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200/214)
  • 현규하는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영생 불로의 존재가 되는 게,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불로불사가 되면 마음이 바뀔 거 같아서 그래요 아버지처럼 산 제물이 되어 줄 거라고”

    “그렇게 멍청한 생각을 할 리가 있겠어 불로불사는 왕이 되는 것의 대가라 보아도 무방한데, 대가부터 먼저 주고 요청해 봤자 먹힐 리가 없겠지.”

    “그럼 왜요.”

    스토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의 눈동자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실소했다.

    “볼수록 날 닮은 눈빛이라니까. 너는 이딴 세상 따위는 멸망해 봤자 아무 신경도 안 쓸 거야. 안 그래”

    “알면서 뭘 물어요.”

    “응, 그래서 현혹을 써서 편하게 써먹으려 했지. 이상하게도 너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특별한 정신 방어 아티팩트를 소지하는 것도 아닌 듯한데 왜일까.”

    현규하는 어머니에 대한 의혹을 끝까지 가슴에 묻고 외면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과거에 얽매여 인유신이라는 미래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므로. 하니 이 같은 상황에 몰리고, 스토얀에게 그 단어를 직접 듣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터였다.

    현규하는 고통을 삼키며 물었다. 말을 할 때마다 입 안에서 피 맛이 감돌고 내장을 갈퀴로 긁어 헤집는 것만 같다.

    “어머니에게 했던 것처럼요”

    스토얀의 입가에 웃음이 빙긋 매달렸다. 되돌이키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것처럼.

    “섭리에 의해 마침내 이아드에도 게이트가 열리고, 그 뒤로도 수백 년 동안 나는 기다렸단다. 소라는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최적의 인간이었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존재였어. 소라가 이아드에 온 것을 감지했을 때, 내가 얼마나 환희했는지 넌 모를 거야.”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들의 눈가를 짐짓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스토얀이 속살거렸다.

    “얘야, 태어나게 해 주었으니 죽기 전에 아버지에게 효도 한 번은 해야 하지 않겠니 네 몸을 나에게 주렴.”

    부상이 아니었다면 웃음을 터트려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기가 막히고, 짜증 나는 발언이었으니까.

    “몸을 제공하라는 게 다른 의미는 아니겠고, 나한테 빙의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우리 아들은 똑똑하기도 하네.”

    “늙을 만큼 늙었으니까 젊고 싱싱한 나로 갈아타려고요 똑같은 얼굴이지만 내가 더 잘생겼으니까”

    “갈아탄다……. 재미있는 표현이구나.”

    그 말이 마음에 드는 듯 스토얀이 미소했다.

    “맞아, 그러기 위해서 널 낳았지. 피가 짙은 혈육일수록 갈아탔을 때 육체와 영혼이 괴리하지 않고 온전히 융화되기 때문이야.”

    “…….”

    진짜 목적은 ‘영생 불로가 된 육체’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육체를 갈아탈 자식을 낳기 위해 현소라의 정신을 지배했다는 뜻이……. 아니다. 현규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식 따위야, 다른 여자에게서도 얼마든지 낳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스토얀에게 발각되지 않게끔 눈을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암흑에 삼켜진 인유신의 모습은 여기에서 보이지 않았다. 안의 공간이 왜곡되어 있는지 널브러진 사람들의 신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의 호재라면, 시간을 끄는 사이에 마나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멸망을 보여 주는 환영 자체가 스토얀의 영역이다. 비릿하게 감도는 혈향은 이것이 뱀파이어의 영역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적대적인 영역에 잠긴 오감이 둔하고 팔다리가 무거웠다.

    ‘사이코키네시스를 써서 날려 보내는 건……. 안 돼. 멸망을 구현한 스킬부터 거두게 해야 해. 어떻게 해야 깨지는 거지 육체적 충격 정신적 충격 마나 고갈’

    현규하는 어떻게 해야 스토얀의 허를 찌를 수 있을지 가늠하며 다시 물었다.

    “어차피 망할 세상인데 갈아타 봤자 쓸모없는 거 아닌가.”

    “그야, 도망쳐야지.”

    “……뭐”

    그 말에는 현규하마저 순간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묻고 말았다. 오히려 스토얀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놀라니 우리아쉬까지 풀어 버린 내가 엉망이 된 이아드에 계속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

    “내가 수백 년간 기다렸던 건 ‘신이 떠나간 세계’ 출신으로 ‘파계’ 스킬을 가진 ‘젊은 여성’이었단다, 얘야.”

    아.

    그제야 스토얀의 진의를 이해한 현규하가 허탈한 숨을 뱉었다. 진작 추측했어야 했는데, 자신이든 인유신이든 ‘도망친다’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떠올리지 못했던 해답이다.

    스토얀이 그의 확신에 쐐기를 더해 주었다.

    “나는 이아드에 얽매여서 꼼짝달싹도 못 하는 낡은 육체를 버리고, 자유로운 너의 몸으로 파계를 써서 신이 없는 세상으로 도망칠 거야. 불로불사는 요즘 말로 추가 옵션이라고 할까. 소라가 왔던 세상의 이름이 철의 시대라지 아주 마음에 들어.”

    그랬다. 그래서였다.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을 확인한 이후, 스토얀은 한 번도 그를 이름으로 지칭한 적이 없었다. ‘현규하’라는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종속되어 있는 자식에 불과하다는 듯이.

    철저히 이용하고 써먹을 수단으로만 보는 도구에게 이름을 붙여 가며 애지중지 가꾸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참, 나.”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빌어먹게도, 정말 빌어먹게도,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핏줄이라는 것이 은연중에 자신의 발목에 휘감긴 사슬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그는 동요 없이 시치미를 뚝 떼고 스토얀을 떠볼 수 있었다.

    “뭐, 당사자가 나라는 문제만 빼면 좋은 계획인데요. 어머니의 파계는 따로 추출한 게 맞아요. 근데 그거 써 봤자 가는 곳은 랜덤이잖아요 재수 없게 이아드처럼 신의 영향 아래에 있는 세계로 가면 신벌을 피할 수 없을 텐데요 신들이 이아드를 개박살 내고 튄 아버지를 용납할 리가 없잖아요.”

    “철의 시대에는 너와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 있잖니. 소라나 소라의 어머니에게 다른 형제자매가 없어도 대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반드시 하나 이상은 있어. 평범한 인간이라면 겨우 그 정도의 옅은 피로 이정표를 삼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신대의 마법을 지닌 나는 예외지.”

    계획이 목전에 다다라 꽤 즐거웠기에, 스토얀은 시간을 끌려는 현규하의 의도를 눈치챘으면서도 순순히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것도 슬슬 마지막이었다.

    “자아, 그럼 네 주인이라는 그 청년에게서 파계를 가져오…….”

    의미 없는 대화를 마무리하려던 스토얀은 멈칫했다. 그에게 잡힌 채로 신음 섞인 숨을 몰아쉬고 있던 현규하가 어깨까지 잘게 떨며 잔웃음을 터트린 탓이었다.

    “……”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아해진 스토얀은 고통이 뇌를 잠식하여 미쳐 버렸나, 싶은 생각까지 했으나 아니었다. 현규하의 이성은 지극히 명료했고, 유쾌했다. 인유신과 어울릴 때를 제외하고 이만큼 신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아, 진짜……. 엄마랑 성격도 능력도 외모도 하나도 안 닮아서 친아들이 맞냐는 개소리도 가끔 들었는데……. 씨발, 엿 먹이는 거 좋아하는 걸 보니 나 엄마 자식 맞네.”

    “……얘야, 갑자기 무슨 말이니”

    “파계를 엄마가 추출하긴 했는데 나한테 주면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무한테나 넘겨주지 말고 이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에게 주라고 했어.”

    “…….”

    현규하는 그렇게 했다.

    유언이나 다름없는 어머니의 말을 따라 스킬을 일부 조정하여 자신의 마나를 각인하고,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사람에게.

    “한마디로 날 부르는 콜 버튼이 되었다는 거야. 그렇게 바뀌었어.”

    “…….”

    “우리 엄마가 너 엿 먹인 거라고, 등신아.”

    “…….”

    스토얀의 얼굴이 처음으로 평정을 잃고 일그러지는 모습을, 현규하는 더욱 유쾌하게 응시했다.

    현소라는 멍하니 눈썹을 깜빡거렸다. 잔뜩 겁에 질려서 눈치를 보는 저 아이는 누구지 뭐지 왜 나와 같이 있지

    의문은 심장 안을 욱신거리며 휘도는 낯선 감정의 부유와 함께 해소되었다. 아이. 내 아이. 내 아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낳은 내 아들.

    극심한 두통이 치밀어 올랐다. 뇌를 가르고 헤집는 듯한 통증 속에 ‘사랑하는 사람’이 명령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애정의 갈망으로 몸부림치고 있음에도 흐려지지 않는 절대적인 명령이다.

    《소라. 너희 세상에도 스킬을 추출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지 아아, 그들을 연금술사라 부른다고 지칭이야 뭐든 상관없으니 아이를 낳으면 그 애에게 네 스킬을 추출해서 줘. 언젠가 이아드로 돌아올 네 아들이 나에게 스킬을 돌려줄 수 있도록.》

    그래, 맞다. 자신은 제 스킬을 추출하여 이 아이에게 줘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을 원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스킬을 주고 난 뒤에,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놀라우리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쏙 빼닮은 내 아들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비롯된 의무를 부여받은 내 아들은. 뇌리에 ‘사랑하는 사람’의 부름이 강제로 새겨진 내 아들은.

    ‘……아니야. 이게 아니야. 아니라고……!’

    현소라는 극심한 두통 속에 비통한 울음을 토했다.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도대체 ‘누구의’ 아이를 낳은 거지.

    영혼을 쥐어뜯는 아찔한 경각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은 끊임없이 그녀를 재촉했다. 네 아들에게 스킬을 추출해서 줘. 네 아들에게 스킬을 추출해서 줘. 네 아들에게…….

    내 아들.

    내 아들.

    내 아들.

    현소라는 그 단어가 상징하는 것이 모성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필사적인 애정에 함몰되어 있는 그녀의 정신은 열 달간 품었던 아이에게 향할 마음까지 모조리 앗아 갔으므로.

    그럼에도 이 아이는, 겁에 질린 호박색 눈동자로 보는 아이는, 자신의 이정표였다. 자신이 낳았기에, 이 작은 몸에 가혹한 운명을 짊어지게 될 아이였다.

    공포에 가까운 죄책감에 현소라는 오열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엄마. 아프지 마…….〉

    작은 온기가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얹혔다. 기억이 비산했다. 언제나 괜찮냐고 걱정스레 먼저 다가오던 아이를 받아 줄 여유도 없이 미쳐 있던, 맹목적인 자신의 모습들이. 거듭하여 내쳐지고, 외면되고, 거부되었음에도, 줄곧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아이의 절박한 시선이.

    내 아들.

    내 아들.

    내 아들…….

    그녀의 이지를 언제나 혼몽하게 흐리게 했던 머릿속의 안개가 걷혔다. 그 시간이 극히 짧을 것임을 직감했기에, 현소라는 필사적으로 아이를 붙잡았다.

    〈너는, 이 구슬을 아마 누군가에게 주게 될 거야. 그렇게 될 거야. 하지만……. 아무에게나 주어서는 안 돼.〉

    파계는 ‘누군가’에게 주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현소라는 금세라도 되돌아와 명령할 것 같은 음성의 무게 속에 허덕거렸다. 하지만 주면 안 돼. 마모되고 퇴행한 사고를 현소라는 필사적으로 이어 갔다.

    〈그러니까 이건……. 너의 이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에게 주렴.〉

    네가, 나의 이정표가 되어 주었듯이.

    이 짧은 시간이나마 나에게 온전한 정신을 돌려준 너와 같은, 그런 사람에게.

    그러면 너는, 너만이라도 ‘이 음성의 주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질지도 몰라.

    〈엄마가 미안해. 널 낳아서 정말 미안해…….〉

    현소라는 악몽처럼 찾아오는 죄책감의 무게에 흐느끼면서 아들을 끌어안았다. 품에서 조심스럽게 꼬물거리는 작은 온기에 절박하게 매달리며.

    다시 그 음성에 지배된다면, 잊게 될, 그 온기를.

    태양을 먹어 삼킨 암흑에 균열이 생기고, 본부에 밝혀져 있던 인공적인 빛이 일부 흘러들었다. 멸망을 구현한 그의 영역이 흔들리고 있다.

    ‘정신을 흩트려도 되는 거였군.’

    긴 세월 비밀히 준비하였을 계획이 막바지에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으니 오죽할까. 그리고 스토얀의 뒤통수를 보기 좋게 갈겨 버린 사람이 어머니였다는 사실에, 현규하는 소리 높여 웃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는 쓸모가 없어서,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게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를 사랑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스토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비록 그 순간이 찰나에 지나지 않을 만큼 짧아 깨달음의 때가 아주 늦어 버렸지만, 결과가 지금 이렇게 눈앞에 있지 않은가.

    ‘어머니에게 이 광경을 보여 줘야 하는데.’

    어머니가 시원하게 뒤통수를 날려 버렸으니, 마무리를 하는 건 자식인 제 몫이겠지. 현규하는 울컥거리며 치밀어 오르는 핏물을 꿀꺽 삼키며 아공간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재빨리 꺼냈다.

    [귀속 아티팩트 ‘마지막 황제의 부러진 십자가’를 일부 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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