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화 (208/214)

침식 게이트와는 다른 질감을 지닌 완전한 어둠이다. 길라잡이가 되어 주었던 크르스니크의 빛마저 삼켜졌다.

‘젠장.’

현규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멸망하는 세상을 맞은 사람들의 처참한 심념과 절규가 영혼을 파고들었다. 절망. 원망. 비통. 증오. 통곡. 공포. 비명.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지 못할 최후의 조각들.

예전이었다면 환상 속에 펼쳐지는 멸망의 추체험 따위 무시했을 것이다. 실제로 인유신을 만나기 전의 현규하는 자신의 세상이 멸망한다 하여도 평소처럼 무의하게 살다가, 무의하게 죽었을 것이기에.

하지만 현규하는 멸망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의 존재를 인식했다. 죽어 가는 이들의 절망이, 언젠가 ‘그’의 것이 되는가.

그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견고했던 마음의 장벽에 금이 갔다. 틈을 놓치지 않은 칼키의 칼날이 복부를 꿰뚫었다.

“윽!”

간신히 피하긴 했으나 허리에 깊은 검상이 남았다.

멸망의 환상과 어둠에 잠식된 감각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끝없이 추락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한히 부유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팔이 하체에 달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리가 상체에서 흔들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멸망 속에 죽어 가는 이들의 절규가 뇌를 후벼 파는 가운데 현규하는 본능만으로 롱기누스의 창을 움직였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감각을 허벅지로 느낀다. 아니, 원래는 혀로 느껴야 하는 거였나

부딪치는 소리는 어떻게 된 거지 눈으로 맡아야 하는 거였나 쇄도하는 공격의 흐름을 감지하는 것은 발이었고, 빌어먹을, 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울부짖는 소리만이 뇌를 쥐어뜯었다.

멸망. 멸망. 멸망. ‘그’를 그 속에 내버려 둔 채, 모른 척하면 이 소리가 사라지나.

사이코키네시스를 운용한 역장을 제 몸에 두르려던 현규하는 오히려 코를 헛디뎌 위쪽으로 넘어졌다. 내려치는 칼날을 굴러서 피하려 했는데 벌떡 일어나게 되었다. 어깨에 칼날이 푹 박혔다. 감각만이 아니라 육신의 기능까지 엉망진창이다.

“고라으놓여붙에치위래원도라리다팔발씨니아”

음성을 발화하는 게 성대가 아니라 족척근인 듯한 느낌이었다. 유일하게 또렷한 감각은 뇌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비명과 증오. 현규하는 그 비명만을 거듭 곱씹었다.

이 비명을 잊어야 하나. 그렇게 해야만 하나.

까앙!

“……아.”

무기가 부딪치는 쇳소리가 귀로 들린다. 찌르르한 진동이 손바닥으로 전해진다. 청기사가 탄 청황마가 시야에 보인다.

크르스니크의 빛이 그를 다시 비추었다.

태양 빛이 어둠에 닿은 뒤에야 비로소 어렴풋하게나마 현규하의 등이 보였다. 종말의 징조들과 대적하는 그의 몸 곳곳에 피가 비치고 있었다.

인유신은 하늘에 띄운 하지점 태양의 조각을 올려다보았다. 마나가 소모되는 속도는 확실히 아까보다 빨라졌다. 그러나 그만큼 장점이 있었다. 태양의 조각은 그가 자리를 비워도 어느 정도는 유지될 것이다.

“크르스니크가 하얀 짐승으로 변할 수 있지 않아요”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크르스니크도 구현하지 못했던 백광을 아연한 기색으로 올려다보고 있던 소년이 겨우 시선을 돌렸다.

“물론 가능하지.”

“방법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것만은 기억을 찾아봤는데 안 보여서요.”

“…….”

소년이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크르스니크의 이름을 이은 이들이 그 방법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게끔 신에게 부탁한 건 바로 그였다.

“왕의 아들을 직접 돕고 싶은 거지 마음은 알겠지만 썩 좋은 선택은 아니야.”

“어째서요 제가 싸움을 한 적이 없어서 그런가요”

“그렇기도 하지만……. 신의 지음을 받은 성수라 할지라도 그건 엄연히 짐승이야. 인간으로서의 선을 넘는 거지.”

“…….”

“한번 짐승으로 변하면 돌이킬 수 없게 돼. 내내 짐승으로 변해 있는 건 아니지만 차츰 인간으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져. 나도 죽을 때는 짐승으로서 죽었고.”

쉽게 가기 힘든 길이다. 그 때문에 하얀 짐승으로 변하면서까지 뱀파이어를 사냥한 크르스니크들은 원한이 골수까지 치밀어 더 이상 미래가 없는 이들이었다.

스토야에게 듣기로 인유신은 스토얀과 직접적인 은원이 전혀 없다. 스스로 짐승이 되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만약 하얀 짐승이 되면 인간으로서 이지를 상실한다거나 옆에 있는 사람도 못 알아보는 일 같은 게 생기나요”

“그 정도는 아니야. 이성이 없다면 뱀파이어를 사냥하지도 못할 테니까.”

“에이, 그러면 별로 큰일도 아니잖아요.”

인유신은 하얀 짐승으로 변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와 같은 어조로 거듭 대답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니”

무심코 반문한 소년은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한 인유신의 반응에 상당히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하얀 짐승이 되는 길을 택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고 그 이후의 크르스니크들도.

무거운 탄식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그때의 나는 돌아갈 길도, 돌아갈 방법도, 돌아갈 곳도 없었기 때문이었어. 수단을 택할 여유가 없었지. 넌 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

“…….”

“나는 짐승으로 죽은 걸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내 길을 뒤따라 걷게 된 아이들까지 짐승이 되는 건 상당히 괴로웠어.”

인유신도 소년의 뜻을 이해했다. 아무리 인간의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인간의 이성이 있기에 짐승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건 더욱 고통일 터였다.

하나 미래에 겪을 그 고통이 현재에서 눈을 돌릴 이유는 되지 못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건.”

“…….”

“훗날을 걱정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한다면 저는 더 힘들 거 같아요.”

현규하에게 보호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에게 조력할 수 있고, 그를 지켜 줄 수 있는 이 시간을 헛되이 버린다면 자신은 평생 후회할 것이다.

인유신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한 소년은 더 반대하지 않았다.

“……알았어. 방법을 알려 줄…….”

“뀨우!”

파우치에서 불쑥 올라온 소리가 말을 끊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무심코 아래로 쏠리자, 8세가 포로로 기어 나와 인유신의 오른쪽 손바닥으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마치 저를 보라는 듯이 소년의 눈앞에서 깡충거렸다.

소년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까는 언뜻 봐서 잘 몰랐는데 네 사역마, 혹시 칼리칸트자로스야”

“뺩!”

“칼리칸트자로스라면……. 그, 그래. 잠깐이라면 널 대신해 하얀 짐승으로 변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응, 가능할 거야.”

“예”

“칼리칸트자로스는 여러 동물의 형상이 뒤섞인 형태라서 어느 정도 상통하는 데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네 사역마니까.”

인유신이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자 8세가 짧은 앞발로 제 가슴을 통통 쳤다. 걱정하지 말고 믿고 맡기라는 듯한 태도에 인유신은 당혹스러웠다. 싸우는 현장에 있기만 해도 기절하는 심약한 녀석인데. 그런 공포도 무릅쓸 만큼의 사람일까, 내가.

“진짜 괜찮겠어 안 무서워”

“뿌우우.”

그의 당혹감을 아는 것처럼 8세는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따스하게 스미는 보드라운 감촉과 작은 온기에 눈시울이 따끔거렸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원래 짐승이었으니까 부작용도 없을 거야.”

소년이 인유신의 왼손을 붙잡아 8세의 작은 몸을 감싸게 했다. 그리고 그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마법진을 그리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술식의 올바른 방향으로 마나를 흘려보내.”

소년의 인도에 따라 인유신의 손등에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서서히 8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겹친 손 사이에서 환한 빛살이 터졌다. 묵직해진다고 느낀 순간, 손바닥에 있던 무언가가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와아…….”

거기에는 이미 자그마한 햄스터가 아닌 순백의 털을 지닌 하얀 짐승이 있었다.

늑대와 비슷한 크기의 하얀 짐승은, 검은 짐승과는 대조적으로 현존하는 동물들의 형상이 뒤섞여 있었다. 그것이 기괴하지 않고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찌익.”

그렇게 섞인 탓인지 울음소리는 여전히 햄스터와 같아서,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어 버렸다.

“규하 씨를 잘 부탁해.”

“미양!”

고개를 끄덕인 8세가 힘차게 어둠의 저편으로 달려갔다. 순백으로 빛나는 털에 크르스니크의 빛을 담고.

‘어’

죽음의 청기사의 심장을 꿰뚫은 직후였다. 이어 아지다하카의 위로 몸을 띄워 세 개의 머리 중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에 롱기누스의 창을 박아 넣으려던 현규하는 불현듯 이상을 느꼈다. 종말의 징조들이 갑자기 약화되었다. 마치 크르스니크의 빛 안으로 들어왔을 때처럼.

시야의 귀퉁이에서도 하얀 광채가 점차로 번져 왔다.

설마 인유신이 하얀 짐승으로 변한 건가. 짐승으로 변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던 현규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급히 얼굴을 돌리니 크르스니크의 빛을 뿌리는 하얀 짐승이 보였다.

“뀽!”

“……팔놈인가”

“찍!”

인유신의 귀여움을 받을 때처럼 으쓱거리는 게 햄스터 시절과 똑같았다. 자기에게 다 맡기라는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이 된 8세가 저주를 담아 울고 있는 개구리에게 용맹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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