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7/214)
  • “……!”

    발밑에서 느껴지는 이유 모를 한기에 현규하는 급히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지면에 맺혀 있던 흉성 하나가 급격히 체적을 넓히며 바닥을 휩쓸었다. 검게 소용돌이치는 흉성의 입구로 널브러져 있던 뿅망치 하나가 휩쓸려서 사라졌다.

    ‘……아니, 빨려 들어간 거군.’

    저 너머가 도대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 거지 현규하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 표정을 굳혔다.

    “발목 하나 정도는 자르려고 했는데 빠르구나.”

    “망치가 어떻게 된 거죠”

    “글쎄. 어딘가로 갔겠지.”

    그 말의 의미를 되묻기도 전에 질척한 질감의 어둠 속에서 현규하의 상체만큼이나 큰 티에홀트소디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진짜 티에홀트소디만큼 거체는 아니지만, 사람 하나를 먹어 치우는 건 어렵지 않을 크기다. 크르스니크의 빛에 약화된 상태도 아니다.

    현규하는 주둥이에 삼켜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사이코키네시스로 붙잡은 티에홀트소디의 몸통을 그대로 스토얀에게 투척했다.

    “읏……!”

    스토얀은 방어 마법진을 구성하는 대신 안개로 몸을 변화하여 피했다.

    이어서 둘. 저 정도의 무게는 방어하지 못하는 거군. 현규하는 정보 하나를 더 새기며 아공간에서 꺼낸 다른 걸 다시 내던졌다.

    뾱!

    “…….”

    “아까 망치, 어지간히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인데 아직 많아요. 유신 씨랑 데이트할 때 쓰려고 주문했었거든요.”

    뾱! 뾱!

    “…….”

    현규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스토얀을 살펴보았다. 그는 이제 짜증을 숨기지도 않으며 망치를 찢어발겼다.

    세 번째 정보. 스토얀은 확실히 전투에서 도발에 쉽게 걸려든다. 9살 이후 숱한 던전을 드나들며 마수를 사냥했던 그와는 다르다. 스토얀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직접 생사가 오가는 전투를 과연 몇 번이나 했겠는가.

    까다로운 상대라는 건 명백하나, 틈은 얼마든지 있다.

    현규하는 제 뒤에서 몸을 드러낸 불의 거인을 사이코키네시스의 중압으로 으스러트리며 단번에 거리를 좁혔다. 롱기누스의 창날이 번뜩이자 스토얀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방어 마법진으로 이를 막아 냈다.

    쿠우웅!

    “……!”

    하지만 무게감이 현격히 달랐다. 칼날에 실린 중력이 마법진을 깨트릴 것처럼 짓누른다. 불의 거인을 으스러트리는 광경을 미처 못 봤던 스토얀은 눈을 홉떴다. 현규하가 각성한 고유 능력이 사이코키네시스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중력까지 제어할 수 있었던가.

    ‘아니, 잠깐. 칼 칼이라고!’

    어느 틈에 현규하의 손에는 칼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 의미를 깨달은 순간.

    “으아악!”

    방어 마법진을 전개하여 중력을 받아 내느라 꼼짝도 못 하는 검은 짐승의 몸체를, 신력을 두른 성유물이 관통했다. 처음으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검은 짐승을 앞에 두고도 현규하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부족해, 부족하다. 신력만으로는 결정타가 되지 못한다. 신력에 의한 타격은 스토얀이 이아드를 저버렸음을 알게 된 신들의 재정.

    검은 짐승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는 대적자의 힘이 필요하다. 현규하는 아티팩트에 마나를 실었을 때처럼 제 손에 직접 둘러 보았다. 신력을 빌렸을 때보단 낫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손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스토얀의 몸통을 꿰뚫었다. 담피르의 마나가 독소처럼 검은 짐승의 체내를 휘저었다.

    찾아야 할 것은 심장. 육체를 자유자재로 변형하는 검은 짐승의 심장은 흉부에 존재하지 않았다. 손이 먼저 망가지느냐, 심장을 먼저 찾느냐.

    “크윽! 정말 말을 안 듣는, 아들이구나!”

    산 채로 체내가 헤집어지는 극통으로 스토얀이 노호성을 질렀다. 무너지는 신체를 가까스로 회복한 그는 삽시간에 연기가 되어 현규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이래 봬도 고문 같은 거 하지 않고 단번에 심장을 뜯어 줄 생각이었던 불속성 효자인데요.”

    스토얀이 어머니를 농락한 것에 비해 단칼에 죽이는 건 얼마나 자비로운가. 자화자찬한 현규하는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는 롱기누스의 창을 다시 스토얀에게 투척하려 했다.

    그 순간.

    조개껍질을 엮은 의복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며 허공에서 인간의 생혈이 떨어졌다. 치치미메다. 새로이 나타난 치치미메가 현규하를 멸망의 환상으로 떨어트렸다.

    빛이 거의 닿지 않는 어둠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 인유신은 그곳에서 현규하가 어떻게 스토얀과 싸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명확한 것은 하나, 어둠으로부터 발현되는 종말의 징조뿐이었다.

    종말의 징조가 다시금 나타났다. 넋을 놓고 있던 헌터들은 생명의 위협이 닥치자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공격을 했지만 무의미했다. 헌터들의 공격에 스러진 종말의 징조들은 어둠 너머로 돌아가 흉성에 맺혔고,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종말의 징조가 나타났다.

    넘실거리는 흉성은 종말의 징조들이 돌아와 맺힐 때마다 점점 더 짙어졌다.

    “저, 저걸 어떻게 이겨! 공격해 봤자 계속 나타나기만 하잖아!”

    멸망의 트라우마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태성도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 헌터들의 심리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만, 이 상황이 축적될수록 좋지 않다는 건 알겠군.”

    “…….”

    스토얀이 진조가 아니라 세계의 주춧돌이 된 왕으로서 멸망의 힘을 다스리자 소년도 달리 조언할 말이 없는 듯했다.

    인유신은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방법이,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아.’

    페룬이 말하지 않았던가.

    【이아드에 가해지는 모든 책임과 대가는 우리가 지도록 하마. 하니 너희는 괘념치 말고 너희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을 우선시하도록 하거라.】

    그 말을 전하면 공황 상태에 빠진 헌터들도 멘탈을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 인유신은 만 국장에게 통신을 부탁하려고 부착한 마이크를 조절해 보았지만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 만 국장도 정신이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여기에 있는 헌터들에게 일일이 말을 전하기에는…….’

    난감해하던 인유신은 퍼뜩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마법진을 올려다보았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유신은 아까 헌터들에게 버프를 주었던 것처럼 크르스니크의 빛 안에 있는 이들에게 말을 전한다는 느낌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그다지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한데 가까이에서 그를 보호하던 공태성과 장범만이 아니라 저 먼 곳에서 종말의 징조와 싸우던 헌터들까지 그를 의식했다.

    좌중이 주목하자 갑작스레 긴장되어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아까 페룬 님에게 전언을 들었는데요, 수습은 당신이 다 하실 테니까 살아남는 걸 생각하라고 하셨어요.”

    “뭐!”

    “아마 저기 어둠 너머에 있는 정체불명의 뭔가에서 보호해 주실 거라는 뜻이 아닌가 싶은데요.”

    그의 말에 호응하듯 페룬의 가호를 내리는 부서진 건물이 한 차례 광채를 발했다.

    헌터들이 술렁거렸다. 거짓된 신탁을 발화했다가 신벌을 받는 사이비는 픽션의 단골 소재로도 나올 정도이니, 인유신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에 인 이어로 전해지는 만 국장의 음성이 쐐기를 박았다.

    - 젠장! 상황이 여기서 더 악화되더라도 우리가 도망칠 곳은 없네! 자네들은 이미 고국과 고향에서 한 번 도망치지 않았나. 죽고 싶지 않았든, 자식을 위해서든!

    살아남은 헌터들의 태반이 귀화한 이들이다. 그건 지휘부에 있는 만 국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 나도 마찬가지일세. 일찍 죽고 싶지 않아서 계주에서 도망쳐 조선으로 온 대가로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 있지. 우리는 이미 한 번 도망을 쳤으니 두 번은 없어. 거리낄 게 뭐가 있나 페룬께서 보증도 서 주셨으니 뒷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들이받으라고!

    “아하하.”

    허정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국장님 논리대로라면 조선에서 태어난 나는 한 번 튈 기회가 있는 듯하지만, 신을 뒷배로 삼을 수 있는 전투가 흔한 건 아니지. 유신아, 너도 버겁겠지만 계속 백업 잘 부탁한다!”

    야수화한 허정현은 이미 한 번 목덜미를 물어뜯어 죽였던 수르트를 향해 뛰어올랐다.

    “씨발! 쪽팔리게 살 거냐!”

    “여기서 죽은 사람들 원수는 갚아야지!”

    헌터들은 멸망의 공포를 떨치기 위해 짐짓 거칠게 외치며 무기를 고쳐 들었다. 전장의 환성이 다시금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나도 내 몫을 하고 있는 걸까’

    이 빛을 잃지 않고서, 어떻게 현규하를 도울 수 있을까.

    인유신은 의식의 깊은 곳으로 침잠하여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크르스니크의 능력을 깨우친 뒤 그가 ‘알고 있는’ 주입된 지식들이 느른하게 떠오른다.

    『너는 신이 내려 준 이름을 이은 아이인걸.』

    언젠가 들었던 스토야의 음성이 그의 앞에 길을 인도했다.

    “꿍꿍!”

    8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완만하게 아래로 떨어지던 마나가 재차 차올랐다.

    필요한 것은 하지점의 태양. 하잘것없는 나라도 소중히 여겨 주는 마음의 보답. 지키고 싶은 사람을 위한 의지.

    【나의 이름을 받은 아이야.】

    나직한 음성이 뇌리를 잔잔히 울리듯이 번졌다. 크르스니크란 특성을 지니고 태어날 때부터 영혼의 깊은 곳에 각인되었으나 비로소 들을 수 있게 된 음성이 속삭였다.

    【내가 심장을 대가로 부여한 운명을 나누어 짊어질 것이냐.】

    최초의 크르스니크가 스스로 제 가슴을 갈라 심장을 바치며 바랐던 것. 검은 짐승을 사냥하는 하얀 짐승이 되리라. 목적을 이루는 그 순간까지 늙지도, 죽지도 못하며 도구로서 서로의 운명을 얽매고 속박하여.

    이를 받아들이면 인유신 또한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만약을 가정한다. 혹여 현규하와 스토얀이 결착을 짓지 못하여 스토얀이 도망치거나 사라진다면, 두 사람은 그를 찾을 때까지 영원한 방랑자가 되어 멸망하는 세계를 배회할 터다.

    대적자로 규정된 스토얀의 마지막 숨결이 떨어질 때까지 늙지도, 죽지도 못하며 오직 사냥에만 매진하는 도구로서의 삶을.

    ‘그게 뭐 어때서.’

    본능으로 깨닫자마자, 대답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그와 함께하는 길이다. 그 길의 끝이 가없이 아득하여 종착점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괜찮다. 나는 절대 그를 홀로 방랑하게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킬 수 있는 그의 곁.

    【그리하면 너는 진실로 나의 이름을 잇게 되리라.】

    내가 할 수 있는 것.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던 내가, 이 순간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나의 모든 것.

    나는 기꺼이 그의 운명을 나누어 짊어질 것이다.

    하늘이 서서히 밝아졌다. 인유신의 의지에 운명이 답했다.

    “저 애가 어떻게 이걸……”

    마법진을 올려다보던 소년이 낮게 신음했다. 여름의 태양 빛을 흩뿌리기만 하던 상공의 마법진에 백광의 구체가 작열하며 뭉쳤다.

    아주 작았지만, 그것은 분명한 태양의 조각이었으며.

    “뭣이……!”

    그 빛은 어둠 너머의 짐승에게까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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