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203/214)

여름의 태양이 죽은 땅을 점령한 어둠으로 밀려왔다.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악착같이 스토얀을 막아서고 있던 공태성과 장범에게도, 틈이 나자 서낭당에서 사제부터 깨우던 허정현에게도, 후방에서 신음하던 만 국장과 지휘팀에게도.

어둠이 걷히자 환영도 힘을 잃었다. 멸망의 순간을 반복하며 악몽 속에 고통스러워하던 헌터들이 하나둘 의식을 회복했다.

맹렬하게 부딪치던 불의 칼날과 짐승의 팔이 멈칫했다. 스토얀의 얼굴이 퍼뜩 상공으로 올라갔다. 커다랗게 뜬 호박색 눈동자에 최초로 서린 감정은 경악이었다. 이어 불신. 불신. 불신. 불신. 그리고 증오.

“스토야! 스토야! 스토야아아!”

눈동자가 시뻘건 색으로 물든다. 여름의 태양과 불의 신 크르스니크의 이적을 현현한 마법진을 본 순간, 스토얀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어떻게 현규하와 인유신이 제 눈을 속여 담피르와 크르스니크라는 걸 숨길 수 있었는지. 어떻게 막 각성했을 터인 크르스니크가 능숙하게 힘을 쓰고 있는지.

“너까지 나를 버렸구나. 너까지……!”

병사들에게 속닥이며 몰래 집으로 안내하던 부모를 피해 도망칠 때도, 바위 뒤에 숨어서 훔쳐 온 식량을 나누어 먹을 때도, 강에 빠져 죽을 뻔했을 때도, 끝내 따라잡혀 끌려가게 되었을 때도, 산 제물로 바쳐지던 그 순간까지. 스토얀의 곁에는 항상 스토야가 있었다.

곱아드는 손을 함께 움켜잡고서, 서로를 위로하던 누이가 있었다.

유일했던 기억마저 처참히 부서졌으니 스토얀은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좋아, 스토야. 좋다고. 나도 네 사정을 봐주지 않겠어.”

파계를 쓸 수 없게 된 스토얀에게 남은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신벌이 닥치기 전에 세계의 틈을 찾아내는 것. 다른 하나는 종말 속에서 길을 여는 것.

즉시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후자다. 하지만 그 방법은 스토얀 자신을 소모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아드라는 세계를 구성하는 거대한 흐름을 비트는 행위였다.

스토얀과 달리 스토야는 이아드에 애착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이아드가 완전히 망가지면 세계를 지탱하는 또 다른 왕인 그녀 또한 성치는 않을 터였다.

누이까지 제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스토얀은 후자를 피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스토야가 배신했다는 걸 알았다면 진즉 이 방법을 취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크르스니크가 마음 편하게 각성이나 하지도 않았을 터.

“……!”

스토얀이 분개하는 틈을 타 크게 베어 내려던 공태성은 갑작스럽게 덮쳐 오는 살기에 급히 검로를 꺾었다.

“끼아아아!”

거기에는 별의 악령들, 치치미메가 두개골 너머에서 눈알을 번들거리며 그를 노리고 있었다. 공격을 당하는 건 공태성만이 아니었다.

“우왓, 얘들 갑자기 왜 이래!”

장범과 겨우 정신을 차린 다른 헌터들 또한 치치미메의 공격을 황급히 막아서고 있었다. 스토얀의 영역 안에서도 환영에 불과했고, 태양의 빛이 내리쬐면서 빠르게 흐려지던 치치미메가 한순간에 뚜렷한 형상을 이루었다.

현규하 역시 마법진을 유지 중인 인유신을 보호하며 치치미메의 하나를 창날로 꿰어 바닥에 처박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면 환영이었을 때와는 달리 형체화하면서 직접 공격이 가능하게 된 점이었다.

치명타를 입자 소멸하는 치치미메로부터 눈을 거두고 소년에게 물었다.

“이거 뭐예요”

“스토얀의 소행이겠지.”

“그건 보면 아는데요.”

“하지만 무척 약화되어 있어. 치치미메가 실제로 현현했다면 인간은 받아 내지 못했을 거야. 공격이 통한다는 건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고.”

치치미메는 산파들의 숭배를 받는 신으로서의 이면도 있다. 그 이면까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들은 태양을 먹어 치워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는 악령들이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멸망시킨 세계까지 존재했다.

약화된 상태로 구현되었다고는 해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인유신은 이유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거의 사라져 가던 스토얀의 영역에서 습한 혈향이 다시 번지고 있었다.

“좀, 위험한데……. 멸망의 환상이 어쩌다가 형체화가 된 거지”

소년이 하늘의 저편을 올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스토얀의 행방을 찾던 인유신의 시선도 그를 따랐다. 태양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둑한 하늘에서 짙은 안개가 흐물거리고 있었다.

스토얀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바로 내 몸을 강탈하러 올 줄 알았는데 미적거리고 있으니 확실히 수상하긴 하네요.”

“예 몸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노인네가 보송보송한 내 몸으로 갈아타고 싶어 합니다. 어쩌겠어요, 싱싱하고 잘생긴 게 죄라면 나는 사형이네요. 주인님도 사형이지만 내가 꼭 탈옥시켜 줄게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진실에 깜짝 놀란 인유신이 현규하를 더욱 꼭 붙잡는 사이에도, 안개는 여전히 저 위에서 불길하게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규하가 뒤에서 달려드는 치치미메의 몸통을 창으로 후려치며 물었다.

“유신 씨. 공중에 뜬 상태에서는 마법진을 유지하기 힘들겠죠”

인유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 서투른 탓인지 발밑이 불안정하면 마법진을 구성하는 마나의 흐름을 바르게 지속하기 어려울 듯했다.

“알겠습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건물의 잔해 하나가 치치미메를 공격하고 있는 공태성의 머리로 날아갔다.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잔해를 쳐낸 그와 눈이 마주친 현규하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망할 새끼. 무슨 개를 호출하는 것처럼 부르는군.”

인상을 쓰면서도 공태성은 순순히 다가왔다.

“뭐.”

“밥값 하라고. 주인님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면 매형의 척추를 뽑아 버릴 거야.”

“협박을 할 거라면 매형이라는 개소리는 집어치우든가!”

다소의 소란은 있었지만 인유신에게 경호원을 잘 붙여 놓은 현규하가 하늘로 몸을 날렸다. 안개화한 건 동일한데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 뭐가 다른지 설명하기엔 모호한데…….’

만에 하나가 있으니 현규하는 아공간에서 사인참사검을 꺼냈다. 삿된 것을 베는 칼이 안개로 쏜살같이 날아갔으나 근처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튕겨 나왔다.

“쯧.”

실드 코어와 비슷한 마법으로 보호하고 있는 모양이다. 담피르의 힘도 육체에 직접 공격을 가해야 먹힌다.

몇 번 더 두들겨 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스토얀은 마치 우화를 기다리는 것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저걸 깨트릴 방법이 없나’

현규하가 이맛살까지 찌푸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안개로부터 위압적인 기운이 형성되었다.

안개 너머에서 나타난 건 말을 탄 네 명의 기수들이었다.

활을 들고 백마를 탄 승리의 백기사. 검을 쥐고 적마를 탄 전쟁의 적기사. 천칭을 가지고 흑마를 탄 기근의 흑기사. 대낫을 올리고 청황마를 탄 죽음의 청기사.

“무, 묵시록의 네 기사”

“요한묵시록…….”

헌터들 사이에서 신음성이 터졌다.

재앙을 초래하여 세상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네 명의 기사들이 안개로부터 말을 달려 나왔다.

지진이 일어난 양 땅이 기우뚱 흔들리고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피가 섞인 우박과 불이 땅으로 낙하했다. 일곱 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을 가진 붉은 용이 포효했다. 인간을 잡아먹기 위해 날뛰던 치치미메가 더욱 광란했다. 헌터들은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창백하게 굳었다.

요한묵시록이 증명하는 것은 신의 심판이자 사역이다.

언젠가 이 세계가 멸망하게 된다는 뿌리 깊은 공포를 안고 있는 헌터들에게 이는 감히 대적하지 못할 절대적인 신비였다. 묵시록의 기사들이 몰고 오는 죽음이 무력하게 굳은 헌터들에게 도달하기 직전, 연이은 총성이 귓전을 갈랐다.

드르르르륵!

현규하가 아공간에서 중기관총들을 꺼내 가장 앞에서 말을 달려오던 백기사에게 총을 연발했다.

드르르르륵!

총은 큰 타격이 되지는 못했으나 아예 무용한 건 아니었다. 거침없이 말을 짓치던 기사들이 고삐를 당기며 허공에서 정지했다.

기사들만이 아니라 헌터들의 멍한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고 있음에도 현규하는 태연하게 마이크를 톡톡 두드렸다.

“국장님. 저것들 진짜 묵시록의 기사들 아니고 짭이에요. 거인들보다는 좀 단단하지만 공격 먹힌다고 다른 사람들한테 말이나 전해 줘요.”

- ……아, 아아! 그래!

그 말에 흠칫하여 정신을 되찾은 만 국장이 오퍼레이터들에게 다급히 말했다.

- 묵시록의 기사들과 붉은 용, 치치미메 등을 적성 대상으로 판별합니다.

상공에서 오퍼레이터의 알림이 들려왔다. 조금 떨리긴 했으나 명료한 음성이었다.

총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타격이 가능하다는 것까지 확인한 헌터들은 오퍼레이터의 목소리에 이성을 되찾았다.

“그냥 조금 센 마수라는 거잖아요!”

용기를 북돋기 위해 올리비아가 짐짓 크게 외치며 워 해머를 들어 올렸다. 상공의 홀로그램 맵에는 이제 적성 대상으로 거인이 아니라 기사들과 용, 치치미메가 표시되기 시작했다.

총격이 이어지지 않자 기사들은 다시 헌터들에게 말을 몰아 부딪혔다. 올리비아가 백기사의 화살을 피하며 워 해머로 백마의 머리를 후려쳤다.

백마는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고 기사도 낙마하지 않았으나 균형이 흐트러지는 게 모두에게 보였다. 공격이 통한다는 걸 재차 목격한 헌터들은 망설일 것 없이 무기를 꼬나들며 돌격했다.

“아우우우우!”

이윽고 종말의 때에 신을 잡아먹으리라 전해지는 늑대 펜리르가 커다란 하울링을 울리며 형체화되어도 헌터들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저건 내 상대라고 이마에 써 붙여 놨군!”

허정현의 외침에 이어 백호가 펜리르에게 몸통을 거칠게 부딪쳤다. 그 너머로 수르트를 비롯한 불의 거인들이 나타났고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의 독기가 잠식했다.

백마를 타고 검을 든 유지의 신 비슈누의 화신 칼키가 나타났다.

핏빛의 강이 죽은 땅을 침식하며 무수한 개구리와 벌레들이 기어 올라왔다.

머리가 셋, 눈이 여섯, 입이 셋 달린 용 아지다하카의 몸에서 끔찍한 것들이 쏟아졌다.

껍질이 벗겨져 하얗게 된 소나무들이 늘어서고 역병의 기운이 감돌았다.

온 세상을 물로 뒤엎어 멸망으로 몰아세운다는 물뱀 티에홀트소디가 어금니를 드러냈다.

천체에 고정된 북극성과 남극성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종말, 그리고 종말에 필적하는 재앙의 상징들이었다.

“씨발, 뭐가 이렇게 많이 튀어나와!”

짜증 섞인 어느 헌터의 욕설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오퍼레이터가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

- 술식의 임시 복구가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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