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2화 (202/214)
  • “……크르스니크!”

    날카로운 외침이 찢어졌다. 뒤틀리고 일그러진 얼굴의 스토얀보다 더 경악한 사람은 현규하였다.

    ‘당신이 왜!’

    현규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인유신이 뱀파이어의 으뜸가는 대적자라는 걸 알았으니 스토얀의 최우선 척살 대상은 그가 될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어떻게든 자신의 손에서 끝내려 했었는데……!

    “유신 씨!”

    그 즉시 귀속 아티팩트의 일부 해방까지 취소하며 인유신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엉망진창으로 찢어지고 헤집어진 장기가 다시금 피를 역류시켰다.

    세상이 아찔하게 뒤집힌다는 걸 느낀 순간, 현규하의 몸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무채색의 죽은 토지에 그가 토해 낸 붉은 핏덩이만이 선명하다. 으깨지고 녹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육체는 번번이 주인의 의지를 배신했다.

    ‘빌어먹을!’

    현규하는 피 맛밖에 느껴지지 않는 아랫입술을 짓깨물었다. 일어나. 일어나.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되새겨.

    인유신의 안전한 귀환.

    “크으…….”

    제멋대로 꺾이고 휘청거리는 다리를 차라리 부러트려 땅에 박아 넣을 듯 힘을 주었다. 으깨진 손으로 창을 쥐었다. 비릿한 맛이 다시금 울컥 치민다.

    안개로 화한 스토얀은 벌써 휘황한 백광에 접근하고 있다. 좋아, 오히려 좋다. 표적이 넓어졌다. 흐리게 깜빡거리는 시야를 명료히 하려 애썼다. 저 넓은 안개가 전부 스토얀이다. 어디를 맞춰도 된다.

    [귀속 아티팩트 ‘마지막 황제의 부러진 십자가’를 일부 해방합니다.]

    현규하는 숨을 크게 들이켠 뒤, 한껏 젖힌 팔로 롱기누스의 창을 투척했다. 신력과 담피르의 마나가 서린 창이 예리하게 허공을 가르며 쇄도했다.

    인유신을 향해 짓쳐 가던 안개가 멈칫하더니 다시 인간의 육체를 취했다. 팔이 검은 짐승으로 변한다. 안 돼. 표적이 다시 작아졌다. 아슬아슬하게 창날이 비껴간다.

    현규하는 이를 악물었다. 사이코키네시스로 창의 각도를 조절해 보려 했으나 가속도가 생긴 창은 그의 손을 이미 떠났다.

    “유신, 씨!”

    현규하가 아래로 고꾸라지려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였을 때.

    캉!

    불길이 서린 칼날이 인유신의 앞을 막아섰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 새끼가 원흉이라는 거군.”

    “네놈은 또 무엇이지!”

    불길이 이글거리는 더르누인의 칼날에 팔이 부딪힌 스토얀이 이를 드러내며 일갈했다.

    “당신 아들 남친의 경호원이다.”

    스토얀은 체술에 능숙하지 않지만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인간에게 기생하고 인간의 생혈을 취하는 검은 짐승의 육체가 사납게 인간을 노렸다.

    그렇지만 상대가 썩 좋지 않았다. 염제 공태성은 철의 시대에서든 이아드에서든, 그 어떤 헌터보다도 폭렬한 화염을 다루는 각성자다.

    일반 뱀파이어처럼 화염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잠깐이나마 그의 발을 붙잡기에는 충분했다.

    귀를 어지럽히는 검격의 쇳소리 사이에서 인유신은 찬찬히 눈을 떴다. 먼저 눈에 띈 건 어느새 익숙해진 하얀 화염과, 그리고…….

    “규, 규하 씨!”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아득바득 기어 오고 있는 현규하였다.

    “빨리 가서 저 자식한테 포션이든 뭐든 먹여!”

    “네 이놈!”

    분개한 스토얀이 노성을 질렀다. 검은 짐승의 팔을 거두고 무수한 박쥐 떼로 화해 현규하에게 달려가는 인유신을 죽이려 했으나, 거친 돌풍을 동반한 화살이 날갯짓을 방해하며 그 앞을 가로막았다. 최진혁의 독을 묻힌 화살이었다.

    [귀속 아티팩트 ‘잿더미 숲의 황금 궁전’을 일부 해방합니다.]

    “이건……!”

    신력이었다. 현규하의 공격만큼은 아니지만 무시하지는 못할 정도의 타격을 입은 스토얀이 원래의 육체로 돌아왔다. 장범이 간디바의 시위에 새 화살을 메기며 히죽 웃었다.

    “규하랑 싸울 때 보니까 신력이 통하던데 내 귀속 아티팩트도 신력을 조금 쓸 수 있거든. 심심할 때 궁전 구경하는 용도 외에도 쓸모가 있었구만.”

    “귀속 아티팩트를 심심풀이 관상용으로 써먹는 인간은 네놈밖에 없을 거다.”

    “아르주나(인도 신화에서 간디바를 사용하는 반신반인의 영웅.)와 관련된 아티팩트를 갖고 싶긴 했지만 그게 아수라가 지어서 줬다는 황금 궁전은 아니었단 말이야…….”

    장범의 서번트 태블릿을 빠르게 훑은 스토얀이 이를 갈았다.

    보아하니 저자도 현규하와 함께 철의 시대에서 건너온 인간인 듯하다. 새로운 육체로 삼기 위해 현규하를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곁다리에 불과했던 인간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방해하고 있다.

    두 사람이 스토얀을 가로막은 사이에 인유신은 무사히 현규하에게 도달했다.

    “규하 씨! 괜찮아요 정신 들어요!”

    다급히 현규하를 끌어안았다. 크르스니크로 각성하며 마나도 빠르게 회복된 후다.

    인유신은 마나를 쏟아붓듯이 힐을 했다. 내장 조각이 섞인 선혈을 연신 토하며 쿨럭거리던 기침이 잦아들고, 뭉개진 손이 빠르게 치유되었다.

    창백하기만 했던 안색에 비로소 핏기가 돌아오자, 인유신은 그제야 어깨를 늘어뜨렸다. 잠깐 사이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등허리가 뻣뻣하게 아팠다.

    “……유신 씨.”

    온통 피에 젖은 손이 인유신을 끌어안았다. 부둥키는 팔의 절박한 떨림이, 마치 그의 소리 없는 비명처럼 들려와서 인유신은 고개를 떨구었다.

    “크르스니크라는 거 숨기라고 했었는데, 죄송해요.”

    “당신이 왜 사과를 해요. 내가……. 내가 더 강했어야 했는데…….”

    “배 뚫리고도 강한 인간은 없지, 보통은.”

    마지막 말은 인유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퍼뜩 얼굴을 드니 인유신의 옆에 어느새 하나의 영체가 있었다. 인유신이 알아보았듯 현규하 또한 소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크르스니크”

    “너는 이 시대의 담피르겠고. 마음이 급한 건 알겠지만 우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그 말이 맞다. 공태성과 장범이 제법 효과적으로 스토얀의 발목을 붙잡고는 있지만, 거기까지였다. 결정적인 타격은 가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스토얀의 공격은 점점 매서워지고 있었다. 승패가 갈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앞으로 몇 분 남지 않았다.

    인유신을 한 번 더 세게 끌어안은 현규하는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는 거짓말처럼 치료되어 있었다.

    “……마나도 그럭저럭 회복되었네요.”

    “저 애가 크르스니크고, 네가 담피르니까.”

    현규하는 팔을 뻗었다. 사이코키네시스가 저 멀리 나가떨어져 있던 롱기누스의 창을 다시 손안으로 되돌렸다.

    “그쪽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죠 이 환영을 완전히 깨트릴 수 있어요 환영 자체가 아버지의 영역이다 보니 이 안에 있기만 해도 힘이 억눌리는 느낌이라 굉장히 찝찝한데.”

    “유감이지만 나는 영체라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현규하는 실망도 하지 않았으나, 이어지는 말에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깨트리는 건 가능해.”

    소년이 인유신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이 애가 할 수 있거든.”

    “제가요”

    인유신은 눈썹을 깜빡거렸다. 확실히 마나도 회복되었고, 현규하에게도 수월하게 힐을 해 주게 되었지만 그 외에 자신이 또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도 안 떠오르는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내가 알려 줄게. 그러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거니까.”

    공태성과 장범이 벌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으며 소년의 인도에 따라 눈을 감았다. 시각이 차단되자 다른 감각이 조금 더 예민해진다.

    죽은 땅을 뒤덮는 스토얀의 영역, 그 안에 농밀하게 흐르는 비릿한 혈향.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신으로부터 지음 받아 왕이 된 것인데, 그 수단이 인간에게 기생해야 하는 뱀파이어라는 건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강제로 인신 공희에 바쳐졌으니.

    『산 제물이 되는 걸 누가 반기겠니. 그렇지만 부모님은 평생 누려도 부족하지 않을 제물을 약속받고 우리 남매를 팔아넘겼어. 세상의 끝까지 도망치는 동안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지.』

    언젠가 스토야와 나누었던 씁쓸한 대화의 한 토막이 생각났다.

    고립된 어린 남매의 과거는 분명히 연민을 느끼게 했으며 가여웠다. 하지만 그것이 스토얀에게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가 지당하다고 긍정해도 인유신만은 부정할 것이다.

    그의 불행과 관련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험에 몰아넣은 것으로도 부족하여 현규하까지 죽이려 하지 않았나. 창백하고 흰 손이 현규하의 복부에서 튀어나오던 그 순간은 스토얀과 인유신을 대척점으로 가른 순간이기도 했다.

    시야가 차단된 어둠 속에 무연히 떠 있는 손을 가만히 잡아 오는 온기가 있었다.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할 뻔했던 것.

    이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감각이 한층 더 다듬어졌다.

    “뭐가 느껴져”

    어둡다. 어둡고 어둡고 어둡다.

    강제로 산 제물이 되어야 했던 남매가 지르지 못한 내면의 비명처럼.

    “어둠을 밝히려면”

    빛.

    “그거야.”

    어떻게

    “우리에게 이름을 내려 준 신은 여름의 태양과 불의 신이란다.”

    여름의 태양.

    크르스니크는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오래 비추는 하지의 때, 그 빛을 상징하는 신이다.

    인유신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기억의 늪에 숨어 있던 지식이 부상하여 그에게 아로새겨졌다.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이 간 것처럼 갈라진 어둠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뀹!”

    “어, 8세야. 깨어 있었어”

    워낙 조용해서 벌써 기절한 줄 알았던 8세가 파우치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더니 힘내라는 듯 작게 울었다.

    테이밍을 했으니 8세와 연결되어 있다는 건 평소에도 느끼고 있다. 이제 그 감각이 더욱 뚜렷해졌다. 8세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마나의 조력을 얻고 있는지.

    비로소 실감한다. 이 녀석은 정말로 둠네제울과 스토야가 안배한, 그를 위한 선물이었다.

    8세로 인해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는 마나가 손에 깃들었다. 무력하다고만 여겼던 손끝이 상공에 커다란 마법진을 그려 냈다. 과거 스토야에게 마법진을 배웠을 때보다 더욱 자유롭게.

    마지막 문자가 맺히며 마법진이 완성되었을 때,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손날을 옆으로 세워 이마에 댔다. 살짝 눈을 찌푸리자 현규하가 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현규하도 눈이 부시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올려다보자 그가 옅게 떨리는 음성을 흘리며 인유신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었다.

    “……아름다워요, 정말.”

    저 높은 궁창에서 발하는 태양의 빛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