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4화 (204/214)
  • [구천현녀의 가호가 내립니다.]

    [페룬이 전장의 영광을 바랍니다.]

    [누아다가 승리를 기원합니다.]

    [키부카의 방패가 보호합니다.]

    허정현이 제일 먼저 깨웠던 사제와 마법사들이 무너진 건물의 마법 술식을 임시로 복구했다. 전쟁의 신들의 축복이 다시 전장에 내려졌다. 부서지기 전만큼의 효용은 아니었으나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오.”

    울음소리로 저주를 발산하는 근처의 개구리와 벌레들을 화염방사기로 몰살한 현규하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설마 했는데 저놈들 지성이 없네요.”

    “어, 그런 거예요”

    “우리아쉬들만 해도 건물에서 신들의 가호가 내려진다는 걸 알았으니 최우선적인 파괴 대상으로 삼았잖아요. 그런데 저놈들은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거 같아요. 역시 짭이 아니라 정품을 써야 합니다. 내 아빠가 짭이나 돌리는 공장장이라니 수치스럽군요.”

    인유신도 그 말을 듣고 전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우리아쉬들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투의 유불리를 인간처럼 계산하면서 싸우던 우리아쉬들과 달리 종말의 징조들은 무턱대고 부딪혀 오기만 했다. 서로 합을 맞추는 협공도 있을 법한데 말이다. 마치 이성이 없는 던전의 마수들을 보는 것 같았다.

    “거인이랑 싸울 때보다는 나은데”

    어느새 인유신의 옆에 다가와 있던 장범도 말을 받았다.

    껍질을 흉내 냈을지언정 신비 그 자체인 종말의 상징들은 거인보다 강력했다. 하지만 인간을 밟아 죽일 정도로 피지컬이 압도적이며 지성까지 인간과 대등했던 우리아쉬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한결 수월했다.

    ‘그렇지만……. 진짜 괜찮을까’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면 걱정되는 면도 없잖아 있었다.

    안개로 화하여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스토얀도 그렇고, 하루 종일 전투를 이어 가는 헌터들도 그렇다. 신들의 가호가 다시 내려지며 치유는 순조로웠으나 체력만 회복된다고 하여 정신적인 피로감까지 씻겨지던가.

    인유신은 상공에 뜬 마법진을 올려다보았다. 마법진은 사방에서 종말의 징조들이 몰려오는 가운데에도 찬연한 여름의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규하 씨에게 버프를 준 것과 비슷한 효력을 더할 수는 없을까’

    스토얀의 안개를 분석하는 듯 진중한 얼굴의 소년에게 묻기 위해 막 입술을 열었을 때였다.

    【호오, 네가 이 시대에 태어난 아이로구나.】

    머릿속으로 굵직한 음성이 울렸다.

    놀라서 퍼뜩 둘러보았으나 자신에게 텔레파시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누, 누구세요’

    【지금도 너희에게 전장의 영광을 바라고 있지 않느냐.】

    페룬이었다. 천둥과 폭풍, 그리고 불과 전쟁의 신.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작게 입을 벌렸다.

    ‘저는 사제도 아닌데 어떻게……’

    【너에게 이름과 힘을 내려 준 크르스니크는 나의 아들이다. 아들의 힘을 잠깐 빌려 쓴 게지.】

    ‘크르스니크 님은 안 계세요’

    【내 아들은 이아드에 스토얀을 제외한 모든 뱀파이어가 죽자 녀석의 이름을 이은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눈을 거두었다. 그보다 너는 무언가 바라는 게 있지 않더냐】

    ‘그게……. 태양의 빛으로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려고 했었어요.’

    【그러하냐. 내 사제에게 힘을 내리는 것보다 너를 통하는 게 이아드에 부하가 덜 걸리겠다. 해 보아라.】

    페룬의 말이 끝나자 인유신도 직감했다. 그는 어둠을 밝히는 여름 태양의 빛으로 신성의 가호를 빌려 사람들을 회복하게 하는 법칙을 ‘알고 있었’다.

    마나가 맺힌 손끝이 마법진에 하나의 법칙을 더 새겨 넣었다. 찬란한 햇살이 사람들을 부드럽게 감싸며 훑어갔다.

    “이건……!”

    뇌가 물먹은 솜이 된 것처럼 축축 늘어지는 피로감에 허덕이며 악착스럽게 무기를 휘두르던 헌터들은 갑자기 전신에 활기가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 근원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햇살에 있음을 깨닫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귀공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소이다!”

    막 싸움을 시작한 것처럼 기력을 회복한 제임스가 불의 거인 하나의 정신을 붕괴시키면서 큰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싸움터에서 헌터들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게 처음인 인유신은 빨개진 얼굴로 고개만 꾸벅 숙였는데, 현규하의 광대뼈가 하늘로 올라갔다.

    “저 아저씨, 조선말을 이상하게 배운 거 말고는 좋은 사람이네요. 근데 어떻게 한 거예요”

    “페룬 님이 방금 알려 주셨어요.”

    “페룬”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면 현규하는 잘됐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요. 저놈들 모가지 딸, 아니 죽일 때마다 저편의 어둠으로 뭔가 기운이 흘러들어 가고 있는데, 그게 뭔지 좀 물어볼 수 있겠어요”

    “네 눈에는 그런 게 보였니”

    “그쪽은 몰랐어요”

    현규하는 놀라워하는 소년에게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일 더하기 일이 왜 이가 되냐는 질문을 받은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사실 인유신도 그 기운이 뭔지 전혀 짐작되지 않았지만 페룬을 슬쩍 불러 보았다.

    ‘저, 페룬 님’

    【…….】

    의념이 이어져 있다는 느낌은 확실히 있는데 이상하게도 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인유신이 한 번 더 부르면 신을 재촉하는 건방진 행위가 될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는 둠네제울만이 아니라 우리의 업이로다.】

    ‘예’

    【이아드에 가해지는 모든 책임과 대가는 우리가 지도록 하마. 하니 너희는 괘념치 말고 너희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을 우선시하도록 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의념이 끊어졌다. 인유신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현규하에게 말을 전해 주었다.

    “음……. 뭐, 대충 맘대로 싸워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되겠죠”

    “아니, 그런데 정말 이상하고 위험해 보여. 진조도 쓰지 않던 힘이야.”

    “그쪽이 몰랐던 게 아니고요”

    “내가 진조에 대해 모르는 건 없어.”

    “하지만 안 죽일 수도 없잖아요.”

    멸망의 징조들을 죽이지 않아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불안한 얼굴의 소년도 어쩔 수 없이 납득했다.

    원기를 회복하고 신의 가호로 인한 버프까지 받는 헌터들은 긴 싸움의 마지막을 향해 질주했다. 홀로그랩 맵의 표식들이 하나씩 꺼져 갔다.

    “……아, 규하 씨가 말한 게 저거였네요.”

    죽음이 가속화될수록, 소년만이 아니라 인유신도 현규하가 말한 기운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방주를 목격했을 때보다 더욱 짙은 흉성이 어둠에 알알이 맺혔다.

    그것은 원대한 흐름 같기도 하고, 시공간의 왜곡 같기도 했으며, 별의 통곡 같기도 했다. 그 무렵에는, 헌터들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마나가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피의 강이 거꾸로 흐르고 하늘과 땅이 맞닿아 맷돌처럼 회전하는 듯한 감각이 속을 뒤틀었다.

    높은 햇살 아래에 고인 짙은 어둠이 용오름 치고, 흉성들이 절규한다. 세상이 깨진다. 단말마의 비명을 울부짖는다. 누구의. 우리가 딛고 선 땅. 태어난 하늘. 세상. 세상의 비명. 이아드의 단말마.

    종말의 상징을 양식으로 하여 도래한 세계의 마지막.

    “아, 아아…….”

    어느 헌터가 힘없이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누구나 직감했다. 이것이야말로 종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멸망이다.

    그리하여 말세가 도래했으니.

    안개가 걷히고, 검은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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