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 (201/214)

성스러운 신력과 현규하의 마나가 맺힌 창날이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크읏!”

당혹감에 젖어 있던 스토얀의 대응이 늦었다. 급히 몸을 피했음에도 창날은 그의 허리를 깊이 할퀴었다.

스토얀이 상처를 손바닥으로 감싸며 낮은 신음을 씹었다. 그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현규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상처는 검은 연기를 흘리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뱀파이어의 육체이기 때문에 성유물의 효과가 극대화된 것인가.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스토얀의 노성이 깨져 가는 어둠 속을 울렸다.

“너……! 너, 담피르였구나!”

“담피르가 아니라고 했던 구라를 아직까지 믿었어”

“어떻게 서번트 태블릿에는 분명히 없었는데!”

“그걸 가르쳐 주겠냐.”

더 여유를 주어서는 안 된다. 찢어진 복부의 고통을 억누른 현규하는 단번에 거리를 좁혔다.

카앙! 캉!

스토얀의 손끝이 섬광처럼 빠르게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에 부딪힌 창날은 튕겨 나왔으나 마법진 또한 조금씩 손상되고 있었기에 스토얀은 계속해서 다시 그려야 했다.

그 모습을 본 현규하도 추측을 확신했다. 빠르게 창을 휘둘러 몰아치며 이죽거렸다.

“신력에 타격을 입는 걸 보니 신들이 아버지에게 신벌을 내리기로 작심한 모양인데”

“……쯧.”

“요행히 다른 세계로 튀어 봤자 어차피 뒈질 거, 그냥 아들 손에 죽어 주는 건 어때요 내가 태어나고 클 때까지 부모로서 뭐 하나 해 준 것도 없잖아.”

“다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는 게 자식의 의무란 생각은 안 하니”

“아니 뭐, 아버지한테 받아먹은 게 있어야 말이죠.”

“담피르로 태어나게 해 줬잖니.”

말을 끝맺기도 전에, 스토얀은 반대편 손등에 마법진을 띄워 올리고는 그대로 현규하의 복부를 후려갈겼다.

“……크윽!”

스토얀은 체술에 썩 능하지 않았기에 그리 대단한 타격은 아니었다. 현규하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말이다.

겉으로는 피가 멎어서 멀쩡해 보이지만 그의 내부 장기는 극심한 손상을 입은 상태다. 그 위에 재차 가해지는 충격은 억지로 지탱하고 있던 육체의 균형을 깨트리기에 충분했다.

“쿨럭!”

삼키지 못한 선혈이 입 밖으로 왈칵 쏟아졌다. 비틀거리면서도 손에 쥔 창을 놓지 않고 창격을 가하려 했으나 또 한 번의 충격이 복부를 두드렸다. 눈앞이 새하얗게 찢어졌다. 이어 한 번 더.

끝내 한쪽 무릎이 꺾였다. 후들후들 경련하는 손이 창대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나려 했으나 이번에는 가슴을 세게 걷어차였다.

쿠당탕!

바닥으로 나뒹굴게 되었는데도 참혹하게 찢긴 복부의 통증이 무엇보다 거대하였기에, 부딪힌 몸의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씨발.’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려는 그의 복부를 스토얀이 발로 밟았다.

컥!

배 속으로부터 선혈이 꿀렁거리며 역류했다. 오기로 억누르고 있던 육체의 통증이 봇물 터지듯 밀려와서 신경을 으적으적 난도질하며 집어삼켰지만, 그는 입가를 떨면서도 특유의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뱀파이어와 상성 드럽게 안 맞는 담피르의 육체도 필요한지”

“타격이 없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만, 어쩌면 오히려 담피르가 나에게 이득이 될 수도 있지.”

현규하를 내려다보는 스토얀의 낯에는 이제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마음에 드는 것이었기에 현규하는 피를 쿨럭거리면서도 입술 끝을 올렸다. 이만큼 동요시켰으면 유신 씨의 환각도 깨졌을까. 젠장, 트라우마가 자극되어서 또 14년 전의 일을 떠올리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반쪽이나마 뱀파이어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번거롭게 산 제물이 되는 절차를 밟을 필요 없이 내가 ‘물면’ 나와 흡사한 구조를 지닌 영생 불로가 되지 않을까 고민 중이거든.”

“파계도 못 쓰는데 여기서 뭐 어떻게 도망치려고요”

스토얀이 가늘게 조소했다.

“너는 세계의 법칙을 하나도 모르는구나. 공부도 안 하고 뭐 했니”

“씨발. 가르쳐 준 적이나 있어요 빨리 자기한테 오라는 변태 같은 세뇌나 했던 주제에.”

“좋아.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알려 줄게. 기억해 두렴, 얘야. 방법은 두 가지나 있단다. 먼저 불균형을 이룬 현재 이아드의 상황을 이용해서 세계의 틈을 찾을 때까지 신들을 피해 다니는 것.”

격통으로 인해 일그러진 현규하의 눈앞으로 스토얀이 손을 펼쳤다. 꿈틀거리는 빛무리가 보였다. 멸망한 환각을 보여 줄 때 작용했던, 종말의 잔재다.

“또는 종말 속에서 길을 여는 방법도 있지. 부하가 굉장히 심해서 이 방법은 되도록 쓰고 싶지 않긴 하다만. 솔직한 말로 둘 다 도박이긴 해.”

앞서 현규하가 한 말이 맞았다. 다른 세계로 도망쳐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만약 이아드처럼 신의 영향 아래에 놓인 세계로 가게 된다면 신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세계를 건너간 즉시 신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아드에 남아 있어도 이 혼란이 종식되자마자 신벌이 내리는 건 매한가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도박을 걸어 볼 만하다고 스토얀은 판단했다.

‘아니, 도박은 아니로군.’

스토얀은 입술 끝을 냉소적으로 비틀었다.

죽음을 무릅쓴 도박이 아니다. 그는 설사 반드시 죽게 되더라도, 이아드에 묶이지 않은 육체를 갈취하여 자유로워질 것이다. 죽지도 못하는 몸으로, 오직 그것만을 갈망하여 지독한 영원을 보내지 않았던가.

한편 설명을 듣던 현규하의 뇌리에는 기시감이 퍼뜩 튀어 올랐다.

【말세가 도래하면 길이 열릴 것이다.】

구삼승의 그 말과 동일한 의미가 아닌가

“종말이란 게…… 커억!”

“시간 낭비는 끝이야.”

복부를 밟은 발에 체중을 실어 내부를 뒤틀어 놓는다. 걷어찬다. 짓밟는다. 한 번 더. 한 번 더. 한 번 더.

스토얀이 꼼짝도 못 하고 신음만 흘리며 웅크린 현규하의 목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현규하는 가까워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창을 휘둘렀다. 그렇게 하려 했다.

하지만 필사적인 일념과는 달리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끝은 부들부들 떨리다가 창대를 놓쳤다. 롱기누스의 창이 쇳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다소 회복되었던 마나도 귀속 아티팩트를 사용하느라 다시 바닥났다.

끝인가. 정말, 이걸로

“아버지 말을 잘 들으니 얼마나 좋아.”

머리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쏙 빼닮은 부자는 손도 닮았다. 닮았지만 다르다.

굳은살이 박인 아들의 거친 손과는 달리 보드랍고 매끄러운 손이 우악스럽게 티셔츠의 목깃을 찢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송곳니를 보면서, 현규하는 그를 가장 엿 먹일 수 있을 최후의 방법을 떠올렸다. 피가 빨려서 ‘물리기’ 전에 자살하면 될 것이다.

다만 그 방법은.

‘젠장.’

현규하는 이를 으득 악물었다. 입 안에서 피비린내만이 감돌았다.

죽는 건 아쉽지 않다. 오히려 현재 취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 아닌가. 눈앞에서 자살함으로써 스토얀의 계획을 끝까지 망가트린다면 오히려 유쾌하지 않겠는가. 어머니를 위한, 그리고 여기까지 농락당한 제 인생의 즐거운 복수가 되지 않겠는가.

자살은 쉽다. 한 줌 남은 마나를 긁어모아 머리를 날려 버리면 끝이다. 쉽다. 정말 쉽다. 금방 끝낼 수 있다.

“크……!”

그렇지만 마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죄악감이 치민다.

자살이 쉽다고

거짓말이다. 전부 거짓말이다.

돌아가기로 약속했다. 그가 안전하게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머니에 대한 것도 잊겠다고 결심했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보았다.

맛집을 검색하여 떡볶이도 먹으러 갈 것이고, 노래방과 영화관도 갈 것이다. 꾸준히 운동하면서 등산도 할 것이다. 머리를 맞대며 인형 옷도 만들고, 유치한 수작을 부리다가 나잇값 못 한다는 핀잔도 들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가 하나 더 있는데, 이건 비밀로 해 두겠습니다.〉

언젠가, 언젠가는.

삶을 걷지 못하고 막연히 부유하는 그를 온전히 붙잡고, 깊이 입 맞추며 온기를 나눌 것이다. 나는 죽을 수 없다. 그를 위해, 절대 죽을 수 없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머리에 총알이라도 박을까 계속 고민하던 참이에요.〉

한없이 가벼웠고 하찮았던 자신의 죽음이, 어느새 이렇게 무겁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리기만 하며, 종국으로 서서히 추락하던 발이 바닥에 내려섰다. 단단히 뿌리를 내려 표착한 발은 더 이상 죽음을 향해 떨어지지 않는다. 이곳에 있다. 나는 이곳에 있다.

내 삶이 비로소 나의 것이 되었다.

이 방황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나의 이정표. 나의 주인. 나의 삶. 나의 유일한 믿음.

“으아아아!”

현규하는 어깨에 매달린 고깃덩어리처럼 축 늘어진 팔을 억지로 움직였다. 이를 세우며 목덜미를 깨물기 직전이던 얼굴을,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손으로 덮는다.

[귀속 아티팩트 ‘마지막 황제의 부러진 십자가’를 일부 해방합니다.]

간신히 긁어모은 마나가 손에 신력을 깃들게 하자, 스토얀에게 남은 마나를 때려 박듯 주입했다. 마나는 본디 신이 섭리를 통하여 인간에게 내려 준 힘. 인간이 인간에게 마나를 주입하면 어떠한 해악도 이로움도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크아아아아!”

그는 담피르. 인간에게 기생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보존하지도 종족을 번식하지도 못하는 불완전한 피조물을 멸하기 위해 스스로 제 운명을 바친 당대의 담피르였다. 거기에 신력을 더한다.

목덜미를 움켜잡고 있던 손이 경련하며 풀렸다.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는 현규하의 흐린 시야에 얼굴을 감싸며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스토얀의 모습이 보였다.

“하, 하하……. 꼴, 좋네.”

선혈을 토하며 현규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롱기누스의 창을 가지러 갈 기력도 없었다. 성유물도 없이 맨손으로 신력을 빌린 대가로 손은 끔찍하게 짓이겨져 있다. 상관없다. 여기에서 끝을 낼 수만 있다면.

마지막 마나의 한 방울까지 쥐어짜듯 끌어올렸다. 신력과 어우러진 마나는 스토얀의 내부부터 찢어발길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제 팔이 영원히 망가지게 되어도 괜찮았다.

그리고 손등의 문신이 다시금 빛을 발하려던 때.

휘황하게 빛나는 백광이 어둠을 갈랐다. 성스러운 하얀 짐승의 기운이 넘실거리며 사위를 잠식한 삿된 검은 짐승의 혈향을 정화한다.

일그러진 얼굴 너머로, 스토얀이 비명처럼 경악했다.

“……크르스니크!”

  

감은 눈꺼풀 위로 세계가 명멸했다. 인유신은 소년의 종말을 보았다.

비밀을 만드는 것도 어려울 만큼 작은 마을, 야트막한 언덕에서 개울까지 이어지는 소박한 공간, 가족과 친구, 이웃.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아도 푸근하게 흐르던 수수한 나날들.

마을과 가족은 소년에게 있어서 투박하지만 완벽한 세계였다.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그 위의 일가가 그러했듯이. 소년 또한 이 마을에서 가족과 친구들과 부대끼며 성장하고, 나이를 먹고, 늙어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그랬을 터였다.

세계의 종말은 갑작스러웠으며, 사소했다.

“나는 끝까지 이유를 알지 못했어. 어째서 진조가 우리 마을을 방문했는지. 왜 마을 사람들을 죽여야겠다는 결심을 했는지. 이제는 영영 알지 못하게 되었지.”

굶주렸을까. 상처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도 아니면 그저, 무료했을까.

네쿠라툴이 빚은 최초의 뱀파이어는 그렇게 종말로서 마을을 방문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 막지 못하는 거대한 재해였다.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가,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어머니가, 동생들을 살리기 위해 누나가, 막냇동생을 살리기 위해 형이. 심장이 적출당하고 목이 뜯기고 피가 빨린 가족과, 친구들과, 마을을 뒤로하고 소년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소년의 세계는 증오와 원념에 짓뭉겨진 채 종말로 추락했다.

그는 유일하게 가진 단 하나의 것, 제 심장을 신에게 바쳤다. 이를 긍휼히 여긴 신이 소년을 거두었으나 종말 속에 살아가는 소년은 미래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사람과도 다른 관계로 만났다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어.”

미래를 보지 못한 소년은 목적을 공유하는 유일한 짝인 담피르마저 자신과 같은 도구로 삼았다. 담피르와 의견을 나누지도 않고 강제로 제 운명에 얽어매었다.

진조를 사냥하기 위해 기능하는 도구는 목적을 이수하는 때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상실했다. 무너진 세상에서 소년과 담피르는 더 이상 나이를 먹지도, 늙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내에 목적을 완수한 도구는 기능을 정지했으나.

“내 시간이 다시 흐르는 일은 없었지.”

소년은 자신의 멸망한 세계에 함몰된 채 숨을 거두었다.

“그 사람이 내가 죽고 난 뒤에 자살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후회했어. 증오와 원한에 매몰되지 말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있었다면 죽기 직전의 찰나에 불과할지언정, 내 시간이 조금은 흐를 수 있었을 텐데. 그 사람과 좋은 친구가 되는 미래를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소년의 종말은 그렇게 완전한 끝을 맺었다.

“너도 후회하니”

그래. 후회한다고 생각했던 적은 있다.

〈……저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절대 그 사람과 엮이지 않을 거예요.〉

서로의 의지가 깃들지 않은 테이밍은 담피르의 운명을 강제로 얽어맨 소년과 같은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좋지 않은 일이다.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여전히 든다.

하지만 시작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과정까지 잘못되는가.

최초의 담피르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의지로 다시 운명을 얽었듯이, 인유신과 현규하의 나날을 구성하는 것은 마주 보는 서로의 삶이다.

인유신의 세계는 종말이 아니기에.

“후회하지 않아요.”

자신에게 미래를 준 그를 위해. 그리고 그와 함께 걸어갈 나를 위해.

찬란한 백광 너머로, 미래로 향하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