하게, 선명하게, 그에게 닿을 수 있게끔.
그를 그리며 맥동하는 나의 심장 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파계.”
그토록 바랐던 간절한 한마디는 울음에 뭉개져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닿았다. 반지 안의 정수가 깨졌다.
[개량된 파계를 사용합니다.]
[철의 시대와 ®ÀÇ의 좌표를 특정하지 못합니다.]
[‘무닌의 눈’과 ‘후긴의 눈’이 좌표를 탐색합니다.]
[철의 시대와 이아드의 좌표가 특정되었습니다.]
희뿌옇게 흐린 시야를 연거푸 문질렀다. 문지르고 문질렀는데도 여전히 흐리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어렴풋하게 비치는 인영의 윤곽. 변함없는 라이딩 재킷. 옅은 색조의 머리칼. 짓궂게 가늘어지면서도 열망을 담고 있던 눈동자. 창피해지는 말 사이로 달콤하게 자신을 부르던 입술. 자신의 손을 넉넉히 감싸는 긴 손가락.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다정하게 안아 주던 품.
모든 게 익숙하다. 모든 것이 그였다.
나의 그리움. 나의 미래. 나의 그리움. 나의 사람. 나의 모든 것.
인유신은 그에게 달려갔다.
끝.
############################################공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