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12/214)
  • 언제 흉성들이 열렸냐는 듯 고즈넉한 밤하늘이었다. 인유신이 사라진 자리만을 묵묵히 응시하는 현규하의 주변을 솜노로스가 시무룩하게 맴돌았다.

    “급하게 가느라 계약자랑 인사도 제대로 못 했어.”

    현규하가 그제야 솜노로스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놈이든 너든 알아서 잘 살 텐데 굳이 질척거리는 인사를 할 필요가”

    “왕자님은 애인님이랑 울고불고했으면서 나한테만 맨날 뭐라 그래…….”

    “안 울었어.”

    “마음으로는 울었잖아.”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 현규하의 눈치를 솜노로스가 다시 슬쩍 살폈다.

    “가끔 왕자님이랑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데 나랑 계약하면 안 돼”

    “귀찮아.”

    “그래두……. 계약자를 아는 사람은 여기에서 왕자님뿐인데…….”

    현규하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계약 같은 거 없어도 잘만 싸돌아다니던 놈이 뭐라는 거야.”

    “그치만 계약자도 아닌데 현세에서 찾으려면 힘들단 말이야. 인간들은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걸.”

    “알아서 찾아와.”

    대답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솜노로스는 눈만 끔뻑거리다가 뒤늦게야 힘차게 말했다.

    “응!”

    “아무튼 넌 너무 커서 정신 사나우니까 빨리 사라져.”

    “나중에 봐!”

    기운을 조금 얻은 솜노로스는 꼬리지느러미를 실룩거리며 사라졌다. 지금까지 참견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소년이 현규하에게 성큼 걸어왔다.

    “새로운 왕에게 감사 인사를 해도 될까”

    “뭔 개소리예요.”

    현규하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이번 일로 감사 인사 따위를 받는 상상만 해도 속이 역했다. 현규하는 자신의 행동이 지극히 사적인 연유에서 기인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덧없이 저물어 가는 세계와 사람들에 대한 연민. 아버지가 저지른 문제들을 수습해야 한다는 책임감. ……그딴 것들이었다면 당장 전부 훌훌 벗어던지고 인유신과 함께 이 빌어먹을 세계를 홀가분하게 떠나 전부 잊었겠지.

    “알았어. 그 심정은 내가 스토야 님에게도 전할게.”

    “아, 그 전에 부탁할 게 있는데요.”

    “뭐니”

    “나중에 유신 씨가 고모를 찾을 테니까 고모한테 말을 좀 전해 줘요.”

    생명이 번창하는 지상과 안식을 취하는 지하를 나누는 경계는 절대적이다. 이는 신들도 특별한 이유나 매개체 없이는 쉬이 넘지 못하는 경계였다. 명부의 주인이 지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처럼, 지상을 관장하는 신도 땅 밑으로 하강할 수 없다.

    스토얀과 스토야, 그리고 이제 현규하와 스토야의 관계도 매한가지였다. 이아드에 오게 되었을 때처럼 스토야가 길을 인도해도 현규하는 지하를 방문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부탁한 말을 소년은 주의 깊게 기억했다.

    “한데 네 짝이 스토야 님에게 연락할 방법이 있니 그 애의 세계에는 부탁을 드릴 신도 없을 텐데.”

    “한 번은 가능할 거예요. 그렇게 느껴지네요.”

    별의 끝에서 끝까지 트인 감각은 아주 많은 정보를 그에게 전해 주었다. 그것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가다듬는 과정도 꽤나 심력을 소모할 터였다.

    “으음, 알았어. 전부 확실하게 전할게.”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할까 말까 하던 소년은 그냥 고개만 숙이고 지하로 퇴거했다.

    【이야기는 다 끝났나】

    마치 구삼승의 존재를 잊고 있던 것처럼 현규하가 과장되게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직도 안 가고 남아 있었어요”

    【남은 용건이 있는 듯하니 말이다.】

    “묻고 싶은 건 있는데…….”

    현규하는 잠시 말을 골랐으나 이내 그답게 직구로 던졌다.

    “그거, 거짓말이죠”

    【무어가】

    “시간을 역행한다는 거요. 이전이었다면 나도 납득했겠지만 지금은 구라 같다는 걸 직감했거든요.”

    【…….】

    침묵하던 구삼승이 손희애의 육체를 빌어 한숨을 쉬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시간은 불가역적이니 이를 역행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 철의 시대와 이아드의 시간축을 다르게 흘러가게 할 수는 있으니 약정한 2년에서 크게 어긋나지는 않으리라.】

    “몇 배속으로 돌리려고요”

    【……백 배는 넘을 것이다.】

    “최소 200년 뒤에 망한다는 뜻이네.”

    구삼승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화제를 전환했다.

    【너는 인간의 영육을 지닌 채로 왕이 되었고 이아드에 남은 역사는 그리 길지 않으니 그동안 너의 시간을 멈추겠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일을 했네요.”

    【모든 흉성을 닫고, 이아드의 시간축을 바꾸고, 너의 시간을 멈추기 위해 어느 신들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는지 알고 싶지 않은가】

    “내가 알아서 뭐 하게요.”

    현규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자면 싫다는 사람을 산 제물로 받아 놓고 냉큼 왕으로 세운 신들의 잘못이잖아요. 싸지른 거 수습은 본인, 아니 본신들인가 아무튼 댁들이 알아서 해야죠.”

    【…….】

    “아무 상관도 없는 내가 심장을 떼어 내는 심정으로 유신 씨와 헤어져서 여기 남았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애초에 이아드에 또 다른 유신 씨가 있다는 걸 알려 준 게 둠네제울이죠”

    나비는 둠네제울의 전신이니 곧 그의 상징이었다.

    【그동안 스토얀을 내버려 두었던 둠네제울을 비롯한 신들이 금번에 개입한 건 그를 강제로 세계의 왕으로 세웠다는 죄책감이라 할 수도 있을 터다.】

    “죄책감이고 나발이고 날 붙잡겠다며 그딴 음험한 수작을 쓴 거 정말 짜증 나는데……. 그래도 이아드의 유신 씨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건 알게 되었으니 대충 퉁치겠습니다.”

    【그를 만나려 하는가 필요하다면 그의 수명 정도는 알려 주마.】

    “아뇨, 다른 사람이잖아요. 나는 조신하게 200년 살 겁니다만”

    【알겠다.】

    구삼승이 돌아가려는 듯한 기색을 보였으므로 현규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별로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쪽은 딱히 이아드에 관심도 죄책감도 없는 거 같던데 왜 이렇게 열심이에요”

    【삼승이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애착을 가진 세계의 마지막은 삼승이 보내 주어야 하지 않겠나.】

    이 말을 마지막으로 구삼승은 사라졌다.

    장시간 공수를 받고 있던 손희애가 기력 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현규하는 음, 하다가 어쨌든 그녀가 고생한 건 사실이었으므로 아공간에서 물병을 하나 꺼내어 주었다.

    “휴우, 진짜 지치는구먼. 고맙…….”

    공수가 내렸을 때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손희애는 현규하와 시선이 마주치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지 얼추 직감한 듯한 표정에 현규하는 그냥 어깨만 으쓱하고는 기절한 사람들이나 깨우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의 모든 시간과 모든 걸음은 인유신을 향한다. 숨을 쉴 때마다 발걸음을 이을 때마다 그리움이 아로새겨진다. 아주, 아주 긴 여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이 반드시 인유신에게 닿을 것임을 알기에, 현규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에필로그

    - 야 이게 말이나 됨ㅋㅋㅋㅋㅋ

    어느 회사가 입사한지 몇달되지도 않은 신입이 반년 휴직계 낸거 받아주고 거기다가 안식년으로 1년을 통으로 쉬더니 1년을 또 안식년 추가하는걸 받아줌ㅋㅋㅋㅋ신입이 나 짜르라고 드러누운거 회사가 눈치없이 붙잡고 있는거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좆소도 이러지는 않겠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울지말고 천천히 얘기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소처럼 일하던 시절에는 본업 좀 그만했으면 싶었는데 차라리 본업이라도 하는게 그리워질줄은...

    └아니 근데 존나 답답해서 공무 헌터 규정 같은 거 좀 알아봣거든 안식년 연이어서 쓰는거 원래 안된다는데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

    └└그것이 현규하니까.

    └└내가 이능부 장관이라도 뀨 잡으려면 안식년 10년쓴다고 해도 ㄱㅊ

    └└└시발 말이 씨가 된다고 했다

    └얘 진짜 어디서 뭐하냐ㅠㅠㅠ소식이라도 알려줬으면ㅠㅠㅠㅠㅠ

    └규하도 없고 조용하니까 과거가 미화되가지고 박터지게 싸우던 것도 그리움.. 요새 화력 넘 죽었어ㅠㅠㅠㅠ남친님 모른 척할 테니까 규하 소식 좀 슬쩍 알려주세요 인멘인멘...

    └└재결합하고 얼굴 폈다면서 콩팬덤 기살아서 개나대는거 졸라 꼴배기싫음ㅅㅂ... 우리 애가 요새 안 보여서 그렇지 수정란 시절부터 빛이 났거든 헌터가 본업을 잘해야지 얼굴만 피면 뭐하냐고. 얼굴로 마수 잡음

    └└└그래봣자 콩은 콩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콩 주제에 어딜 비벼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얼굴도 규하가 압살ㅇㅇㅇㅇㅇ

    └└글킨 한데 그래도 이능부 들어가기 전보다는 지금이 복작복작하지 않나

    점심시간에 ‘ㅇㅇ유입도 많아졌고 연애질하면서 뿌려 놓은게 많아서 아직까지 먹고 살만함’이라는 댓글을 게시판에 갈기고 있던 김지연은 무심코 옆을 돌아보았다. 맞은편에서 웬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 햄 삼촌!

    화상 전화를 받은 인유신이 반갑게 인사했다.

    “안나야 엄마 폰으로 전화했어”

    - 웅! 있잖아, 8세가 케이크도 먹어

    “8세는 폭탄 말고는 다 먹어. 저번에 조각 케이크 주니까 잘 먹더라.”

    폭탄 말고는 다 먹는다는 말이 재미있었는지 민안나가 까르륵 웃었다. 아이의 밝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인유신은 ‘폭탄도 뇌관을 빼면 먹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

    휴대폰 화면에는 정원 같은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어쩌면 야외 식당을 통째로 빌렸을지도 모르겠고. 가족이 모여서 점심 식사를 하는 중인 모양이다.

    곧 민끝녀의 민망해하는 얼굴이 화면에 보였다.

    - 미안해요, 유신 씨. 오늘 근무 날이에요 밥 먹는데 방해한 건 아니죠 애가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가져갔네.

    “어, 아니에요. 저도 밥 먹고 휴게실에서 쉬던 참이거든요. 부회장님도 식사하던 중이세요”

    - 간만에 점심 먹으러 같이 모였어요. 오늘이 공 씨 생일이거든요.

    아, 맞다. 저번에 다른 얘기를 하다가 이혜연에게 지나가는 말로 언뜻 들었던 기억이 났다. 방금까지 까먹고 있긴 했지만.

    “생일 축하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올해 길드장님이 40살 되셨죠”

    - 39살이다!

    저쪽에서 신경질적인 반응이 들려왔다.

    “40살이나 39살이나 똑같은 거 아니에요”

    - ……너, 15년 뒤에 보자.

    “그때가 되면 길드장님 나이는 5…….”

    민안나의 목소리가 인유신의 말을 끊으며 냉큼 끼어들었다. 아빠 편을 들겠다는 기특한 의도는 아니었다.

    - 아빠, 케이크 그만 먹어! 8세 줘야 해!

    급기야 햄스터에게도 밀려 버린 공태성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는 게 화면 귀퉁이로 보였다. 민끝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어디 내놓아도 부끄러운 남편이라서 민망하네요.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요.

    “넵, 식사 맛있게 하세요.”

    전화를 끊고 기지개를 켜다가 김지연과 눈이 마주쳤다. 인유신은 머쓱하게 웃었다.

    “소리가 좀 컸죠”

    “아뇨, 아뇨. 통화하시는 거 몇 번 봤지만 양사 부회장님을 TV가 아니라 휴대폰에서 만나는 게 조금 신기해서요. 아, 이런 말은 좀 실례인가…….”

    “사실 저도 부회장님이랑 폰 번호 주고받았을 때 실감이 잘 안 났어요.”

    커피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다 보니 슬슬 점심시간도 끝이 났다.

    김지연은 오늘도 ‘현 헌터님은 잘 지내세요’라는 질문을 꾹 참은 자신을 내심 칭찬했다.

    “8세야, 나 왔어. 좀 늦었지 승기랑 만나서 저녁까지 먹고 오는 바람에.”

    “피웃!”

    TV 앞에 있던 8세가 문 열리는 소리에 쪼르르 달려 나왔다. 인유신은 보송보송한 솜털을 매만지며 빙긋 웃었다.

    넓은 오피스텔에 기척이라고는 8세뿐이다. 혼자 지내면 외로울 테니 출근할 때나 외출할 때 늘 데리고 갔었지만 어느새 8세는 TV에 재미를 붙였다.

    오늘도 TV를 보겠다면서 집에 남았다. TV를 보기 위한 전용 협탁에 인형용 방석까지 사 주었다. 불알을 깔고 앉는 것도 귀엽지만 그래도 방석이 더 편하지 않을까

    한편으론, OTT에서 외국 드라마나 영화를 재생한 목록을 보고는 8세가 자기 몰래 한글을 뗀 건 아닌지 의심 중이었다.

    어쨌든 귀가할 때마다 TV 소리나 기척이 들리는 건 좋았다. 현규하의 오피스텔로 옮긴 지 2년이 되었는데도 그가 보이지 않는 넓은 집이 때때로 낯설다.

    〈만약 현 헌터님과 연락이 장기간 안 되면 인유신 씨를 찾아가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이아드에서 돌아온 지 1주일이 지났을 때, 유 변호사가 그를 찾아왔다.

    폐인처럼 집 안에 처박혀 있던 인유신에게 유 변호사는 현규하가 의뢰했다며 그의 재산 일체를 양도받을 방법을 알려 주었다. 짤막한 내용이 적힌 카드와 함께.

    유신 씨가 이걸 읽고 있다는 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 때문에 당신만 먼저 돌려보냈다는 뜻이겠죠

    어떤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해결 못 하다니 무능하고 쓸모없는 새끼라고 욕해도 됩니다. 내가 생각해도 난 귀엽기만 할 뿐 무쓸모한 새끼네요.

    무슨 방법을 쓰든 돌아갈 테니까 만나면 싸대기부터 갈겨 버리세요.

    그가 남긴 흔적을 보니 다시 눈물샘이 약해지기도 했고 그다운 메시지여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유 변호사가 돌아간 뒤 인유신은 며칠 만에 제대로 밥을 챙겨 먹고 햇볕을 쬐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통장을 확인한 인유신은 그냥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기로 했다. 기억했다가는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재산이었다.

    통장에서는 옥탑방 생활을 정리하고 그의 오피스텔로 이사할 비용만 썼다. 거기에다가 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한 준비 자금 약간.

    이제 인유신은 이능부의 계약직이 아니라 정식으로 채용된 9급 공무원이다.

    ‘솔직히 면접 때는 다른 응시자들에 비해 이득이 있었을 거 같긴 한데…….’

    블라인드 면접이긴 했지만 면접관들이 얼굴만 봐도 인유신이라는 걸 다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시험공부에 이어 면접 준비까지 열심히 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어깨를 쭉 폈다. 현규하 덕택에 쉽게 옮기게 된 사무실에 당당히 제 노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아, 벌써 9시 10분 전이네.”

    언제나 맞춰 놓고 있는 휴대폰의 알람이 울렸다.

    현규하에게 연락할 시간이었다.

    “뵤오오…….”

    야식으로 치킨을 야금야금 갉아먹던 8세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인유신도 머쓱해졌다.

    “나도 그게 웃긴 모습이라는 거 알아.”

    “꾸웅!”

    화들짝한 8세가 그렇지 않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저으며 그 웃긴 모습도 멋지다는 제 뜻을 열심히 피력했다.

    “아무튼 저쪽 방에서 할 테니까 드라마 계속 보고 있어.”

    집도 넓고 방도 여러 개니 민망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아도 되는 것도 좋다.

    작은 방으로 들어간 인유신은 벽면에 붙여 놓은 커다란 종이를 보며 요가 매트에 발을 내디뎠다. 넓은 걸음으로 한 번, 짧은 걸음으로 한 번.

    모스 부호였다.

    현규하와 연락할 방법을 떠올린 건 돌아온 뒤 한 달 하고도 열흘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때의 인유신은 햄스터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왼쪽 손목의 문신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게 일과였다.

    돌아온 지 사흘 정도 되었을 때 테이밍이 끊어지며 6세가 죽었다는 걸 직감했다. 별문제가 없는 상태창만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는데 주인 없이 겨우 사흘밖에 살지 못한 것이다.

    인유신은 더욱 우울해졌고, 몹시 미안해졌다. 6세의 죽음 또한 폐인처럼 지내던 일주일에 영향을 끼쳤다.

    이제 현규하의 상태창으로 그가 무사한지 확인도 할 수 없게 된 인유신은 ‘후긴의 눈’으로 보이는 현규하의 위치만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무닌의 눈’과 ‘후긴의 눈’이 상호 작용되어 있습니다. 세트 효과가 나타납니다.]

    이제야 알게 된 세트 효과는 서로의 세계가 달라도 연결이 끊어지지 않고 추적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현규하는 몹시 바쁜 것 같았다. 예의 이동 게이트라도 쓰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저기 휙휙 움직였다. 거처는 스토얀이 살던 인왕산의 한옥으로 옮긴 듯했다.

    한 번 움직이면 정신없을 만큼 빠르게 쏘다니는 현규하였으나 대부분의 시간을 한자리에서 가만히 보냈다. 내내 인왕산에 머물러 있는 그의 좌표를 보고는 무심결에 손가락의 햄스터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했다. 그는 뭘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보고 싶다.

    그렇게 한 달이 넘는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도 규하 씨도 서로 좌표를 볼 수 있잖아 그럼 왔다 갔다 하는 걸 연결하면 문자를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무닌의 눈’과 ‘후긴의 눈’의 좌표는 1미터 이하의 짧은 이동도 꽤 세밀하게 표현한다. 그 덕분에 우리아쉬와의 전투 중에 SOS 표시도 할 수 있지 않았던가.

    갑자기 쿵쾅거리기 시작한 제 심장 소리를 들으며 인유신은 방 안에서 움직여 보았다.

    [규하]

    쌍시옷은 표현하기 어려울 거 같아서 왔다 갔다 하며 이름만 흉내 내 보았다. 잘 보였을까. 지금 좌표를 확인하고 있다면 좋을 텐데.

    반응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현규하의 좌표는 여전히 인왕산에 머물러 있는 채였다. 인유신은 조금 더 확실하게 움직이기 위해 바닥에 테이프로 ‘규하’라고 붙인 뒤 그 위를 걸었다.

    그렇게 세 번 반복했을 때 현규하의 좌표에 변화가 있었다.

    [♡]

    인유신의 걸음과는 달리 빠른 움직임이어서 금방 알아보긴 힘들었으나 분명히 자신에게 보내는 답이었다. 심장이 늑골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박동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

    우왕좌왕하던 인유신은 겨우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잘]

    [♡]

    [건강]

    [♡♡♡]

    ……뭔가 말이 안 이어진다. 연락할 때마다 테이프로 글자를 붙여야 하는지 고민하는데 현규하가 다시 움직였다.

    [모스]

    ‘……!’

    인유신은 마음속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급히 모스 부호를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다시 움직였다.

    [건강]

    [유신 씨가 보고 싶어서 마음이 아프네요]

    [저도ㅠ]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죠]

    [ㅇㅇㅠㅠ]

    현규하의 오피스텔로 옮기고도 얼마간 무기력하게 지내던 인유신은 내일부터 삼시 세끼 꼬박꼬박 먹자고 다짐했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묻고 싶은 말도 많은데 모스 부호가 의외로 어려웠다. 이상하게 끊어진 단답으로만 보내고 있는 게 답답했다. 내일 당장 모스 부호를 큰 종이에 인쇄해서 벽에 붙여야겠다.

    휴대폰으로 일일이 확인하면서 움직이고, 또 현규하의 모스 부호도 해석하느라 아주 더뎠지만 대화는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조급하게 쿵쾅거리던 심장의 울림도 기쁨과 설렘이 되었다.

    [누나도 잘 지내요]

    6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도 아파서 편안히 갔는지 묻지도 못하던 인유신은 놀랐다.

    [안 죽]

    [지금도 내 옆에 있어요]

    [ㅠㅠ]

    다리에 힘까지 풀려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서로 다른 세계이다 보니 테이밍의 연결이 불안정했던 모양이다. ‘무닌의 눈’과 ‘후긴의 눈’만큼은 제대로 이어지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확인을 못 할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는 날짜 정해서 연락해요]

    []

    [일요일 오후 9시부터 1시간 동안 어때요]

    [ㅇㅇㅠㅠㅠㅠ]

    어느새 하늘의 저편이 희붐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어지러운지도 모르고 방 안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하던 인유신은 그제야 현기증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졌다.

    〈미이…….〉

    주인이 대체 오밤중에 밤새 뭘 하는 건지 불안하게 문틈으로 훔쳐보던 8세가 쭈뼛쭈뼛 들어오더니 그의 이마에 발라당 엎드렸다. 어지러운 머리에 따끈따끈한 온기가 느껴지니 한결 나았다.

    〈8세야. 규하 씨랑 연락이 돼!〉

    〈뀹! 뀨뀨!〉

    〈그래! 뀨뀨 씨랑!〉

    〈찍! 미요옷! 뀨우우우우우!〉

    속이 울렁거렸고 무릎도 아팠지만 실없는 웃음이 절로 실실 새어 나왔다. 내일부터 정말,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렇게 시작된 일요일 밤의 연락은 2년째 이어지고 있다. 좀 빨라서 확인하기 힘들었던 현규하의 움직임도 인유신과 비슷해졌다.

    인유신은 이제 이력서의 특기란에 모스 부호라고 당당하게 썼다. 면접 볼 때 이 특기가 먼 곳에 있는 애인과 연락할 때 유용하다는 대답을 한 것도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유신은 현규하가 방주를 설치했다는 것, 다른 사람들도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 그럭저럭 평화롭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몇 달이 더 지났을 때는 6세가 해바라기씨 별로 떠났다는 소식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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