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6화 (206/214)

재차 나타난 종말의 상징들이 크르스니크부터 공격하기 위해 빛 안으로 몰려가고 있어도 현규하는 동요하지 않았다. 인유신을 비롯하여 뒤에 남은 헌터들이 그 정도는 격퇴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처럼.

스토얀은 저에게 다가오는 아들을 응시했다. 짐승의 주둥이가 사람의 언어를 흉내 냈다.

“저 애가 크르스니크여서 네 주인이 된 거니”

“그거랑은 상관없는데요.”

“여하튼, 네 주인 옆에서 생쥐처럼 숨어 있을 줄 알았더니 의외로구나.”

그 말에 갑자기 현규하가 수줍게 웃었다.

“생쥐라니 뜬금없이 왜 칭찬을 하고 그래요. 안 어울리게.”

“……”

그의 아들은 가끔, 아니 꽤 자주 이해하지 못할 언행을 하곤 했다.

‘당연하지. 근 30년 만에 만났으니까.’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스토얀이다. 평범한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감각은 지워진 지 오래다. 그렇지만 30년이 객관적으로 긴 시간이라는 사실만은 인식했다.

30년 전. 스토얀은 그 시간을 느릿하게 되새겼다.

나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나날을 버텨 온 그의 극히 짧은 찰나를 현소라가 함께했던 시절.

〈만약 아들을 낳게 된다면 그 애의 이름은 규하라고 지을 거야.〉

〈무슨 뜻이야〉

〈으음, 아득할 정도로 먼 곳에 있는 별이라는 느낌〉

〈좋은 이름이네.〉

그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별 감흥이 없었겠지. 중요한 건 자신의 피를 이은 자식이었을 뿐, 필요도 없는 이름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만약 현소라가 이아드에서 무사히 자식을 출산할 수만 있었다면, 아이를 가져와 이름도 짓지 않고 성인이 될 때까지 방치했을 터였다. 그가 필요한 건 새로운 육체뿐이었으니.

그러니 그녀에게 되물었던 것은, 정말 뜻이 없는 질문이었을 뿐이었다.

〈혼혈이면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경우도 있지 않아 우리 아이는 괜찮을지 걱정이네.〉

인간의 사회가 어떠했는지도 역시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지만, 현소라와 데이트를 한다는 명목으로 봤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나서 물었을 따름이었다. 무의미한 대화의 적당한 기름칠에 불과한 것.

가혹하게 대해도 그녀는 그를 ‘사랑’하겠지만 기왕이면 무난한 연기를 하는 게 편하지 않겠는가.

〈으음, 여기의 한국, 아, 실수. 아직 입에 안 익어서. 조선에는 귀화한 사람이나 외국인이 거의 없으니 어느 정도 시선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저런.〉

〈언젠가 조선에도 외국인들이 많아질까 하지만 내 고향에서는 괜찮아. 자기랑 쏙 닮은 얼굴로 태어나도 문제없을걸 우리 엄마도 젊었을 때 미국에서 가족들과 귀화한 연구원의 아들이랑 약혼까지 했었거든. 그 남자가 하필이면 엄마의 동무와 바람을 피웠던 게 들통나서 깨졌지만.〉

〈나쁜 사람들이었네.〉

〈결혼하기 전에 알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아무튼 기왕이면 우리 애가 자기랑 닮아서 자기처럼 한복이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

현소라는 고향 땅에 귀화한 외국인이나 혼혈이 드물지 않은 이유를 길게 설명했다.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표정이 어떠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를 위해 새로운 육체가 될 자식을 낳은 여자이니, 그녀를 생각하여 아들을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 줄 아량은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이리 오렴.”

스토얀은 스스로 죽을 길을 위해 온 아들의 오만, 혹은 원한을 기꺼워했다.

아들이 믿는 것 같은 크르스니크는 미숙한 존재다. 종말의 상징들과 대치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해 보이니, 이 위치에서는 더 이상 크르스니크의 빛도 타격이 되지 못한다.

‘혹시나 최초의 크르스니크와 필적한 힘을 지녔을까 봐 먼저 제거하려고 했는데 기우였군. 크르스니크는 뒤에 정리해도 되겠어.’

최초의 크르스니크가 부활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저 미숙한 것이 그의 어둠을 깨뜨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를 중심으로 번지는 견고한 어둠이 존재하는 한, 현규하의 패배는 시간문제였다. 어떤 부상을 당하더라도 자신은 어둠에 감싸여 회복할 수 있으니.

새로운 육체로 대비되었음에도 아비에게 순순히 바치지 않는 아들의 목숨을 거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현규하의 안에 흐르는 담피르의 피로 인해 어떤 해를 입어도 최종적으로 육체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그의 승리였다.

스토얀은 짐승의 육체에 밀집하는 마나를 음미했다. 흥분할 필요 없다. 배신을 당했다는 노여움은 스토야에게만 돌리자. 중요한 건 자신의 소유가 될 육체를 최대한 손상하지 않…….

뾱!

“……!”

머리 근처에서 들려온 낯선 소리에 스토얀은 당황해서 눈동자를 올렸다.

뾱! 뾱!

아코디언 같은 몸체의 망치가 방어 마법진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일말의 위협도 되지 않는 공격, 아니 행위였으나 뿅뿅거리는 소리가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그 앞에서 현규하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유신 씨 빛에 쫄려서 들어오지도 못한 주제에 뭐 잘났다고 이리 오라 마라 폼 잡으면서 지랄이에요.”

“…….”

“나한테 정자와 유전자를 제공했다는 게 진짜 쪽팔리네.”

“허어.”

아들의 언행이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것 정도야 이전에도 느끼고 있었지만, 속셈을 온전히 드러낸 후의 태도는 한결 매서워졌다. 다른 표현으로는 실로 무례하다 칭할 수 있겠다. 당연히 그로서는 유쾌한 감상이 들지 않는다.

‘역시 현혹이 통했어야 했어.’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로 남아 줘야 영생 불로의 존재로 만든 뒤에도 쉽게 육체를 빼앗았을 게 아닌가. 현소라를 현혹했던 것처럼.

“소라가 너를 잘못 키웠구나.”

“잘 키웠는데 아버지 통수를 날린 게 엄마니까 잘난 척 나불거리는 상판을 박살 내는 건 아들이 해야 할 일 아닌가”

현규하의 빈정거림은 지금도 연신 방어 마법진을 두들기며 뿅뿅 하는 새된 소리를 내는 저 망치처럼 몹시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이제 그 거슬림을 굳이 참을 필요도 없다.

스토얀은 검은 짐승의 앞발을 휘둘러 망치를 내던졌다. 핏빛의 강이 범람하는 바닥으로 망치가 떨어졌다.

“너에게 소라의 흔적이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현소라가 낳았으나 그는 ‘우리’의 아들이 아니라 ‘나’의 아들에 불과할 뿐이다. 나에게 육체를 바칠, 나의 아들.

스토얀은 명확한 사실을 재차 되새기며, 대적자를 맞아 몸 안에 끓어넘치는 뱀파이어로서의 본능을 일깨웠다.

흉흉한 검은 짐승의 기세가 노도처럼 밀려와 현규하를 덮쳤다.

사위에 어둠이 자욱하다. 그 안에서도 희미하게 느껴지는 크르스니크의 빛으로 방향을 가늠하지 못했다면, 방향 감각까지 통째로 상실되었을 터였다.

‘……괜찮겠지.’

인유신이 걱정되지 않는다고 하면 당연히 거짓말이다. 당장에라도 되돌아가 모든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고 싶다.

그러지 않고 어둠 속에서 창을 휘두르는 건 가장 큰 위협인 이 남자와 결착을 지어야 함과 동시에, 어긋난 채 추락했던 제 삶을 바로잡고 그에게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유신을 믿기 때문이다.

그가 각성하여 위험에 노출되지 않기만을 바랐지만, 인유신은 자신이 알려 주지 않아도 스스로 힘을 깨우쳤다.

이는 인유신의 의지.

그렇다면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은 그의 의지를 신뢰하는 것.

‘그 와중에 저 망할 노인네 더럽게 까다롭네.’

현규하는 자신의 유전자 제공자가 몹시도 까다로운 적수라는 걸 인식했다.

‘싸우는 방법 진짜 짜증 나.’

인간의 육체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 스토얀의 전투 센스는 평이했다. 하지만 진조에 가까운 뱀파이어로서 검은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쓴 스토얀의 전투는 달랐다.

카아앙!

손으로 그릴 필요도 없이 의지와 거의 동시에 구성된 방어 마법진이 연신 번뜩이며 신력과 담피르의 마나를 두른 창날을 막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짐승의 꼬리가 꼿꼿하게 곤두서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길어지며 길게 내뻗었다. 꼬리가 편검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며 현규하의 심장을 노렸다.

“칫!”

이를 쳐 내자마자 방금까지 방어 마법진을 띄우고 있던 짐승의 앞발이 거대한 망치처럼 부풀더니 그의 정수리를 내리치려 했다. 저 무게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직감한 현규하는 몸을 굴려 앞발을 피했다.

쿠웅!

흙먼지가 들썩거리며 땅이 깊이 파였다. 재차 짐승의 주둥이가 사람 하나를 집어삼킬 만큼 쩍 벌어졌다. 입천장을 꿰뚫으려 창을 뻗으니 대번에 연기로 변해 후방으로 이동한 스토얀이 창을 쥔 팔의 어깨를 물어뜯으려 했다.

자신은 방어 마법진을 계속 띄우는 주제에 육신의 형태와 무게를 자유자재로 변형하는 스토얀의 공격은 정말 짜증스러웠다.

창을 길게 휘둘러 간격을 벌린 현규하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엄마는 이딴 공격이나 하는 얍삽한 남자 안 좋아하는데요.”

“그랬니 나는 사랑한다고 하던걸.”

“세뇌한 주제에 잘난 척이라니 변태 새끼.”

뭐, 그렇지만 생각난 방법은 있다.

‘애초에 내 몸을 노리고 있으니 종말의 기운이 날 직접 건드리지도 않아.’

그랬다면 크르스니크의 빛이 닿지 않는 이 어둠에서 무사하기는 더 지난했을 터였다.

반면에 현규하는 그를 죽일 작정으로 나왔다. 서로가 싸움에 임한 결심의 무게가 다르다. 그런데도 못 이긴다면 자신은 인유신의 무릎을 베고 누울 자격도 없는 머저리였다.

현규하는 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잘 풀리지 않는 싸움 탓에 신경질이 난 척했다.

카강! 캉!

몇 차례의 공방이 더 오가고 다시 배후를 공격하기 위해 스토얀이 안개로 변한 순간, 현규하는 그 안개를 역장으로 감싸며 창을 찔렀다.

“컥!”

다급히 이동했으나 역장에서 채 탈출하지 못한 안개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상처는 되돌아온 검은 짐승의 허리에도 그대로 남았다. 좋아, 일단 정보 하나. 현규하는 입가를 살짝 올렸다. 저 상처는 내부로부터 뱀파이어를 좀먹어 갈 터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광경에는 그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스토얀은 망설임 없이 타들어 가는 상처 부위의 살점을 앞발로 뜯어냈다. 신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살점은 날카로운 이빨이 아래위에 다다닥 박혀 있는 주둥이로 변형되어 쏜살같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미친.”

창대로 막았으나 주둥이는 오히려 창대까지 씹어 댔다. 롱기누스의 창이 아무리 아티팩트의 반열에 있는 무기라지만 엄연한 물질이다. 이대로는 롱기누스의 창까지 손상될 거 같아 현규하는 손으로 주둥이를 잡아 뜯었다.

성대가 있었다면 ‘끼아아아!’ 하는 기성을 질렀을 법한 주둥이가 사납게 이를 세웠다. 재빨리 역장으로 그것을 감싸지 않았다면 현규하의 손등과 팔뚝도 크게 물어뜯겼을 것이다.

주둥이를 짓뭉개어 터트린 현규하는 피가 흐르는 손을 감쌌다. 그사이에 스토얀도 스스로 도려낸 상처를 지혈한 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자른다는 말은 많이 들어 봤는데, 살을 내주고 살을 자른다는 전법은 또 처음이네요.”

“현재의 육체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으니까. 이 육체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고 하여도 네 몸을 취할 수만 있다면 내 승리다.”

“버서커로 각성한 헌터도 그딴 공격은 안 하지 싶은데.”

여유롭게 말을 받긴 했으나 자신의 부상까지 도외시한 공격은 확실히 위협적이다. 막말로 온몸의 살점을 다 뜯어내어 아까와 비슷한 수단을 쓰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나.

스토얀은 이를 대처할 방법을 고민할 시간 따위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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